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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71화 (17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71화

171화

"벌써 3월인데 농사철이 되기 전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 설마 옮겨가실 겁니까?"

판차의 말에 이만주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정답일세! 아주 잘 아는군. 여기 파저강 일대에서 동북쪽으로 가면 괜찮은 땅이 있네. 거기로 우리 건주위의 거점을 옮길 생각이야."

"여기서 동북쪽이면 숙수후 강(소자하) 근처로군요."

"맞아. 숙수후 강에 배를 띄우고 내려가면 후너허 강(혼하)에 합류하고, 후너허 강을 따라가면 금방 무순성이 나오지. 후너허 강이 너무 빨리 흘러 배를 타고 오가기 어려울 것 같은 날에는 말을 타고 육로로 무순성을 오가기에도 멀지 않은 위치에 있어."

요동도사의 실질적 관할범위는 요동평야 일대에만 겨우 미치는 정도였다. 대신 요동의 농지를 확보하고, 방어를 유리하게 하고, 여진족이 기병의 기동력을 살릴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요동평야와 주변을 둘러싼 산지가 만나는 지점을 따라 방어선인 요동변장을 건설했다. 방어선이라고 해도 장성처럼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요새가 이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여진족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명나라가 거점을 옮긴 이유를 묻는다면 좀 더 요동에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자 했다고 하면 되겠군요. 의심은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통제 범위 가까운 곳으로 알아서 들어온다 생각해 좋아할 겁니다. 실제로도 우리가 무순성에 가서 교역하기도 좋아지는 위치이기도 하니 더더욱 의심하지 않겠지요."

북원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요동평야 서북쪽에서부터 구축된 탓에 아직 동쪽 요동변장은 미완성된 상태였지만, 후너허 강이 산간지대에서 요동평야로 나오는 중요한 요충지에는 방어를 위해 명나라 초기에 이미 무순성이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동쪽에는 아예 산간지대 입구를 막듯이 무순관이라는 관문도 설치되어 있었다. 요동평야로 나오지 못하게 틀어막은 대신 무순성에는 교역소를 두었는데, 조선과 척을 지고 달아난 지금 상황에서 건주위가 식량과 철기를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요동에 가까운 쪽으로 거점을 옮긴다면 명나라가 나에게 사람을 보내도 그 거점에서만 만나고 돌아가지 더 깊이 들어가 파저강까지 가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거점 근처에는 새 농법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지어 우리의 농업 능력을 속이고, 그 후방에서 마음 놓고 새 농법을 쓰면 그만이지."

"근데 그러면 조선에서는 먼 쪽으로 거점을 옮기는 거잖아요. 조선이 사람을 보내면 새 거점까지 오면서 파저강 일대 농지를 싹 다 지나서 오게 되지 않을까요?"

무타우타의 질문에 판차가 대답했다.

"무타우타. 어차피 조선은 명나라의 견제 때문에 압록강을 마음대로 넘어 우리 거주지까지 오기 어렵습니다. 설령 우리 거주지까지 온다고 하더라도 요동도사를 먼저 만나서 알리고 와야 할 텐데, 그럼 무순관을 지나서 와야 하니 결국 똑같습니다."

"그럼 뭐 괜찮겠네. 아, 옮기는 건 얼마나 걸릴 거 같습니까?"

이만주는 그것도 다 대비했다는 듯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터 잡고 집만 지으면 옮기는 건 금방일 걸세. 어차피 자네들은 두만강을 떠나면서 이미 짐을 많이 줄여놓은 상태 아닌가. 농사도 어차피 파저강 일대가 중심이니, 농기구들도 계속 여기 두고 쓸 것이라 옮길 필요가 없네. 절대 들키면 안 되는 제철 도구들은 말할 것도 없지."

"하하! 그 무거운 제철 도구들 안 들고 가도 된다는 소식이 제일 좋네요. 강 이름이 숙수후(물수리)인 것도 용맹한 느낌이 나서 좋고 말입니다. 언제든 지휘사님이 말씀만 하시면 바로 옮겨가겠습니다!"

