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75화
175화
1431년 7월 초순 모일.
거솔도 모처.
계호대대를 이끌고 텅 비어 버린 마을을 찾은 양녕은 병사들이 사방을 수색하는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여진족 마을이었던 이곳에는 사람이나 가축은 찾아볼 수 없었고 세간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계호대대가 배반한 부족을 징벌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이곳은 조선과 가깝기로는 한 손에 꼽히는 부족의 마을이었던 것이다.
"대군, 일단 기본적인 수색은 끝냈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양녕은 들려온 목소리에 옆을 보았다. 등자사와 동권두였다.
"그래, 알아낸 게 있는가?"
양녕의 질문에 동권두가 대답했다.
"샅샅이 찾아봤지만 싸운 흔적이나 핏자국은 조금 보여도 부족원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집도 건물은 멀쩡하지만 들고 가기 어려운 크기의 몇몇 가구를 빼면 남아있는 세간이 거의 없습니다. 밭 역시 조금 어지럽혀져 있긴 했지만,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닌 듯하고 말이 멋대로 뜯어먹은 것 같습니다."
보고를 들은 양녕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이래서야 우리가 배반한 부족들을 징벌하는 것을 이만주 세력도 우리 편 부족에게 보복해서 응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부족이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다가 기회를 봐 달아난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등자사였다.
"제가 보기에는 보복인 것 같습니다. 싸운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고, 이 부족의 그간 행적이나 조선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만주 쪽으로 넘어가서 득을 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동권두는 다른 의견을 냈다.
"저는 도주일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보복을 했다면 경고의 의미로 시체를 남겨 두거나 다른 부족들에게 알리게 생존자를 남겼을 텐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싸운 흔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이만주 쪽으로 넘어가면 손해를 보게 되는 이들이 배반에 반발해 싸우다 생긴 흔적일 수 있습니다."
"둘 다 가능성이 있군. 여기 부족장 집에서는 뭐 나온 게 없는가?"
"예. 철저하게 비워져 있었습니다. 벽이고 바닥이고 싸운 흔적도 없고 세간도 없이 깨끗할 정도여서, 부족장 집을 조사해서 보복인지 도주인지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등자사의 말을 듣던 양녕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집 안이 깨끗했다고?"
"예. 왜 그러십니까?"
"확인해 볼 게 있네. 안내해 주게."
* * *
텅 빈 부족장 집에 들어선 양녕은 살풍경한 내부를 쓱 훑어보고는 말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군. 그럼 내가 잠시 확인해 볼 게 있으니 자네들은 가만히 서 있게나."
그렇게 말한 양녕은 오는 길에 챙겨온 지팡이 정도 크기의 나무막대를 손에 들고 바닥을 두들기며 집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들 말없이 대체 양녕이 무엇을 하는지 바라만 보고 있고, 조용한 집 안에는 흙바닥 두들기는 둔탁한 소리만 들렸다.
"여기는…… 침상을 뒀을 법한 자리로군."
중얼거린 양녕이 어느 바닥을 두들기자 조금 전과는 다른, 약간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양녕이 다른 쪽 바닥을 두들겨보고 다시 조금 전 바닥을 두들겼다. 지금 두들긴 곳만 확실하게 소리가 달랐다.
"여길 파 보게."
양녕의 말에 병사들이 다가가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농기구도 없어 나무막대로 열심히 파내기를 잠시, 이윽고 땅속에서 항아리 뚜껑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등자사와 동권두도 침을 삼키며 바라보는 가운데 양녕이 다가가 쪼그려 앉더니 땅에 묻힌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그 내용물을 본 동권두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소금 아닙니까?"
뜻밖의 물건에 사방이 술렁이는 가운데, 양녕이 항아리에 손을 넣어 소금을 조금 집어 들어 살피다가 혀끝에 대보고 말했다.
