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67화
167화
1430년 4월 중순 모일.
한성부. 척동상단 본부.
한명회는 척동상단 본부의 대방 집무실을 찾아온 양녕에게 현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고본 소유자들에게 하는 현황 보고와는 별도로, 양녕에게 척동상단 경영의 조언을 구하는 목적이었다.
"아직 계응국에서 왜경(미야코)에 이르는 항로는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무라카미 해적들 때문인가?"
"맞습니다."
"해적들이 위험해서인 것은 아니겠군. 척동상단 수송선은 판옥선을 기반으로 한 것이니 해적들이 왜선으로 틀어막아 봤자 그대로 들이받아 버리면 단숨에 부숴 버릴 수 있을 터. 달라붙어 봤자 높이 차이가 크니 갑판까지 올라오는 것도 어렵고, 군선이 아니라 화포는 없지만 여차하면 화살로 쏴 버리면 그만이니 어려움은 없을 테고……. 문제는 무력충돌 그 자체겠어."
"예. 상단과 해적이 충돌한 것이라고 해도 소속은 각각 조선과 일본입니다. 자칫하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지요. 게다가 칠주도를 조선에 잃은 지 겨우 10년이니, 왜경 근처 바다에 조선의 군선을 닮은 배가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건 물론이고, 자국 바다에서 조선이 무력을 쓴다고 하면 기겁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러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한명회는 탁자 위에 펼쳐 놓은, 간략한 일본 지도의 북쪽 해안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어차피 왜경은 한동안은 내전으로 제대로 된 교역이 어려울 테니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대신 그동안 일본 땅 북쪽 해안을 중심으로 교역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척동상단 수송선이 오가는 지역이 교역으로 이익을 버는 모습을 보여 주고, 수송선을 군선이 아니라 상선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밑작업이지요."
"괜찮은 계획이로군. 한동안 교역을 제대로 못 하면서 남들 돈 버는 것만 보던 왜경 인근 상인들은 혼란이 가라앉자마자 교역을 하려 들 것이고, 그들을 통해 중요한 조선제 물자들을 사야 하는 왜경 인근 영주들도 교역을 원하겠지. 그들을 이용해서 왜경 근처까지 조선의 상선이 들어와도 문제가 없고, 오히려 무라카미 해적들이 그들을 막는 것이 일본에 피해를 준다는 세론을 만들려는 것이지?"
"맞습니다."
한명회의 말을 들은 양녕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자네 정말로 일을 잘하는군. 그럼 땅을 사서 항구를 만드는 것도 일본 땅 북쪽 해안에서 먼저 진행할 생각인가?"
"사실 이미 소개장을 통해서 땅을 사둔 곳이 있습니다. 부지 측량과 정리가 다 되는 대로 항구 건설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벌써 말인가? 엄청 빠르군. 위치는 어디인가?"
"단후(탄고) 지역에 있는 전변(타나베)이라는 고을입니다. 계응국 석견(이와미) 지역에서 바로 다음 기항지로 삼기에는 조금 먼 감이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해안 거의 전부가 오우치 가문과 적대하는 야마나 가문 영지인 탓에 어쩔 수 없이 야마나 가문 영지를 다 지나서 나오는 단후 지역에 땅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감수해야지. 그나저나 단후 지역의 전변이라……. 왜경 북쪽에 있는 곳이겠군. 만 안에 가늘고 긴 만이 또 들어있고 그 입구에는 적당한 크기의 섬이 파도를 막고 있는지라, 큰 배가 여럿 정박하기 아주 좋은 곳이지. 잘 골랐군."
양녕의 말에 한명회가 놀라서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아십니까? 가 보셨던 곳인 겁니까?"
양녕이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그 먼 곳까지 가 봤겠는가. 그저 다 아는 방법이 있을 뿐이네."
"역시 대군께서는 대단하십니다."
'원래 역사에서 훗날 마이즈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지역이군. 21세기까지도 군항으로 쓰일 정도로 입지가 뛰어난 곳이니, 확실히 한명회가 보는 눈이 있어. 대신 그 재주로 내 눈이 안 닿는 곳에서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지금처럼 자기가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계속 받게 해줘야 할 것이다.'
