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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69화 (16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69화

169화

"어휴, 드디어 맞췄네."

활을 들고 중얼거리며 들어온 무타우타를 향해 먼터무가 소리쳤다.

"나를 형으로 따르던 네놈이 이럴 줄은 몰랐다! 이 짐승 같은 놈!"

무타우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짐승이고 말고요. 무식하지만 감 하나는 들짐승처럼 좋아서 그걸로 지금껏 살아왔으니, 아마 인간 중에 제일 짐승에 가까운 놈이 나일걸요. 그리고 자격이 없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형이고 뭐고 바로 목덜미를 물어버리는 게 진짜배기 짐승 아니오?"

"대체 이만주 놈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걸 받았기에 이런 짓을 하느냐?"

"아직 별다르게 받은 건 없소."

태연한 무타우타의 말에 먼터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무것도 안 받고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인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앞으로 받을 거니 그렇죠. 쪼갤 수 없고 너무 큰 건 나중에 받는 것도 어쩔 수 없잖우? 그리고 조선 밑에 얌전히 있던 내가 먼저 조선과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 줘야 지휘사님도 안심하고 나한테 뭐라도 주지 않겠소?"

"허! 받을 게 대체 뭐기에 네가 먼저 움직이고 나중에 이만주가 주기로 할 정도냐?"

무타우타는 껄껄 웃더니 말했다.

"내가 바보요? 이 난리통에 누가 어디 숨어서 듣고 있다가 나중에 조선한테 가서 일러바칠지 알고 주절주절 다 떠든단 말이오. 뭐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 하나만 알려 주겠수다. 저거요."

무타우타가 가리킨 곳에는 먼터무가 양녕에게 받은 소주가 담긴 항아리와, 술병과 술잔이 담긴 버들고리가 있었다.

"내가 저걸 얼마나 가지고 싶었는지 형님은 모를 거요. 그래서 저것들은 점찍어 둔 물건이니 무조건 내가 갖겠다고 했소. 아르키야 형님이 틈만 나면 마셨다고 들었으니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술병이랑 술잔은 온전하죠?"

순수한 탐욕이 느껴지는 그 말에 좌절하듯 고개를 숙였던 먼터무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충샨……. 내 아들 충샨은 어디 있냐?"

먼터무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무타우타는 피식 웃고 말했다.

"그걸 같은 가문 사람인 판차가 아니라 나한테 물은 거요? 조선인들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가끔 하던데 진짠가 보우. 피만 보고도 알아보는 걸 보니 말이오."

그렇게 말한 무타우타가 자기 옷에 잔뜩 묻은 핏자국을 손으로 툭툭 쳤다. 잠시 멍하니 있던 먼터무는 그 말을 이해하고는 분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화살이 박힌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시 쓰러지듯 주저앉아서는 외쳤다.

"아까 널 짐승 같은 놈이라 한 말이 틀렸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

"형님도 참. 짐승보다 훨씬 나으니까 이러는 거요. 원래는 판차가 해야 되는데, 자기 손으로 조카를 죽이는 금수만도 못한 짓을 하게 하는 대신 내가 대신 손에 피를 묻혀 준 거란 말이오. 뭐 아직 묻힐 피가 남긴 했지만."

말을 마친 무타우타는 새 화살을 꺼내 시위에 메기고 당기기 시작했다. 먼터무는 자신을 겨누는 무타우타를 노려보다가, 지금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는 판차를 보고 말했다.

"네가 세상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참한 최후를 맞기를 귀신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저주해 주마."

증오가 담긴 그 말에 판차는 대답 대신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만수무강하십쇼, 형님."

그 순간 화살이 먼터무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먼터무의 집에서 나오던 판차와 무타우타는 집 앞까지 다가온 이만주와 마주쳤다. 이만주는 말 위에서 고개만 내밀어 먼터무의 집 안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끝났군. 수고했네. 후환은 다 없앴나?"

이만주의 질문에 판차가 대답했다.

