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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68화 (16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68화

168화

1430년 5월 하순 모일.

경원부 비우진. 회경군 주둔지.

회경군 도원수 최윤덕의 집무실에는 최윤덕, 최만리, 그리고 오랜만에 방문한 양녕이 모여 있었다.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차부터 한 잔씩 마시려고 하는데,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 내용물을 본 양녕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이 차는…… 특이하구려."

어떤 명칭으로 불리는지 몰라서 특이하다고만 하고 넘어갔지만, 찻잔에 담긴 것은 색깔이나 향기가 영락없는 홍차였다.

양녕의 반응을 본 최만리가 말했다.

"아, 대군께서는 처음 보시겠군요. 진주부 하동현 출신으로 칠주도에 이주해 간 사람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린잎으로 만드는 기존 차와 다르게, 이미 많이 자라서 품질이 떨어지는 잎을 따다가 찌거나 덖지 않고 그대로 시들게 두어서 만드는 것인데 동북면에서는 이 차를 많이들 마십니다."

"신기하군. 이유가 있나?"

"칠주도에 차밭이 많아서 품질 낮은 잎이 어마어마하게 나오니 값이 싼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동북면의 겨울이 춥고 길다 보니 따뜻한 걸 마시고 싶어지곤 하는데, 매번 맹물만 끓여서 마시는 것보다 이 차를 우려내서 마시면 맛도 좋고 소화도 잘 됩니다. 겨울에는 어차피 계속 불을 때야 하니 아예 솥에다 물과 찻잎을 넉넉하게 넣어놓고 계속 끓이다가, 차가 마시고 싶어지면 국자로 잔에 떠 담아 마시는 집도 많은데 비싼 찻잎으로는 그렇게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마시면 엄청 떫지 않은가?"

"그래서 그냥 뜨거운 물을 섞어서 좀 연하게 만들어 마시는 게 보통이고, 신백정들은 가축 젖을 조금 넣어서 마시기도 합니다."

양녕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대화를 듣던 최윤덕이 말했다.

"그런데 대군께서 지금까지 가끔씩 동북면 오셨던 건 여진족들에게 모습을 보여 대군의 위신으로 하여금 여진족 통제에 도움이 되게 하시려던 거였지만, 이번에 오신 것은 최근 일어난 해서위 건 때문이시지요?"

"맞소. 여진족에 관한 일이니 여기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최근 여기 경원부 인근에서 여진족들 움직임 중에 뭐 이상한 점 없었소?"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최만리가 대답했다.

"최근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소 대신 말을 키우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조선인들도 그렇긴 합니다만 여진족들이 더 그런 경향이 크지요. 이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흠……. 질퍽한 땅에서 말에게 쟁기를 끌게 하면 발목이 상하는 경우가 많아서 발목이 튼튼한 소를 쓰는 것인데, 여기는 논 없이 밭농사만 지으니 그럴 걱정이 없어서일 걸세. 게다가 북방은 날씨가 변덕이 심하기도 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간도 연중 얼마 되지 않네. 맑은 날 재빠르게 밭을 갈아야 겨울이 되기 전에 수확할 수 있으니 느릿한 소보다 말이 훨씬 낫지."

"하긴 말은 타고 다니기도 좋지요. 그런데 그럼 왜 조선인들은 계속 소를 키우는 경우가 많을까요?"

"조선인들이 소고기를 좋아하기 때문 아닐까 하네."

"아, 바로 이해됐습니다."

최만리의 그 말에 피식 웃은 양녕이 말했다.

"말을 키우는 것만으로 수상하게 보기는 어렵네.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야. 그럼 경원부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치고, 거솔도는 어떻소?"

