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74화 (17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74화

174화

1431년 6월 초순 모일.

경원부 비우진. 회경군 도원수 집무실.

이만주 세력과 내통한 부족을 찾았다는 소식에 양녕과 최윤덕을 포함한 계호대대는 뒤에 있던 일정을 취소하고 바로 주둔지로 돌아와 회의를 열었다.

"이만주 세력과 내통한 부족을 벌써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찾아내다니 대단하군. 생각보다 속도가 빠른데 다른 부족에게서 제보라도 받은 겐가?"

양녕의 질문에 최만리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소문이나 정탐을 통해 알아낸 것들을 종합해서 찾았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제보한 부족이 없다 뿐이지, 그 두 부족이 이만주 세력과 내통한다는 티를 많이 내 두만강 여진족들 사이에서도 알 만한 부족은 다 아는 모양입니다."

"위압감을 주는 거 말고 다른 할 일이 빨리 생겨서 다행입니다. 그럼 바로 가서 두 부족 다 모조리 도륙 내고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부족들에게 저희가 말로만 위협하고 다닌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도 해주고, 배반자는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도 보여 주고, 계호대대가 창설되지 얼마 않았는데도 제보도 없이 자력으로 두 놈이나 금방 찾아낼 능력이 있다는 것도 보여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원수들의 피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마저 느껴지는 동권두의 말에 양녕이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그렇게 하면 한 번 효과를 보고 말 뿐이야. 낚시를 생각해 보게. 잔 물고기를 낚았다면 그냥 먹어도 되겠지만, 그걸 미끼로 써서 더 많은 물고기를 낚아 먹는다면 더 배부르지 않겠나."

"그냥 몰살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쓰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두 부족 다 이만주 세력과 내통한다는 티가 많이 나서 알 부족은 다 안다 그랬지? 그럼 두 부족 가운데서 더 티가 많이 났던 부족만 징벌하게."

동권두는 징벌할 부족을 고르는 기준이 내통의 정도가 아니라 티 나는 정도인 게 약간 의아한 듯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럼 덜 티가 났던 부족은 어떻게 합니까?"

"징벌된 부족의 배반을 조선에 제보한 공로로 주는 것이라 하며 상을 주게. 물론 대놓고 주지는 말고 은근슬쩍 주되, 상 받은 걸 다른 부족들이 다 눈치채게 줘야 할 게야. 또 상을 안 받으려고 하더라도 억지로라도 무조건 줘야 하네."

옆에서 듣던 최윤덕이 알겠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일종의 내분 유도로군요. 배반할 마음을 먹은 이들은 자신들끼리 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밀고한 것 같은 상황을 만들면 이게 조선의 분열책인지, 아니면 밀고한 부족이 이만주 세력을 배반하고 다시 조선 편에 붙은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배반자를 잡기 위해 조선 편 부족이 정체를 숨기고 끼어들어 온 것인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렇소. 그렇다고 서로 만나서 털어놓고 확인해 볼 수도 없소. 자칫 분열책이 아니었을 경우 조선 편 부족에다가 자기들 입으로 배반자임을 자백하는 꼴이 될 테니까 말이오."

"이만주 세력과 조선 사이에서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던 부족들도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넘어가기도 힘들어지겠습니다. 이만주 세력으로 넘어갈 마음을 먹고 접촉한 배반자 부족이 사실 정체를 숨긴 조선 편 부족이었다면 그대로 적발당할 테니까요."

양녕의 계획을 이해한 동권두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배반자를 제보한 것으로 몰린 부족은 자신들이 한 게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건 어차피 정말로 조선 편 부족이 제보했더라도 똑같이 했을 소리이니 차이가 없겠습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배반자라는 소리를 할 수도 없으니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군요."

"그렇네. 그렇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둔 상태에서 조사를 계속하는 걸세. 그렇게 조선 편 부족과 배반한 부족, 아직 편을 정하지 못한 부족들을 분류한 다음, 기회를 보아 배반한 부족을 싹 쓸어버리고 나머지를 포섭해 나가면 돼."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 징벌할 부족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기대감으로 가득한 동권두의 질문에 양녕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몰살하게. 그것도 아주 잔혹하고 철저하게."

* * *

며칠 뒤.

거솔도 모처.

한때 마을이 있던 이곳에는 온전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너진 벽과 불타고 그을린 목재들, 짓밟힌 밭과 흙바닥에 남겨진 핏자국만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 줄 뿐이었다.

그 초토화된 마을에 한 사내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윽……."

무너진 흙벽 위에 핏자국과 살점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본 사내가 몸서리쳤다.

이 마을에 살던 부족의 배반을 제보한 것으로 몰린 바로 그 부족 출신인 사내에게, 저 피와 살점의 주인이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소식이 정말이었군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펄쩍 뛴 사내는 뒤를 돌아보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판차였던 것이다.

사내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희 부족이 일러바쳐서 이렇게 된 게 아닙니다. 전부 조선 놈들의 모함입니다."

"알고 있으니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말에서 조심스럽게 내린 판차는 사내 옆으로 다가와 마을을 둘러보며 말했다.

"철저하게도 박살내 놨군요. 그대도 나처럼 어떻게 된 건지 살펴보러 온 것 같은데, 혹시 좀 아는 게 있습니까?"

"예.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조선이 자신들이 배반자를 이렇게 징벌했다며 마을마다 사람을 보내서 알린 게 있습니다. 저도 그걸 듣고 직접 확인하려고 이렇게 온 거고요."

"말해 보십시오. 제가 모를 만한 최근 상황부터."