"예. 충샨은 물론이고 저희와 손잡기를 거부한 자들도 모두 죽였습니다. 대신 장남이자 이곳 지사인 아구는 한성부에 가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볼모로 가 있다던 그 녀석 말이지? 그건 어쩔 수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애초에 조선에서 오돌리 부족을 분열시키려는 목적으로 지사로 임명했던 것이라 오돌리 부족에 별 영향력도 없지 않았는가. 너무 걱정 말게."

"알겠습니다."

이만주는 이번에는 무타우타에게 물었다.

"자네도 계획대로 잘 했지?"

"물론입죠. 미리미리 소를 처분하고 말로 바꿔 뒀다가, 부족원들은 물론이고 세간살이까지 전부 다 싣고 왔습니다. 오늘 바로 옮기기 까다로운 것들은 미리 조금씩 빼돌려뒀고요."

"잘했네. 그럼 어디 자네들에게 나눠 줄 걸 다시 확인해 볼까."

주변에서는 판차의 편을 든 오돌리 부족원들과 무타우타의 부족원들,  훌리가이 병사들이 다른 오돌리 부족원들을 위협하거나 설득해서 끌고 가는 혼란한 상황이었지만, 판차와 무타우타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이만주를 보았다.

"우선 판차 자네는 건주좌위를 계승하게 될 걸세. 다른 마땅한 계승자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건 어려울 것 없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타우타 자네에게는 새롭게 건주우위를 만들어 내려 달라 하겠네. 부족 규모야 사실 그리 큰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에 기여한 게 크고, 우디거들 사이에서 영향력도 커 큰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점점 조선인들에게 밀려나는 우디거들을 자네 밑으로 흡수할 수 있는 것까지 생각하면 충분히 될 걸세."

그 말에 무타우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지휘사님!"

"그리고 하나 더 주겠네."

"하나 더요?"

본인도 처음 듣는 얘기라 어리둥절해하는 무타우타에게 이만주가 야심으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성씨를 주겠네. 건주우위 지휘사가 될 사람인데 성씨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전 이미 명나라에서 받은 양씨 성이 있는데요?"

"나의 쿠룬이나 판차의 기오로 같은 여진족 성씨를 말하는 걸세. 자네도 하나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야."

"드디어 저도 그런 게 생기는군요! 그럼 제 성씨는 뭡니까?"

어떤 성씨를 줄까 생각하며 무타우타를 보던 이만주의 눈길이 무타우타가 허리춤에 찬 도끼에 가 닿았다.

"자네가 허리에 찬 조선제 도끼를 보니 생각난 건데, 자네가 우디거 사이에서 영향력을 키운 게 도끼를 팔기 시작하면서부터였지?"

"맞습니다."

"그럼 그걸 성씨로 삼아서 수허(도끼)라 하면 어떻겠는가?"

그 말에 무타우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해졌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지휘사님!"

정말로 신이 난 무타우타를 보고 피식 웃은 이만주가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 계획대로 빨리 여기 일을 마무리 짓고 움직이세. 요동도사가 기다리고 있을 게야."

* * *

1430년 12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이만주와 무타우타의 오돌리 부족 습격으로부터 두 달여 뒤. 이번 일에 대한 명나라의 반응이 조선 조정에 도착했다. 중신들과 함께 예조판서 신상의 보고를 듣던 이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결국 명나라가 이만주하고 판차, 무타우타 셋 다 냉큼 받아들였단 것이오? 공험진의 증거가 나왔으니 어쩔 수 없이 백두산 동쪽 땅은 조선에게 주지만, 거기 사는 여진족만이라도 데려가야겠다는 속내를 대놓고 드러낸 것 아니오."

"예. 이번 습격에서 다친 조선인이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이번 일은 건주여진 안에서 일어난 여진족 간의 싸움일 뿐이니 크게 여기지 말라 했습니다. 또 이번 일을 일으킨 이만주와 판차, 무타우타는 황제가 용서했으니 책임을 묻자고 하지 말 것이며, 건주좌위의 오돌리 부족은 원래 있던 요동으로 돌아온 것이니 회령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신상의 말에 이도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하! 용서는 무슨! 용서면 있던 죄를 없애는 것인데, 그러면 죄가 면해졌을 뿐인 무타우타에게 건주우위는 왜 내려줬단 말이오? 이번 일을 잘했다고 판단하고 상을 내려 준 것이면서 용서 운운하다니 이보다 더 구차할 수 없을 것이오. 덕분에 무타우타를 통해서 우디거들을 점점 조선에 끌어들이고, 나중에는 무타우타를 치우고 우디거들을 조선이 직접 지배해 흡수하려던 계획이 전부 틀어져 버렸소."