양녕의 질문을 받은 최윤덕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솔빈성 일대 여진족들 중에서 농사를 더 많이 짓던 이들은 보호를 청하며 솔빈성 근처로 이주하고, 목축을 더 많이 하던 이들은 반대로 멀리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걸 이상하다고 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조선인들의 농사가 잘 될수록 목초지가 농지로 바뀌니, 농사짓던 여진족들은 관심을 보여 다가올 테지만 목축하던 이들은 풀을 찾아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게다가 애초에 거솔도에 고을이 몇 없으니, 솔빈성 일대라고 해도 결국 거솔도 동부 전체를 가리키다시피 하는 것 아니오. 그 넓은 지역에 사는 여진족들이 다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오. 대신 혹시 모르니 목축을 하던 이들이 얼마나 어디로 떠났는지만 수시로 파악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건주위와 관련된 여진족들 상황은 어떻소?"

"오돌리 부족은 이전보다도 더 얌전해졌습니다. 알아서 농사짓고 교역하면서 잘 지내고, 좋은 호마를 구하면 바로 가져와서 팔곤 합니다."

"정말로 얌전해졌군. 무타우타 쪽은 어떻소?"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이전처럼 해동청이나 모피를 팔고 도끼나 농기구, 면포를 사서 가지요. 대신 최근에는 도끼보다도 다른 공구들을 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특히 자귀나 톱, 대패 같은 게 많더군요."

"도끼야 이미 많이들 가지고 있으니 잘 안 팔려서 그런 것일 수 있고, 우디거들이야 나무로 먹고사는 이들이니 나무 다듬는 공구를 많이 사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소. 이거야 원, 수상하게 보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또 막상 크게 이상한 일은 없으니, 찝찝하지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군."

양녕이 작게 한숨을 쉬자, 최윤덕도 막막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나라에서는 별 얘기 없었습니까?"

"그냥 해서위 지휘사를 새로 두었다는 통보가 전부였소. 정말로 그게 전부인지 아니면 숨긴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백두산 동쪽을 조선의 영토로 만든 상황에서 백두산 서쪽 여진족들 정세를 물어보면 요동을 노리는 것 아니냐며 수상하게 여기거나 트집을 잡을 우려가 있어서 차마 묻지도 못하고 있소."

"큰일입니다. 별일 아니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대비해야 하는 법이니, 비축 물자도 확인해 두고, 성벽도 잘 관리하고, 훈련도 꾸준히 시켜두겠습니다."

"고맙소. 나도 그럴 일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큰일이 생기면 바로 와서 공들을 돕겠소."

그렇게 말한 양녕이 불안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 * *

1430년 10월 중순 모일.

회령진 서쪽. 두만강 강변.

오돌리 부족과 교역하러 온 다른 여진족들이 배를 타고 오건 말을 타고 오건 가장 먼저 밟게 되는 이곳은 여진족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교역소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오늘도 벌써 몇몇 사람들이 거래하고 있는 모습을 보던 먼터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 많지도 않은데……."

그때 먼터무가 온 것을 본 부족원 하나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날도 추워졌는데 부족장님께서 어쩐 일로 직접 나오셨습니까?"

"허허허. 판차가 찾아와서는 춥다고 집에만 있지 말고 가끔 나가서 교역이 잘 되는 지라도 살피라면서 잔소리를 하지 뭔가. 그래서 나와 봤는데 날이 추워서 그런지 오늘은 교역이 많이 없군."

"그런 거였군요. 그래도 떠밀려서 나온 날 조용한 건 좋은 일 아닙니까. 느긋하게 계시다가 돌아가서 오늘 하루 온종일 교역을 감독했노라고 하시기에는 딱이지요."

"하하! 자네 말이 맞군. 그럼 어디 앉아라도 있어 볼까."

부족원이 다시 교역하러 온 다른 여진족과 대화를 시작하고, 먼터무는 앉을 만한 곳을 찾고 있는데 두만강 건너편에 한 무리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런, 내가 나오니까 갑자기 교역하러 많이들 오는군."

사내들은 갈수기라 수심이 두 자도 채 되지 않는 두만강을 말을 탄 채로 천천히 건너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먼터무가 선두에 선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아니, 당신은!"

긴장한 표정의 먼터무와 달리 이만주는 여유롭게 씨익 웃어 보였다.

"오랜만일세, 동 지휘사!"