신나 하는 무타우타 옆에서 판차가 무언가 떠오른 듯 이만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위치가 정확히 어디입니까? 숙수후 강 중류쯤에 평지가 넓은 곳이 있으니 아마 거기로 가겠지만, 그 평지 전부가 마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니 집을 모아 짓고 목책을 두를 지점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평지에서도 숙수후 강하고 그 지류로 둘러싸인 곳이 있네. 그 안에서도 또 산을 등지고 강을 면한 위치에 위쪽이 평평한 언덕이 하나 있네. 거기로 옮겨갈 거야."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에는 산이 있어 방어에 유리한 데다가, 위쪽이 평평해서 마을 터를 닦으려고 땅을 깎아낼 필요도 없는 언덕이라니, 거점으로 삼기에는 최고인 곳입니다. 그런 곳이 마침 가까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언덕 이름도 정직하게 붙어 있어서 찾기도 쉬웠네."

"이름도 이미 있었군요. 그런데 정직한 이름이라니 대체 어떤 이름입니까?"

이만주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형 그대로가 이름이야. 허투 알라(넓은 언덕)라고 하네."

* * *

1431년 5월 초순 모일.

경원부 비우진. 회경군 도원수 집무실.

양녕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최윤덕에게 말했다.

"그럴 일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큰일이 생기면 바로 와서 돕겠다고 한 게 마침 1년 전인데, 정말로 큰일이 생겨서 오고 말았구려."

"그래도 전화위복인지 나름대로 좋은 일도 있습니다. 오돌리 부족과 무타우타의 부족이 사라지면서, 두만강 이남을 완전하게 조선인의 땅으로 만들고 방어하기가 더 쉬워졌지요."

"그건 그렇겠소. 회령진에 읍성을 새로 쌓아 교역소도 옮겼고, 옛 경원부 터에 요새를 쌓아 두만강 하류를 완전히 확보했다 들었소. 그 두 부족을 조선인으로 동화시켜가면서 진행했더라면 한참 걸렸을 일들이지."

그때 옆에서 최만리가 양녕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명나라는 왜 판차하고 무타우타를 다시 받아 준 걸까요? 조선과 교역하면서 세력들이 제법 커졌는데, 그걸 그대로 받아 주고 무타우타에게는 건주우위까지 주는 바람에 이만주가 너무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명나라는 놈들의 세력이 강해졌는지를 모르고 있을 걸세. 알렸다가는 견제 받을 게 뻔하니 놈들도 알리지 않았을 것이고 말이야. 아마 명나라는 먼터무와 무타우타가 북원의 보복을 피해 부족을 이끌고 두만강으로 왔던 때, 그러니까 조선에 견제 받으면서 식량만 조금씩 공급받던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이전에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던 세력규모 그대로라고 생각하니 별걱정 없이 받아줬겠지."

"그렇군요. 그런데 그럼 차라리 명나라에게 놈들 세력이 강해졌다는 걸 알리고 같이 견제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놈들이 우리와 활발하게 교역하면서 세력이 강해졌다는 내용은 절대 명나라에 알릴 수 없네. 조선이 여진족에게서 말을 싸게 사서 명나라에 비싸게 넘겨 제법 이익을 봤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렵겠지요."

"황제가 받고 기뻐하며 회사품을 두둑이 내렸던 그 해동청들이 조선이 열심히 잡은 게 아니라 여진족들에게서 사온 것이라는 얘기는?"

"그것도 어렵겠습니다."

"명나라가 몽골을 견제하려고 군마를 요청했는데, 바로 그 몽골과 교역해 호마를 들여와서 좋은 건 우리가 키우고 쭉정이만 보냈다는 얘기는?"

"그건 말 못 하지요."

"그럼 국경은 선춘령으로 정해졌지만 은근슬쩍 선춘령 북쪽 우디거들까지 다 흡수할 생각으로 무타우타에게 교역 독점권을 줘서 키워 줬다는 얘기는?"