"신 좌의정 맹사성 아뢰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거래하던 오돌리 부족과 무타우타의 부족이 갑자기 옮겨간 데다가, 건주위 영향력을 다시 장악한 이만주의 눈치까지 보이니 한동안 다른 여진족들과 조선 사이의 교역에도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호마를 들여오는 일이 한동안 어려워질 것이 염려됩니다."

"신 영의정 황희 아뢰옵니다. 이미 조공으로 보내던 말의 일부를 해동청으로 대신하여 말 유출이 줄었고, 그나마도 칠주도 목장에서 키운 말들 중에서 적당한 중하등마를 골라서 보내는 것으로 문제없이 충당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쓸 군마 역시 칠주도와 동북면 목장에서 키우는 말들이 충분히 많으니, 비록 호마를 새로 들여오는 것이 끊긴다 하더라도 한동안은 문제없습니다."

황희의 말에 이도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나간 상황만 계속 붙잡고 있어도 의미가 없소. 분석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걸 알아낸 다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해야 할 것이오. 이번에 경원부에서 추가 조사를 마치고 보고를 올린 것으로 아는데, 뭔가 알아낸 게 있소?"

"신 병조판서 황상 아뢰옵니다. 우선 회령진 수색 결과입니다. 먼터무의 집에서 발견된 아이 시체는 먼터무의 둘째 아들인 충샨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 충샨의 시체를 먼터무의 집까지 끌고 온 핏자국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충샨은 다른 곳에서 죽인 다음 먼터무의 집에 옮겨다 놓은 듯했습니다. 먼터무와 충샨의 시체에 박혀 있던 화살들도 수거해서 확인해 보았는데 오돌리 부족이 아니라 무타우타의 부족이 쓰는 화살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도 판차가 직접 죽이지는 않았나 보군. 하긴 아무리 짐승 같은 놈이라도 무고한 자기 조카를 죽이지는 않았겠지. 그나저나 시체를 가져다 놓았다는 걸 보면 먼터무와 충샨 둘 다 자신들이 죽였다는 걸 조선에 보여 주려고 한 것이오?"

"그런 것 같습니다. 먼터무의 시체 위에 던져져 있던 참혹하게 찢긴 천을 모양대로 다시 맞춰 보았는데, 먼터무가 입고 다니던 조선식 겉옷이었습니다."

그 말에 이도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조선에 대한 적대심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로군. 옛 경원부 터는 어땠소?"

"소를 미리 말로 바꿔 둔 것도 그렇고, 무타우타는 아예 작정하고 부족 전체를 옮겨갈 계획을 짰던 것 같습니다. 작물도 모두 수확해 가서 밭에는 흙만 있었고, 도끼와 농기구는 물론 그릇까지도 전부 챙겨갔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나무틀이 있었는데, 아마 써레 아랫부분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 우의정 허조 아뢰옵니다. 써레를 통째로 들고 가기는 어려우니 금속 부분만 뜯어간 것이라 생각됩니다. 조선에서 팔아 주지 않으면 철제 도구 충당이 안 되는 여진족 놈들다운 일입니다. 그런 놈들이 무슨 만용을 부려서 조선과 척을 지고 도망갔나 싶습니다."

허조의 그 말에 지금까지 회의를 지켜만 보던 양녕이 말했다.

"신 양녕대군 이제 아뢰옵니다. 만용을 부린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어쩌면 준비가 되어서 큰 부담 없이 조선과 척을 지고 도망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준비가 되었다 하시면……."

무언가 불안을 느끼고 말을 흐린 허조에게 양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타우타의 부족이 제철 기술을 손에 넣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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