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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70화 (17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70화

170화

양녕의 말에 놀란 허조가 말했다.

"여진족들에게는 철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없어진 것 아니었습니까?"

금나라 시절만 해도 여진족은 뛰어난 제철 기술과 대규모 수군으로 송나라를 압박할 정도의 선박 제작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에게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몽골이 일본을 공격하겠다며 선박 기술자들을 모조리 끌어다 고려에 보내 버린 탓에 큰 배를 만드는 기술이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 영토가 초토화되다시피 하면서 제철 기술도 거의 다 실전되고 만 것이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선과 명나라와 가까이 지내는 부족들은 그나마 조금씩 철을 입수해 썼지만, 멀리 떨어진 부족들은 뼈를 가공해 화살촉이나 갑옷을 만들 정도로 쇠퇴해 버렸다.

"아무리 몽골에 쓸려 나갔더라도 기술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을 수 있소. 직접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더라도 무쇠를 연철로 바꾸는 정도라면 가능할지 모르오."

이번에는 공조판서 이천이 놀라서 물었다.

"무쇠로 연철을 만드는 건 조선에서도 반사로를 써서나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걸 저 오랑캐들이 한단 말입니까?"

"꼭 반사로를 써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무쇠를 도가니에 넣고 녹인 다음 쇳녹가루를 뿌리면서 저으면 연철을 만들 수 있소. 반사로에 비하면 처참할 정도로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연철이 없고 무쇠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연철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어차피 북방은 사방이 숲이라 연료는 많으니 말이오."

"이런, 무쇠 제품은 무기나 갑옷으로 재가공이 어려운 탓에 여진족과 교역하는 데에 제한이 적어서 제법 많이 팔려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걸로 연철을 만들 수 있다면 큰일입니다."

이천만이 아니라 다른 중신들도 심각한 표정이 된 것을 보고 양녕이 말했다.

"연철을 만드는 데에 그리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예시를 든 것이지, 정말로 여진족이 이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오. 하지만 무타우타가 제철 기술 없이 만용을 부렸다 생각하고 방심하는 것보다는, 제철 기술이 있다 생각하고 대비하는 게 더 낫지 않겠소."

여기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양녕의 주장에는 근거도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도 재위기 후반에 여진족들에게 무쇠로 연철을 만드는 기술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천이 그 기술을 배워 오면 좋지 않겠냐는 건의를 올렸던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여진족에게 제철 기술이 아예 없던 게 아니라 쇠퇴한 것이고, 연철이 부족하니 기술의 필요성도 크고, 조선에까지 소문이 퍼졌을 정도라면 정말로 기술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

양녕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던 황희가 말했다.

"만일 여진족들에게 제철 기술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지금까지는 철제품이 귀하고 생활이 곤궁하니, 무쇠 제품을 아껴 썼을 것이오. 그러다 깨지면 고철로 팔고 생긴 돈을 보태 새것을 사야 했을 것이고. 하지만 조선과 교역하면서 돈에 여유가 생겼으니, 그냥 있는 돈으로 새로 사서 쓰고, 깨진 것으로는 제철 기술을 연습해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오."

"그렇게 연습하면서 다시 기술을 확립했을 수 있겠군요. 아니면 이미 기술이 있었지만 조선에 견제 받지 않으려 숨겼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렇소.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만약 무타우타의 부족에 제철 기술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각종 철제 도구 만드는 기술도 금방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이오."

더 심각한 내용에 허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올해 5월에 해서위 설치 건으로 동북면에 갔다가 듣기를, 무타우타가 최근에는 도끼보다도 자귀나 톱, 대패 같은 것을 사가는 경우가 늘었다 했소."

"설마……."

"그렇소. 물론 자신들이 쓰거나 다른 우디거들에게 팔기 위해 사 갔을 수도 있지만, 무쇠로 연철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연철로 각종 도구들을 만들기 위한 견본으로 쓰기 위해 사 갔을 수도 있소."

그 말에 사방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황희가 이도에게 말했다.