"맞아. 소금이야. 그것도 흙도 안 섞이고 습기도 없고 간수도 다 빠진 아주 좋은 소금이군. 이 정도 소금이면 조선에서 구하려고 해도 제법 돈을 줘야 할 걸세."
손에 묻은 소금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양녕에게 동권두와 등자사가 말했다.
"그 정도라면 여진족들 사이에서는 더욱 비싸고 귀한 소금이겠군요. 흐음…… 이렇게 땅을 파면 금방 꺼낼 수 있는 귀한 걸 내버려 두고 다른 세간만 모두 챙겨갔을 리는 없으니, 도주한 게 아니라 보복당한 게 맞겠습니다."
"예. 부족장은 아마도 저항하다 죽었거나 잡혀갔을 겁니다. 그러니 습격자들도 여기 숨겨 둔 소금의 존재를 몰랐겠지요. 그런데 대군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치밀하게 준비를 했던 무타우타도 써레의 무거운 나무 몸체 부분은 버리고 쇠로 된 윗부분만 챙겨 달아났네. 그런데 말 먹이로 쓸 수 있는 덜 익은 밭작물들을 그대로 두고 갈 정도로 급하게 달아나면서 부족장의 세간은 남김없이 챙겨 갔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혹시나 싶어 확인해 본 걸세."
그 말을 들은 동권두가 양녕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기껏 보복해 놓고 이렇게 싸운 흔적은 물론이고 세간까지 모두 치워 버리면 보복인지 도주인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도 대군께서 소금 항아리를 찾아내셔서 겨우 보복인지 알아낸 것이고 말입니다."
"고의로 그랬을 걸세. 보복인지 도주인지 우리는 물론이고 여진족들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말이야. 보복이라 생각하게 되면 조선이 제대로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생각해서 여진족 사이에 불신이 퍼지고, 도주라 생각하게 되면 조선이 친했던 부족들조차 믿지 못하게 되네."
"어차피 이미 이만주 편인 여진족들은 거기 영향을 받지 않겠군요. 조선의 분열책에 분열책으로 맞받아치다니, 제법 머리가 좋은 놈들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여전히 이상해. 대체 이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냔 말이지."
그 말에 등자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조선이 여진족들을 포섭하고 배반자들을 잡아내는 걸 방해해서 시간을 벌고, 그 틈에 배반자들을 탈출시키려는 것 아닙니까?"
"그 배반자들을 탈출시킨 다음 어떤 이득이 있는지가 이상하다는 걸세. 배반자들 대다수는 우디거 아닌가. 우디거들은 주로 숲에 살다 보니 말 타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많아서 좋은 전력이 되지 못하네. 물론 나무를 가공하는 데에야 익숙하겠지만, 숲을 끼고 살아서 나무 다루는 데에 익숙한 건 건주여진에 속하는 부족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게다가 지금 건주여진은 철 가공하는 기술과 조선에서 사 간 견본이 있으니 목공 도구도 직접 만들어 쓸 수 있을 걸세. 무조건 조선에서 파는 도구를 사서 써야 하는 우디거들보다 기술이나 숙련도 면에서 훨씬 앞서 있을 거야."
대화를 듣던 동권두가 말했다.
"확실히 이상하군요. 혈연으로 이어진 부족들을 데려가려는 것도 아니고, 남남이었던 부족들을 요동으로 달아나기 전부터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여 두었던 것 아닙니까. 그것도 다른 여진족들을 더 포섭할 목적으로 말이지요. 대체 왜 그런 걸까요?"
대답 대신 한참 생각하던 양녕이 입을 열었다.
"알 것 같네."
"무엇입니까?"
"놈들이 4윤작법에 대해서 알아냈고, 그걸로 농사를 짓고 있는 게 분명해."
뜻밖의 말에 동권두가 놀라 되물었다.