"여기에는 무슨 일이오?"

"계획 중인 일이 있어서 자네를 좀 만나러 왔네. 잡아!"

이만주의 짧은 호령과 동시에 그의 좌우에 있던 기병들이 먼터무를 향해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봐! 다들…."

교역소에 있던 부족원들을 부르려던 먼터무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교역이 목적인 것처럼 미리 와 있던 다른 여진족들이 자신들과 대화하던 오돌리 부족원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먼터무를 향해 달려오고 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먼터무는 뒤로 돌아 힘껏 달리며 생각했다.

'훌리가이 놈들이 갑자기 왜 습격한 건진 모르겠으나, 빨리 마을로 가서 대비해야 한다!'

헉헉거리며 달려 마을 근처까지 온 먼터무의 눈에 마침 반대쪽에서 무타우타가 부족원 십여 명과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타우타! 마침 잘 왔다! 훌리가이 놈들이 습격했는데 막는 걸 도와……."

먼터무가 달리면서 무타우타에게 손을 흔든 그 순간, 무타우타가 쏜 화살이 먼터무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공중에 핏방울을 뿌렸다.

"이게 안 맞네."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거는 무타우타를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먼터무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붙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사방에서 무타우타의 부족원들이 마을로 다가오고 있었다.

먼터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무타우타를 한 번 노려보고서는 마을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노구를 끌고 한참을 달린 데다가 어깨에 화살까지 빗맞아 지칠 대로 지친 먼터무는 비틀거리면서도 겨우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마침 집 앞에 서 있던 이복동생 판차의 옆을 지나 집으로 들어간 먼터무는 무기와 갑옷을 찾으며 말했다.

"판차. 훌리가이 부족이 습격해 왔다. 놈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무타우타 놈이 배신했어. 자기 부족원들을 거의 다 끌고 온 것 같은데, 그러면 저쪽 숫자가 제법 많아져 버려. 조선군 요새가 길목마다 지키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이 데려온 거지?"

판차는 먼터무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반대입니다. 요새가 길목마다 있어서 가능했겠지요. 그들이 우리와 가까운 사이인 걸 알고 있으니 몇 사람씩 마을을 오가는 건 조선군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걸 이용해서 병력을 몇 사람씩 쪼갠 다음 길목마다 나눠서 오무호로 오면 됩니다. 선봉은 그렇게 들어오고, 나머지는 조선군 요새를 피해서 숲을 통과해서 오면 되지요. 우디거들에게는 숲이 곧 길이지 않습니까."

무기를 열심히 뒤적이던 먼터무의 손이 딱 멈췄다. 판차의 말투가 너무 침착했고, 무타우타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먼터무가 천천히 뒤를 돌아 판차를 보며 말했다.

"너 설마……. 이게 무슨 짓이냐. 오돌리 부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냐?"

판차가 태연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먼터무를 보며 말했다.

"반대입니다. 부족을 살리기 위해 부족장의 자리를 넘겨받는 것입니다. 형님은 너무 나약합니다. 제대로 된 지도자가 이끌어도 힘겨울 판에, 이대로 가다간 오돌리 부족은 풍습도 말도 잃고 사라지게 될 겁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저와 뜻을 같이하는 부족원들과 함께 이렇게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교역소에 보내놓고 무기와 갑옷도 모두 치워 놓은 거였군. 준비는 잘했다만, 오무호에 소란이 난 걸 알게 되면 조선군이 곧 올 거다."

그 말에 판차가 비웃으며 말했다.

"조선이 알아 봤자 애초에 이건 건주위와 건주좌위가 싸우는 상황 아닙니까? 명나라의 신하끼리 싸우는데 조선이 누구 편을 들어서 개입해야 할지도 문제고, 여기에 구해야 하는 조선 백성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방어나 굳히고 말겠지요.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조선인들에게 우리는 오랑캐입니다. 갈수록 오늘 결단을 내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먼터무는 판차에게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집 입구에서 날아온 화살에 무릎을 맞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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