"전하. 실로 큰일입니다. 정말로 대군의 예측이 맞을 경우, 무타우타의 부족이 농기구와 도끼는 물론이고 각종 도구들까지 만들 수 있게 된 것 아닙니까. 거기에 이만주를 따라 이주해 간 요동에서 훌리가이 부족이나 다른 부족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과 합쳐진다면 아예 철광석에서 연철을 거쳐 강철까지 만들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도 역시 탄식 섞인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술이 없더라도 문제요. 여진족 만 명이 모이면 천하가 위태롭다는 소리를 하던 것은 명나라가 아니오. 그런 소리를 하던 놈들이 이만주가 오돌리 부족하고 무타우타의 부족을 홀랑 집어먹는 걸 냉큼 용인해 주다니……. 심지어 무타우타를 통해서 다른 우디거들에게도 간접적으로 이만주의 영향력이 미치게 되어 버렸소. 조선이 백두산 동쪽으로 땅을 넓힌 게 배 아팠는지 여진족 영향력을 뺏어가겠답시고 그런 멍청한 판단을 하는 걸 보니, 되놈들이 왜 걸핏하면 유목민들에게 얻어맞고 나라가 박살 났었는지 알 것 같소."

신하들 누구도 말리러 나서지 않는 가운데 분노한 이도의 폭언이 이어졌다.

"하긴 공맹의 가르침으로 나라를 잘 이끌었던 송나라도 황하를 잃고 남쪽으로 쫓겨 갔을 정도인데, 황제가 죽었다고 순장이나 해대는 놈들이 무슨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겠소. 아니면 순장을 했는데도 공자 말씀대로 대가 안 끊어지니까 직접 자기들 손으로 대를 끊어 말씀을 실현시키려고 애를 쓰는지도 모르겠소. 참 대단한 유학자 납셨지."

오히려 중신들도 이도의 폭언을 거들고 나섰다.

"원 혜종이 중원에서 쫓겨난 지 백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북방 오랑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멍청한 짓을 하다니 제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원사도 날림으로 편찬한 자들입니다. 조선은 아직도 고려사의 편찬이 끝나지 않았는데 명나라에서는 원사를 2년 만에 편찬해서 내놓지 않았습니까. 정사 편찬도 그따위로 하는 자들이 역사에서 뭘 배우겠습니까."

양녕도 진지한 얼굴로 이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명나라가 의도하는 것은 오이라트와 북원이 서로 싸우고,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이 서로 싸우고, 몽골과 여진이 서로 견제하는 이이제이의 상황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이제이에는 큰 단점이 있지요."

"그렇소. 서로 싸우게 만들었던 이들이 어느 한쪽이 강해져서 반대편을 멸망시키고 흡수하면, 긴 싸움으로 강해진 데다가 통합까지 이룬 세력이 탄생해 버리오. 약한 쪽을 지원해서 분쟁을 이어 가면 그 상황을 미룰 수 있지만, 자칫하면 강한 쪽이 통합을 마쳤을 때 그 분노를 고스란히 돌려받게 되오. 게다가 약한 쪽도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운 상태니 결과적으로 통합 이후의 체급을 늘려주는 셈이 되오. 마치 송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이것이 바로 지금 명나라의 외교를 두고 이도와 중신들이 폭언을 쏟아내는 이유였다. 송나라는 이이제이를 맹신하고 거란족을 견제하기 위해 여진족을 써먹었다가 금나라에게 화북을 잃었고, 또 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끌어들였다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송나라의 멸망에서 그치지 않고 고려를 비롯한 온 천하가 칸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데에 이르고 만 것이다.

"명나라가 제대로 이이제이를 써서 저들을 약하게 분열시켜 둔다면 좋겠지만, 지금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조선과 여진 사이에도 이이제이를 쓰려는 것 같습니다. 외교를 이런 꼴로 하다가 또 천하에 큰 화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양녕의 말에 끄덕이는 중신들을 향해, 작게 한숨을 쉰 이도가 말했다.

"그러니 대비해야 하오. 덜떨어진 아군인 명나라와 영악한 오랑캐인 여진족 양쪽 모두에 말이오."

* * *

1431년 3월 중순 모일.

파저강 인근. 이만주의 집.

