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73화
173화
1431년 5월 중순 모일.
한성부. 정착도감.
양녕의 예상대로 등자사와 동권두는 서로의 얼굴은 몰라도 이름과 출신은 알고 있었다.
쇼니 미츠사다의 아들이 한성부에 올라와 과거에 급제한 것이나, 이성계의 부하로 이름을 날렸던 먼터무가 작년에 주변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은 것 모두 한성부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소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 그럼 소개도 했고, 자네 둘이 안면도 텄으니 본론으로 넘어가겠네. 지금 동북면 여진족들의 상태가 소란스럽다는 것은 둘 다 잘 알고 있을 걸세. 그래서 회경군에 그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부대를 새로 만들고자 하네."
"저희가 그 부대에 들어가게 되는군요."
등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양녕이 말했다.
"맞네. 중대 두 개로 구성된 대대를 하나 만들 걸세. 자네 둘이 그 중대를 하나씩 맡게 될 것이야. 각각 자네들 출신지를 따서 회령중대와 석주중대라 할 걸세."
뜻밖의 말에 동권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는 아직 작은 부대도 지휘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바로 중대를 맡아 지휘하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둘 다 지휘 경험이 없는 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너무 걱정 말게. 둘 다 지금 종6품이니 군급으로는 부위에 해당하지 않는가. 중대를 맡는 군급이 정위이니 딱 한 군급 높아지는 것뿐일세. 크게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야."
여전히 약간 불안한 표정의 동권두를 향해 양녕이 말을 이었다.
"또 자네들이 속하게 될 대대는 사단 밑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회경군 도원수가 직접 관할하는 직속부대가 될 걸세. 그래서 중대 이름에 십간이 아니라 별도의 이름이 붙은 것이고 말이야. 전투가 주목적이 아닌 부대이니, 중대장에 전투에만 익숙한 다른 군관들을 앉히나 경험 없는 자네들을 앉히나 큰 차이 없을 것이야. 그리고 내가 직접 자네들을 추천해서 만든 부대니 다른 이들이 얕잡아 볼 수도 없을 것이고, 나와 도원수가 지시하고 보조해줄 것이니 자네들이 열심히만 하면 문제 생길 일은 하나도 없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군, 전투가 주목적이 아니라면 저희가 이끄는 부대원들도 평범한 이들은 아닐 것 같습니다."
등자사의 말에 양녕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맞네. 우선 자네의 석주중대는 칠주도 출신들로 구성될 걸세. 정확하게는 칠주도 정벌 마지막인 오키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본관과 성씨를 받아 조선으로 이주했던 옛 시마즈 가문 방계 출신 무사들이지. 애초에 동북면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곳으로 옮겨가 땅을 받고 살기로 이미 얘기가 되어 있던 이들이니 의욕 하나는 확실할 게야."
"괜찮겠습니까? 저는 작년에 갓 무관이 되었고, 딱히 경력이 있거나 큰 공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이미 여러 전투를 거친 그들을 잘 통솔할 수 있을지, 아니 무시나 받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말하는 내용과 달리 표정이나 어조에서는 딱히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등자사에게 양녕이 말했다.
"괜찮네. 자네는 유서 깊은 무사 가문이자, 정동군의 칠주도 정벌에 최초로 협력해 많은 기여를 한 쇼니 가문 출신 아닌가. 거기다가 정동군 도원수였던 내 추천까지 더해질 것이니 자네가 가진 권위는 그들이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가문들 출신으로 여러 전투를 거쳤던 이들은 재능을 인정받아 군교나 군관이 된 지 오래일세. 이미 회경군에 소속되어 살수를 맡고 있지. 자네 중대에 배속될 이들은 그 가문들 출신인 것은 같지만 이번에 새로 무과에 급제하거나 천거 받은 자들이야. 그들 중에 자네처럼 무과 갑과에 급제한 사람은 하나도 없네. 그것 하나만으로도 자네 실력이 중대 전체에서 제일임을 드러내는 것이니 통솔도 걱정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대군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불안감은 고사하고 침착함이나 달관함마저 느껴지는 등자사가 신기한 듯 곁눈질로 보던 동권두가 양녕에게 물었다.
