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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76화 (17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76화

176화

이만주의 부하들이 도르호치가 앉아 있는 앞쪽 바닥에 가져온 꾸러미를 내려놓고 펼쳤다. 꾸러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납작한 막대 모양의 쇳덩어리들이었다.

"무슨 쇠를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냐?"

"그냥 쇠가 아니야. 휘어 봐라."

이만주의 말에 부하 하나가 쇳덩어리 하나를 들어 도르호치에게 주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쇳덩어리를 받아든 도르호치가 막대 양쪽을 잡고 힘을 주자 막대가 천천히 휘어졌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도르호치를 보고 이만주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러지는 게 아니라 쉽게 휘어지는 걸 보니 알겠지? 이건 연철이다. 그것도 모든 꾸러미에 든 게 전부 다 말이야."

"이 많은 연철을 대체 어디서 산 거냐?"

"사긴 무슨. 명나라나 조선이 미쳤다고 연철을 팔겠냐? 우리가 만든 거다."

그 말에 도르호치가 더 놀라서 물었다.

"연철을 직접 만들었다고?"

"못 믿겠나?"

도르호치가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솔직히 믿어지지 않아. 하지만 명나라 놈들이 아무리 장사에 눈이 먼 놈들이라 한들 이렇게 많은 연철을 팔았을 리가 없고, 만약 조선에서 털어 온 것이라면 네 목이 붙어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니 믿을 수밖에 더 있나?"

"좋아. 잘 판단했네."

"그래서, 이 연철을 받고 땅을 넘기라고 가져온 거냐?"

질문하는 도르호치의 얼굴에는 약간 긴장한 기색이 비치고 있었다. 거래에 이만한 양의 연철을 가져왔다는 건 실제로 만들어 낸 양은 더 많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연철은 무기를 만드는 재료이니, 땅을 내놓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었다.

그 상황을 이해한 이만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고작 연철 이만큼으로 땅을 그만큼 살 수 있다면 우리야 남는 장사지. 나야 환영이지만 그래도 되겠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럼 이 연철은 왜 가지고 온 거냐?"

"오늘은 단순한 거래를 하러 온 게 아니야. 더 큰 거래를 시작하기 위해 온 거지. 이건 그걸 위해서 선물로 가져온 거다."

"이 연철이 다 선물이라고? 대체 무슨 거래를 시작하려는데 이만큼을 그냥 준단 말이냐?"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연철을 만드는 재료로 무쇠가 필요해. 그 무쇠를 너희를 통해서 구하고자 한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이만주의 말에 도르호치가 당황한 듯 말했다.

"우리도 무쇠 만드는 기술은 없는데?"

"알아. 명나라에서 사오는 걸 말하는 거다. 너희도 알다시피 명나라가 우리를 견제하다 보니 무쇠 농기구를 이전만큼 팔아 주질 않아. 물론 놈들이 우리가 연철 만드는 기술이 있다는 걸 알고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그저 우리가 농사짓는 걸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팔아 주지 않을 뿐이지."

"그럼 우리더러 명나라에서 무쇠 농기구를 사서 너희에게 팔아달라는 거냐?"

"그래. 물론 너희 쓸 것까지 우리에게 팔라는 건 아니야. 마침 명나라가 우리를 견제하고자 너희를 지원해주는 상황이고, 너희가 여기로 이주해온 지도 1년이 넘었지. 그러니 명나라한테 너희가 작년에 농사를 지어 보니 아무래도 밭을 더 많이 개간해야 굶어 죽지 않을 거 같다며 평소보다 농기구를 더 팔아 달라고 해라."

"농기구가 한번 쓸 때마다 많이 닳아 없어지는 물건도 아니고, 그 이유로 농기구를 많이 사고 나면 이후로는 많이 팔아 달라는 명분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

"만일 명나라가 그렇게 나온다면 개간해도 여전히 부족해서 더 필요하다고 해라.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우리가 도와주마. 다른 부족을 농기구로 포섭해서 명나라에 입조시켜 보고자 한다며 더 팔아 달라고 해라. 우리가 너희 영향력이 너무 커지니 팔지 말라며 반대하는 의견을 내면 명나라는 진짜구나 싶어 너희에게 냉큼 팔 거 아니겠냐. 이게 아니더라도 좋으니 어떤 방법을 써서건 무쇠 농기구를 가져와서 팔아다오. 대금은 연철로 넉넉히 쳐서 주마. 너와 내가 이 거래를 하는 게 바로 땅을 사는 값이다."

연철이 필요하긴 하지만 마땅히 구할 곳도, 만드는 기술도 없는 훌룬 부족에게 대금을 연철로 준다는 것은 제법 매력적인 제안이긴 했지만, 도르호치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는 견제 받고 우리는 지원받는 중이다. 너희와 짜고 명나라를 속여 무쇠 농기구를 많이 사들이다가 그게 너희에게 연철 만들 재료를 팔려던 목적이었다는 게 들키면 받던 지원도 끊겨 버릴 수 있어. 차라리 지금 상황을 유지하며 지내는 게 우리에게는 더 나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애초에 너희도 무쇠를 명나라에서 사와서만 연철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아마 명나라에 의지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무쇠부터 만드는 방법이 이미 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진지하게 물어보는 이만주의 눈을 똑바로 보며 도르호치가 말했다.

"명나라에서 무쇠를 사와야만 연철을 만들 수 있는 거라면 네가 나한테 말했겠느냐? 내가 명나라에 사실대로 전부 말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서건 너희에게 팔리는 무쇠 농기구의 양만 줄여 버리면 너희가 가진 연철 만드는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는데?"

그 말에 이만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군. 정답이다. 우리가 직접 만드는 거에 더해서, 명나라에서 무쇠 농기구를 들여와서 추가로 더 생산할 계획이야."