이만주의 부름을 받고 찾아온 판차와 무타우타가 의자에 앉자, 기다리고 있던 이만주가 말했다.

"오늘 자네들을 부른 것은 보고를 받고자 해서일세. 뭐 보고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자네들이 맡아서 하는 일들의 근황을 좀 알고 싶어서 말이야. 무타우타, 연철 생산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철광석이나 사철로 무쇠를 만드는 건 아직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대신 무쇠로 연철을 만드는 건 거의 실패하지 않게 됐죠."

"역시 그런가. 온전히 우리 힘만으로 철을 생산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겠군. 그래도 다행이야. 무타우타 자네에게 기술이 없었다면 아예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걸세. 조금만 더 힘내 주게."

"예, 지휘사님!"

격려를 받고 좋아하는 무타우타를 보며 피식 웃은 이만주가 이번에는 판차에게 물었다.

"조선 쪽 교역 상황은 어떠한가?"

"듣자 하니 남쪽에 있던 교역소를 비어 버린 오무호로 옮겼다 합니다. 조선의 땅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기존에 오무호로 교역하러 오던 여진족들을 붙잡아 두려는 것이겠지요. 물건 값도 여기보다 더 쳐준다는 것을 보면 확실합니다. 대신 철제 도구 파는 수량을 줄인 탓에 농기구 구하는 이들은 다 저희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무타우타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철제 도구 파는 수량을 줄였다는 걸 보면 우리가 무쇠로 연철 만드는 걸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는데요?"

"저도 무타우타와 같은 생각입니다. 만일 조선이 그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면 명나라도 우리를 견제하려고 철제 도구 교역량을 줄여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직 기술이 부족해 무쇠를 가져와 가공해야 필요한 만큼 연철을 만들 수 있으니 그리되면 큰일입니다. 어쩌면 아예 철 생산 능력을 없애려고 명나라가 우리에게 선공을 가할 지도 모릅니다."

판차의 걱정에 이만주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조선이 명나라에 말한다 해도 괜찮네."

"어째서입니까?"

"지금 조선은 자네들 두 부족을 명나라가 데려간 것에 반발하고 있을 걸세. 그런데 조선이 명나라에게 우리에게 제철 기술이 있으니 견제해야 된다 말하면, 명나라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다시 자네들에게 영향력을 확보하려 수 쓰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방인 조선을 믿거나, 자체적으로 우리를 조사해서 알아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괜찮아. 우리가 철을 생산한다는 것 정도는 알더라도 큰 위협으로는 여기지 않을 거야. 정말로 위협으로 느낄 건 따로 있지."

무타우타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어떤 위협인데요?"

"식량일세. 아무리 철을 생산해 농기구와 병기를 만든다 한들, 농사를 지어 인구를 늘리고 군량을 확보하지 않으면 위협이 될 수 없어. 그러니 우리가 제철 기술이 있는 건 알려져도 괜찮지만, 새 농법을 잘 쓰고 있다는 것만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네."

"그래서 조선에서 식량 사 올 돈을 보태줄 테니 새 농법은 쓰지 말고 있으라 하셨던 거였군요."

무타우타의 말에 판차도 이해했다는 듯 끄덕였다. 이만주는 무타우타를 통해 알아낸 4윤작법을 파저강 일대에 적용해 수확에 성공하고 나서도, 판차와 무타우타에게는 두만강 일대를 떠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맞네. 이번에 마을을 비우면서 작물만 수확하고 줄기나 잎은 밭에 그대로 버리고 오라 한 것도 그런 이유였네. 밭을 조사한 조선인들이 여전히 우리가 조나 수수 농사만 주력으로 삼는다고 여기게 만들려는 것이지."

"그런데 이제 조선의 눈에서는 벗어났지만, 혹시라도 명나라가 지휘사님께 사람을 보냈다가 그자가 파저강 근처의 농경지를 보고 무언가 눈치채면 큰일 아닙니까?"

이만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농법인지는 몰라도 농사가 잘 되고 있다는 건 알아챌 수 있겠지. 하지만 걱정 말게. 농사철이 되기 전에 그것도 해결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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