"하지만 회령진이나 무타우타 놈이 살던 곳에는 4윤작법을 쓴 흔적이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누구보다도 조선에 가까웠던 이들이 4윤작법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존재를 알았는데 농사 흔적이 없다는 건 더더욱 수상하지. 알고도 감췄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4윤작법을 쓰면 북방에서도 제법 괜찮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조선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 말이야. 대신 기술은 이만주에게 미리 넘겨 뒀겠지."
등자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에 끼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포섭에 애썼는지도 설명이 되는군요. 요동 쪽으로 데려가서 땅을 개간하고 4윤작법으로 농사를 지을 인력으로 삼을 생각이었겠지요. 농사가 잘 되면 많은 인구를 감당할 수 있고 군량도 비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철을 가공하는 기술도 있지요. 우디거들이 말 타는 재주가 부족하니 기병으로 키워 내긴 힘들겠지만, 신체능력과 담력이 뛰어나니 무장시켜서 보병이나 궁병으로 육성하기는 충분합니다."
동권두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게 정말이라면 큰일인 거 아닙니까?"
"큰일이지. 놈들이 지금은 여진족을 포섭할 수단은 배반자들뿐이지만, 농업과 철기가 갖추어지면 포섭할 수단이 더 늘어나 버려. 시간을 끌수록 우리가 손해일세. 놈들은 우리가 소금 항아리를 발견해서 분열책을 알아챘는지 모르고 있을 테니, 이 틈에 선수를 쳐야만 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조선 편인 부족은 적극적으로 회유해서 국경에서 먼 안쪽으로 이주시키게. 이만주 세력이 보복을 시작했다는 걸 알려주면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말을 따를 거야. 어차피 동북면을 개척할 인구가 부족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니, 안전한 곳까지 데려온 다음 땅을 주고 4윤작법을 가르쳐 농사짓게 하면 될 걸세."
"예. 조선인으로 동화시키는 건 정착도감하고 협력해서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편을 정하지 못한 부족이 조선을 따르게 하고, 배반한 부족이 요동으로 도망가 합류하는 것을 막는 건 한 가지 방법으로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 걸세."
"무슨 방법입니까?"
"배반자 부족이 적발되는 족족 몰살해 버리게."
동권두가 기쁨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 *
1431년 8월 중순 모일.
송화강 만곡부. 해서위.
해서부 지휘사이자 훌룬 부족의 부족장인 도르호치는 공터에 의자를 놓고 마주 앉은 이만주에게 말했다.
"또 저번처럼 땅이 무너져라 소리를 쳐서 가축들이 날뛰게 만들까 봐 일단 마을로 들이긴 했다만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저번 이후로 너희한테 뭐 피해가 가게 행동한 건 하나도 없을 텐데?"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뭐지? 해 봐라."
이만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도르호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여진족에 건주위, 건주좌위, 건주우위, 해서위의 네 지휘사가 있다. 그런데 요동 일대의 넓은 땅 대부분을 인구도 가장 적은 해서위가 차지하고 있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은가? 우리 땅의 북쪽에 면해 있는 너희의 남부 지역, 숭가리 강(송화강) 상류의 서쪽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어 균형을 잡히게 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땅을 내놓으라는 그 말에 도르호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손님으로 마을에 들였으니 차마 어떻게 해를 끼칠 수는 없지만 언성을 높여 이만주에게 말했다.
"같은 여진족이라고 해도 우리는 해서여진이고 너희는 건주여진이다. 명백한 구분이 있단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이 많으니 너희가 나눠 가져가겠다니, 그럼 너희가 많이 가졌을 때에는 우리에게 나눠 주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나눠 주겠다."
"나라가 무슨 가축도 아니…… 뭐?"
시원스러운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도르호치를 보고 웃으며 이만주가 말했다.
"우리가 많이 가진 것을 너희에게 주겠단 말이다. 가져오게."
이만주의 지시에 뒤에 있던 부하 몇이 큰 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오는 것을 본 도르호치가 영문 모를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