"그럼 제 회령중대에는 어떤 이들이 배속됩니까?"
"작년의 그 사건 때 가까스로 탈출하거나 운 좋게 화를 피해 조선으로 온 오돌리 부족원들이 있네. 조금씩 다쳤던 이들도 치료가 다 끝났지. 거기에 다른 이들을 더해서 인원을 채워 주겠네."
부친인 먼터무가 죽고 오돌리 부족 대다수가 끌려간 사건이 언급되자 동권두는 약간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군요. 그럼 추가로 채워지는 이들은 여기서 모집해서 가는 겁니까?"
"아니야. 회령중대에 배속될 조건이 따로 있네. 추가 인원은 동북면에 간 다음 회경군 다른 부대에서 조금씩 차출해서 모으게 될 것이야. 그 자세한 내용이나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은 한성부에서 미리 말해도 딱히 득 될 것은 없어 보이니, 동북면에 간 다음 알려 주겠네."
이전에 자신이 한성부에서 일할 수 있게끔 양녕이 이도와 중신들에게 잘 말해 줬던 것을 알고 있기에 동권두 역시 양녕을 신뢰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네들 혹시 이름 말고 쓸 자가 있는가? 동북면에 가서 계속 같이 일을 할 건데 계속 자네라고만 부를 수도 없고, 둘이 직위가 같으니 그거로는 구분이 안 되고, 어린애도 아니고 이미 벼슬까지 한 사람을 이름으로 부를 수도 없지 않은가. 둘이서 서로 부를 호칭도 있어야 하고 말이야."
그 말에 등자사와 동권두가 서로를 슬쩍 보더니 양녕을 보고 거의 동시에 말했다.
"아직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 보통 부모나 스승, 주군에게 받는 것이니 내가 지어주기도 그렇고, 말이 나온 김에 자네들이 직접 만드는 건 어떻겠나? 스스로에게 의미 깊은 것을 담아 지으면 될 것 같은데. 한번 생각들 해보게."
두 사람은 양녕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등자사였다.
"저는 소법이라 하겠습니다."
"소법?"
"예. 제 아명이 소법사환(코보시마루)이었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아명이니 이것을 자로 삼으면 아버지께 자를 받은 셈이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진짜 스케츠구의 아명을 자로 삼으며 미츠사다를 거론하는 등자사의 모습에 양녕이 속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좋군. 그리 하게."
이어서 동권두도 입을 열었다.
"저는 장철이라 하겠습니다."
"장철? 아, 그런가. 자네도 부친께 자를 받은 셈이 되겠군."
"예. 엄밀히 따지면 예법은 아니겠으나, 이렇게라도 기억하고자 합니다."
장철은 곧 영원한 철이라는 말이었다. 영원한 철이라는 몽골어인 몽케 테무르는 몽골에서는 인명으로 쓰였고, 여기서 파생된 여진족 이름이 바로 먼터무였다.
"부친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지극한 효심으로 하는 것이니, 그 효심 자체가 예법이 아니겠는가. 잘 정했네."
이야기를 정리하듯 고개를 끄덕거린 양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소법, 장철. 자네 둘은 닮은 점이 많아. 한때 조선 땅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조선 땅이 된 곳 출신이고, 조선에 충성했으나 안타깝게도 천수를 누리지 못한 부친이 있네. 그리고 조선의 신하가 되어 같은 부대에 속하게 되었지. 부디 자네 둘이 서로 돕고 또 나를 도와 나라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네."
"예, 대군."
거의 동시에 대답한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양녕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자네 둘은 닮은 듯 정반대인 사람이야. 둘 다 아비를 그리워하는 자를 지은 듯 보이지만 한 사람은 그 아비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지우려는 목적으로 자를 지었고, 한 사람은 아비의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잊지 않을 목적으로 자를 지었지. 복수귀라는 큰 공통점을 지닌 자네 둘 다 목적을 달성하기를 바라네.'