"과찬일세. 그나저나 땅 사는 데에 별일 없었는가?"
"예. 단후 지역은 잇시키 가문의 땅인데, 지금 가문 안에서 내전이 터진 모양입니다. 전변 일대를 가진 파벌이 군자금이 궁했던 모양인지 소개장을 보여 주자마자 바로 관심을 갖더군요. 그래서 무기와 철, 면포로 땅을 사겠다고 하니 바로 수락했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긴 하지. 그런데 무기와 철, 면포는 계응국이 일본에 팔던 교역 품목 아닌가? 그걸 상단에서 대금으로 쓴다면 교역 독점이 깨질까 봐 걱정했을 것 같은데."
양녕의 질문에 한명회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 문제를 막기 위해서 오우치 가문을 끼고 거래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오우치 가문이 무기와 철, 면포를 땅 값으로 먼저 내주면 상단에서 나중에 오우치 가문에 갚겠다는 내용으로 계약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땅 값만큼의 무기와 철, 면포를 오우치 가문에 넘겼지요."
"그러면 땅 값을 오우치 가문이 우선 내주는 모양새가 되니 오우치 가문의 신용을 써먹는 셈도 되겠군. 아주 잘 했네."
"감사합니다. 이 외에는 따로 보고드릴 큰 사안은 없습니다."
한명회가 보고를 마치자 양녕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단 일이 잘 풀리고 있어서 다행이야. 나도 걱정 없이 한동안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겠어. 대신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바로 알려주어야 하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한명회의 질문에 양녕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척동상단과 직접적으로는 큰 관련 없는 일이긴 하지만, 여진족에 관련된 일이라 어쩌면 척동상단이 동북면에서 일하는 데에 영향이 있을지 모르니 자네도 알아두는 게 좋겠군. 대신 다른 곳에 괜히 말하고 다니지는 말게."
"물론 그래야지요."
"좋아. 그럼 알려 주겠네. 명나라에서는 여진족들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셋으로 나눠 구분하는 것을 알고 있나?"
"요동과 조선 가까운 쪽에 사는 이들을 건주여진, 그 북쪽으로 몽골과 가까운 쪽에 사는 이들을 해서여진, 그리고 나머지는 야인여진이라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네. 자신들의 관할에 있는 부족들은 크게 묶어 건주와 해서로 나누고, 관리가 잘 안 되는 이들을 한데 모아 야인이라 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 중 건주여진에는 건주위와 건주좌위를 설치했네."
"들은 적 있습니다. 각각 이만주와 먼터무가 지휘사로 있지 않습니까?"
"맞아. 그런데 최근 명나라가 해서여진 지역에도 해서위를 설치하고 여진족을 지휘사로 임명했어."
양녕의 말을 듣자마자 한명회가 말했다.
"이이제이를 쓰려는 것 같군요."
"주상과 나, 그리고 대소신료들도 그 소식을 듣고서 같은 생각이었네. 이미 몽골이 북원과 오이라트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여진족도 건주와 해서로 갈라져 싸우게 만들어 제어하려는 목적으로 말이야."
"해서여진에 해서위를 만들어 힘을 실어주면 건주위가 있는 건주여진과 서로 견제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자칫하면 해서여진이 해서위를 중심으로 뭉칠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양녕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건주여진을 견제하려고 한다는 말일 수도 있지. 그런데 건주좌위의 먼터무가 이미 조선에 복속되었는데 대체 왜 갑자기 건주위를 더 견제하려고 하는지 그게 의문이고 또 걱정일세."
* * *
1430년 4월 중순 모일.
송화강 만곡부. 해서위.
명나라가 새롭게 해서위를 설치한 이곳에는 이미 큰 마을이 지어져 있었다.
소수 병력만 대동하고 마을을 찾은 이만주는 입구에 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건주위의 지휘사이자 훌리가이 부족의 족장, 이만주다! 여기 족장을 만나러 왔다!"
사방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에 멀리 떨어져 있던 나무에서 새들이 놀라 날아오르고, 마을 안에서는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사내가 말을 타고 마을 입구에서 나와 외쳤다.