자신 쪽은 보지도 않고 눈앞의 처참한 광경을 태연히 둘러보며 명령하듯 질문하는 판차의 눈치를 보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두만강 쪽 조선군에 새롭게 만들어진 부대가 있습니다. 대장이 둘인데, 하나는 저 남쪽 일본 출신이고 다른 하나는 아구입니다."

뜻밖의 아는 이름에 판차가 사내를 돌아보았다.

"아구?"

"예. 일본 출신 대장은 칼 찬 놈들을, 아구는 오돌리 부족에서 달아났던 놈들이랑 인상 험악한 놈들을 거느리고 다닙니다. 처음 나타나고 한동안은 마을마다 다니면서 배반자는 모조리 죽일 것이고, 배반자를 제보하면 상을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다녔지요."

"그놈들이 마을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그렇다 합니다. 마을을 포위하고 일시에 들이닥쳐서 죄를 묻겠다며 부족원을 전부 끌고 가고 저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밭은 기병대로 짓밟고, 세간살이는 물론이고 묻어놓은 곡식도 전부 꺼내 갔습니다. 집은 흙벽째로 무너뜨리고 불을 질렀지요. 처음에는 과장이 섞였겠거니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정말인 것 같습니다. 아마 소금을 뿌렸다는 것도 진짜일 겁니다."

"소금이라니요?"

"마을을 전부 박살 낸 다음 사방에 소금을 뿌리고 돌아갔다 합니다. 그 귀한 소금을 땅에 뿌리다니, 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던 판차가 말했다.

"조선인들은 소금에 부정한 것을 쫓는 힘이 있다 생각한다는 걸 들은 적 있습니다. 이 마을 전체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소금을 뿌렸겠지요. 아니면 진짜 목적이 있어서 뿌렸을 수도 있습니다. 소금을 뿌리면 짐승들이 핥아먹으러 올 것 아닙니까. 그렇게 짐승들이 많이 오가면 여기가 더 빨리 폐허가 되겠지요."

"둘 다 무서운 얘기군요."

"물론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됐고, 이 일 이후로 우리 쪽 부족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조선 편인 부족들도 조선을 두려워할 정도니 우리 쪽 부족들도 두려워하는 건 물론이고, 의심도 커져 가고 있습니다."

"의심이라……. 우리 쪽 부족들 사이에서 배반자가 나왔거나 애초에 조선 편인데 위장한 부족이 있다는 의심입니까?"

"저희 부족이 당하고 있는 그런 의심도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괜찮으니 말해 보세요."

말을 흐리며 머뭇거리던 사내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쪽 부족들 사이에서 지휘사님들을 의심하는 소문이 슬슬 돌고 있습니다. 요동으로 따라간 부족들하고 다르게 남은 부족들은 딱히 가진 재주도 없고, 어차피 지휘사님들이 요동으로 옮겨가신 다음 건주좌위도 이어받고 건주우위도 새로 받고 했으니 이제 쓸모가 없어져서 버려졌다는 소문이지요."

판차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버릴 부족이었다면 지금까지 열심히 챙겨 주지도 않았을 거고, 조선군에게 마을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건주좌위 지휘사인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우리는 지금 인력이 부족해 사람 하나가 아쉬운 상황입니다. 이미 우리 편인 부족을 왜 버리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니 그런 소문이 도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판차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건 그렇지요. 별수 없군요. 조금 이르지만 계획을 앞당겨야겠습니다."

"계획이라니요?"

"남은 부족들을 한두 부족이라도 요동으로 옮겨주기 시작하면 우리가 버렸다는 소문은 들어갈 거 아닙니까. 원래는 상황이 좀 괜찮아진 다음 천천히 옮겨오게 하려고 했는데, 조선이 아구까지 끌어들여서 선수를 쳤으니 우리도 빨리 대응을 해야 합니다."

"옮겨가게 해 주시면 그런 의심은 확실히 줄어들겠지요. 그런데 그러면 또 걱정되는 게 하나 있긴 합니다."

"이번엔 또 뭡니까?"

"탈출하는 부족이 생기면 조선이 더 눈에 불을 켜고 저희를 찾아내려 들 겁니다. 거기다가 지휘사님들을 따르기로 한 부족들은 원래부터 서로 친분이 있었기에 하나둘 조심스럽게 끌어들여 가며 같은 편에 서게 된 것 아닙니까. 어느 부족이 어느 부족과 친한지는 조선도 얼추 파악하고 있을 텐데, 한두 부족이 요동으로 탈출하기 시작하면 그들과 친하게 지내던 다른 부족들에게 의심이 더 집중될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군 역시 그 부족들을 더 철저히 조사할 테니 정체가 금방 탄로 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일리 있는 얘기군요."

판차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거주지나 인구, 성향 등을 파악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 편인 부족들과 우리 편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있는 부족들이지요?"

"예."

"그럼 조선 편 부족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내서 알려 주세요. 대신 거주지하고 인구, 어느 부족이 조선과 가장 친한지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지금 그대의 부족은 물론이고 다른 우리 편 부족들도 조선의 감시를 받고 있을 테니, 무리하지 말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만 알아내 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조선하고 친한 부족을 알아내는 것하고 저희가 요동으로 옮겨가는 거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있고 말고요. 누가 잡으러 올 때의 대책은 빨리 달아나는 것도 있지만 상대를 헷갈리게 만들어 따돌리거나 맞받아치는 것도 괜찮은 대책 아니겠습니까?"

판차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기왕이면 아구와 친분이 있는 부족이 어디인지도 알아와 주셨으면 좋겠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