* * *
1431년 6월 초순 모일.
거솔도. 모 우디거 부족 거주지.
동권두는 마을 가운데에 부족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인상을 바짝 쓰고 말하고 있었다.
"내 아버지의 원수들이 이미 명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내가 직접 찾아가서 목을 칠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만주 세력과 내통하거나 조선을 버리고 그놈 편에 가서 붙으려는 자들 역시 내 원수를 돕는 자들이니 곧 원수다! 잡히는 대로 모조리 죽일 것이다!"
동권두의 뒤에는 회령중대원 백여 명이 부족원들을 감시하듯 버티고 서있었다. 중대원 절반가량은 가족과 생활기반을 잃은 복수심에 불타는 오돌리 부족 망명자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회경군 다른 부대에서 회령중대의 배속 조건, 즉 험악한 인상을 만족해서 차출된 이들이었다. 가뜩이나 살벌한 이 분위기를 한층 더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는 수상한 점이 없던 마을이니까, 이 전 마을에서 한 것처럼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뒤져보면 안 된다. 알겠지!"
조선 내에서도 계림도라고 불리기 시작한 조선제 왜도를 옆에 하나씩 차고 마을 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던 석주중대원들이 중대장인 등자사의 말에 일제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그 외침에 부족원들 눈빛이 떨리는 것을 보며 동권두가 계속 말했다.
"그러니 내통하거나 배신하려다 잡힌 놈들은 조선의 법도대로 엄벌에 처해질 것이고, 반대로 그런 놈들을 제보한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다!"
두만강 인근에 남은 여진족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의심스러운 부족들에게는 지금처럼 무력시위로 위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동권두와 등자사가 속해있는, 오랑캐들을 경계하고 타이른다 하여 계호대대라 이름 붙은 회경군 직속부대의 업무였다. 대대장은 따로 임명하지 않고 최윤덕이 겸임했는데, 부대를 실질적으로 양녕이 지시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하려는 일종의 편법이었다.
"잘들 하고 있군."
계호대대가 열심히 위압감을 조성하는 모습을 보던 양녕이 그렇게 말했다. 일에 여유가 생기면 양녕은 이렇게 계호대대가 무력시위를 하는 현장에 나와서 뒤에 서 있곤 했다.
계호대대가 일을 잘하나 감독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중대가 험악한 인상과 시퍼런 계림도로 위압감을 주는 뒤에 버티고 서서 이성계를 닮은 분위기로 한층 더 압박을 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런 양녕에게 오랜만에 따라 나온 최윤덕이 작게 감탄하듯 말했다.
"이런 식으로 동권두를 쓰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조선이 직접 저러고 다닌다면 여진족들이 반감을 가질 수 있소. 하지만 동권두가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며 저러고 다닌다면, 여진족들은 조금 껄끄러워하긴 하겠지만 정당한 이유로 마땅한 행동을 하고 있다 생각할 것이오."
"배신할 마음을 먹은 부족은 어차피 요동으로 달아날 생각이니, 동권두가 이만주 세력을 원수로 여기건 조선에서 중요한 일을 하건 상관없어하지 않겠냐고 제가 질문했을 때, 대군께서는 상관있게 만들면 된다고 하셨지요."
"맞소. 그리 대답했었지."
"이제 그 뜻을 알겠습니다. 계호대대가 사방을 들쑤시며 악착같이 감시하고 있고, 배반자를 찾아내면 달아나기 전에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다니고 있지요. 동권두가 이만주 세력을 원수로 여기는 것, 조선의 군인으로서 병력을 이끌고 다닌다는 것 둘 모두가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게 되었으니, 배신하려는 마음을 먹은 부족이 그것을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로 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대답하려는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양녕이 돌아보자 군교 한 사람이 타고 온 말에서 내려 양녕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긴히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만주 세력과 내통한 부족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