"나는 해서위의 지휘사이자 훌룬 부족의 족장, 도르호치다! 네놈은 대체 뭘 먹고 다니기에 그리 목청이 큰 거냐? 천둥이라도 치는 줄 알았다!"
"칭찬 고맙다!"
"칭찬이 아니야! 여기서 네가 계속 외치게 두면 부족원들 귀청이 상할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마을로 들어와라! 손님으로 받아 주마!"
이만주는 그 말에 껄껄 웃으며 도르호치의 뒤를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도르호치의 집 앞 공터에 도착한 이만주가 말에서 풀쩍 뛰어내려 미리 준비된 의자에 털썩 앉자, 마주 앉아 있던 도르호치가 거만하게 말했다.
"그래서 무슨 용무로 왔느냐. 내가 새로 해서위 지휘사가 된 걸 축하하러 오기라도 했느냐?"
"맞아. 축하한다."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듯한 그 말투에 도르호치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재밌다는 듯 웃은 이만주가 말을 이었다.
"우디거들하고나 친하게 지내는 줄 알았는데 제법 줄 대는 법을 알더군. 명나라에 입조해서 해서위 지휘사 자리를 받은 건 좋은 판단이다."
"하하! 잘 아는군. 차마 그건 못 비꼬겠지!"
이만주의 조부인 이사성이 명나라에 입조해 건주위 지휘사를 받았으니, 도르호치가 입조한 것을 깎아내리면 조부 욕이 된다는 조롱이었지만 이만주는 태연히 대답했다.
"비꼬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칭찬하려고 온 거다. 훌룬 강 근처에 계속 있었으면 앞으로도 몽골한테 맨날 맞고나 살았을 텐데, 해서위 지휘사 자리를 받고 요동 근처로 거점을 옮기면 몽골을 피해 도망치는 게 아니라 황제의 지시로 이주하는 거라고 우길 수 있지 않느냐. 게다가 요동 가까이에 왔으니 몽골도 명나라가 무서워서 너희를 공격하러 쉽게 오지 못하겠지."
빙 돌려서 비꼬는 이만주의 말에 주먹을 꽉 쥔 도르호치의 입에서 빠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났다. 당장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손님으로 받아주겠다고 한 이상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모습에 만족했는지 낄낄 웃은 이만주가 웃음을 거두고 도르호치를 노려보며 말했다.
"게다가 너희가 입조하면서 명나라가 우리와 교역하던 양을 줄여 버렸다. 덕분에 소금하고 면포는 물론이고 농기구도 구하기 어려워졌어. 너희가 명나라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곤란해할지 조언을 아주 잘 해 준 모양이더군."
드디어 기회를 잡은 도르호치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더 고맙지. 너희가 요동도사 통제에서 벗어날 듯 말 듯 간보는 짓만 안 했어도, 명나라가 나에게 해서위를 주고 끌어들여 너희를 견제하게 할 생각을 안 했을 테니까."
"감사는 잘 받으마. 식량 교역까지 끊기기는 싫으니 다시 요동도사 말을 잘 들어야 하나 고민 중인데, 그 고민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 우리가 너희에게 고마워할 일을 하나 만들어 주마. 그럼 다음에 보자."
이만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굳은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말에 올라탔다. 고소하다는 듯 껄껄거리는 도르호치의 웃음소리를 무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에서 나온 이만주는 자신을 기다리던 사내들에게 말했다.
"됐다. 이제 가자."
그렇게 말한 이만주의 뒤를 말을 타고 따라가던 사내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전 같으면 우리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곤란하게 만든 저놈들하고 한판 붙었을 텐데, 양쪽 다 명나라에 속한 상황이니 그럴 수가 없군요."
어느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이만주가 사내의 말에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딱 이 정도가 좋아. 우리가 저놈들이 지휘사 자리를 받은 것을 경계하고, 교역이 끊겨서 곤란해한다는 소식이 명나라에 들어가게 해야지. 그래야지 명나라가 우리가 밀, 순무, 콩, 보리로 농사를 지어 여유가 생겼음을 꿈에도 모를 것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