그 말에 최만리가 몸서리치며 말했다.

"그건 절대로 못 말합니다. 이럴 수가……. 놈들 세력이 강해졌다는 얘기를 명나라에 하는 순간 오히려 조선이 견제 받을 수밖에 없군요."

"그렇다네. 아마 이만주도 이걸 노렸을 거야. 놈들이 모르는 내용이 훨씬 많겠지만, 놈들이 알 만한 범위에서도 조선이 명나라를 가지고 논 게 한두 건이 아니지 않은가."

양녕과 최만리의 대화를 듣던 최윤덕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바마마께서 옥좌에 오르신 이후로 많이 우호적으로 되긴 했지만, 태조대왕 때만 하더라도 조선과 명나라 사이는 험악했소. 여전히 명나라에게 조선은 언제라도 요동을 노리고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견제 대상일 것이오. 이만주에게 건주여진 세력을 몰아 준 것도 그 때문이겠지. 괜히 사실대로 알렸다가는 분노한 명나라는 물론이고, 세력이 탄로 난 이만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오. 그러느니 차라리 우리가 확보한 영토만이라도 확실히 굳혀 놓는 게 좋을 것이오."

"영토를 확고히 한다라……. 하지만 백성을 이주시켜 오는 것은 어렵습니다. 평시에도 추위가 심하고 농사가 어려운 탓에 이주해 오려는 백성이 적었는데, 이 소란이 났으니 더 안 올 것입니다. 애초에 백성들이 이주해 오더라도 자칫 건주위 세력에게 잡혀가기라도 하면 인구만 보태 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차라리 두만강 인근에 남은 여진족들을 포섭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들은 잡혀가더라도 별 지장 없고 오히려 땅이 비어서 조선이 진출하기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최윤덕의 말에 최만리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도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선 우디거들은 무타우타가 도맡아 관리하다시피 했던지라, 누가 무타우타 편이고 누가 조선 편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미 철 다루는 여러 기술이 넘어간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인데 우디거들을 포섭하려 하다가 기술이 더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디거가 아니면서 두만강 인근에 사는 부족들은 어떤가?"

"그 부족들은 또 판차를 통해 건주좌위와 연결되어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명확하게 조선에 충성하는 중인 부족들도 많이 있고, 건주좌위와 연이 있더라도 조선 편으로 넘어올 이유를 만들어주면 끌어들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편을 바꿀 이유라는 건 대부분의 경우에 교역이나 기술 제공이지요."

최윤덕은 약간 낙담한 표정이 되었다.

"조선이 여진족보다는 부유하지만 명나라만큼은 아니니, 이만주가 조선에 속한 여진족들을 요동으로 데려오겠다며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 포섭하려 들 수 있겠군요. 조선에서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미끼로 던지면 조선을 배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술까지 들고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양녕도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렇소. 조선에서 받아먹고 명나라로 가서 또 받아먹고, 기술도 팔아먹고 조선에서 정탐한 것도 팔아먹을 생각으로 처음부터 조선에 포섭되는 척하려는 여진족들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미리 적극적으로 여진족들을 조선인으로 동화시켜 뒀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미 늦은 이야기겠지요."

최만리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집무실에는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음?"

정적을 깬 것은 양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또 무언가 있습니까?"

최만리와 최윤덕의 시선을 받으며 양녕이 말했다.

"해결책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괜찮은 대처 수단 하나가 생각났소."

"무엇입니까?"

"이미 동화도 되어 있고, 조선을 배반하고 이만주에게 넘어갈 일도 절대로 없고, 오히려 배반하고 넘어가려는 놈들을 철저히 막으려 들 것이고, 동기부여도 확실하고, 여진족들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이 이미 조선에 있으니, 그자를 쓰면 되지 않겠소?"

양녕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최만리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설마, 먼터무의 아들인 동권두를 쓰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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