실제로는 아직은 무쇠를 만드는 기술이 완성되기 전이고, 명나라에서 무쇠를 들여와서 만들지 않으면 생산량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만주에게 제대로 속아 넘어간 도르호치가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연철 만드는 기술이 있다는 걸 우리가 명나라에 일러바치지만 않는다면, 거래가 무산되더라도 너희도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 않느냐?"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너희가 우리에게 기술이 있다는 걸 명나라에 알릴 수 있으니 우리도 섣불리 너희 땅을 힘으로 빼앗으려 하지 못하게 되겠지."

"만약 우리가 선수를 쳐서 명나라에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이만주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수 있겠나? 지금도 우리는 견제 받고 너희는 지원받고 있는데, 너희가 그걸 명나라에게 일러바치기까지 하면 잘했다며 지원받는 건 커지고 우리를 향한 견제는 더 심해질 거다. 그 상황에서 너희에게 보복하겠답시고 나설 정도로 우리가 멍청했으면 네가 해서위를 받고 우리를 견제했을 때 이미 보복했을걸? 대신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보복이 아니라 후대의 비웃음을 감당해야 할 거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만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언제까지고 명나라가 너희를 지원해 줄 것 같으냐? 명나라가 주변의 나라나 부족들을 도와주는 건 그들을 아끼거나 가깝게 여겨서가 아니야. 당장 나만 해도 3대에 걸쳐 명나라의 신하였고, 내 고모는 황후셨다. 하지만 지금은 견제를 받다 못해 농기구도 팔아 주지 않아 남에게 의지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느냐? 명나라가 우리 훌리가이 부족을 도와줬던 이유는 하나. 북원을 견제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리고 너희 훌룬 부족을 돕는 이유도 하나야. 북원과 우리 훌리가이 부족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서지."

그 말에 도르호치가 피식 웃었다.

"명나라가 우리더러 북원까지 견제하게 만든다고? 북원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우리를 키워 주면 제 손으로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일 텐데?"

"당연히 너희가 단독으로 북원을 견제할 수 있게 키울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 명나라가 없으면 북원을 막을 수도, 이길 수도 없는 정도로만 키워서 붙잡아 두면 그만이야. 그리고 북원을 공격할 때는 무기로 삼고, 방어할 때는 방패로 삼는 거지. 왜 명나라가 너희를 요동도사가 관할하는 범위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생각하나? 무기건 방패건 가까이 둬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정이 어두워지는 도르호치를 보며 이만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희 세력이 충분히 커져서 북원과 우리를 견제하기 충분해지면 지원은 뜸해질 거다. 거기서 너희가 세력을 더 키우려 든다면, 이번에는 너희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지원하겠지. 그게 명나라의 방식이니까 말이야. 결국 너희가 아무리 명나라에 충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명나라가 너희를 집 잘 지키는 개 이상으로 취급해 줄 일은 없다. 그 길을 스스로 택한다니 당연히 후대 사람들이 비웃지 않겠나?"

"마치 명나라가 아니라 너희를 고르면 후대의 칭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만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이지. 지난번에 내가 너를 찾아와서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우리가 너희에게 고마워할 일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 이게 바로 그거다. 우리에게 필요한 무쇠 농기구를 너희가 대신 명나라에서 사서 우리에게 팔아 주고 땅도 팔아 주니, 우리로선 충분히 너희에게 고마워할 일이지 않느냐. 그러면 우리는 네가 후대의 칭송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걸로 그 고마움을 갚는 것이고 말이야."

도르호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때 그 말이 너희를 견제 당하게 만든 보복으로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이득을 가져가 줄 테니 두고 보자는 뜻이 아니라, 정말로 그 말뜻 그대로였단 말이냐?"

"그래. 우리가 서로 싸우고 견제해 봐야 좋아하는 건 명나라하고 조선뿐이야. 그런 짓을 해줄 필요는 하나도 없어. 그저 서로 싸우고 견제하는 척하면서 최대한 이득을 보면 그만일 뿐이다."

전혀 속내를 읽어 낼 수 없는 이만주의 얼굴을 마주 보며 도르호치가 말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몇 년 전만 해도 식량이 부족하다고 우리를 습격해서 털어 가기나 하던 놈이 너였는데, 그 몇 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소리를 하는 놈이 된 거지?"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정체를 숨기고 있던 거라 생각해 주면 좋겠군."

이만주의 너스레에 도르호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좋다. 마음에 들었어. 거래에 응하도록 하지. 명나라에게는 땅은 지난번 일의 보복으로 너희가 빼앗아 갔다고 하겠다. 우리가 그 땅을 다시 찾아오기에는 너희가 너무 버겁고, 다시 찾아오더라도 지키기 어렵고, 또 딱히 이득이 많이 나는 땅도 아니니, 차라리 가지고 있는 땅이라도 개간할 수 있게 무쇠 농기구를 많이 팔아 달라 하면 되겠지."

"잘 생각했다. 거래 성립이로군. 그나저나 사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금방 수락한 건 좀 의외로군."

"너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실패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거래에 자기가 가진 모든 패를 들고 나올 놈이 아니라는 내 판단은 신뢰한다. 분명 연철 만드는 기술 말고도 뭔가 더 있겠지."

"하하! 너한테 좋은 평가를 받으니 기분이 묘하군."

"나도 말하면서 이상했다. 그나저나 한 가지만 묻자. 사실 여진족들이 명나라나 조선에서 팔아 주는 물건들에 의지하는 면이 많지 않나. 만에 하나라도 이번 일이 새어나가서 명나라가 우리 둘 다 견제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 거지?"

이만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하긴. 다 방법이 있어. 다만 지금 말할 건 아니니, 그저 계획이 좀 앞당겨질 뿐이라고만 대답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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