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66화
166화
모리하루는 잔뜩 긴장했다.
한명회는 그런 그에게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렇군요. 사실 척동상단을 경영하는 데에 양녕대군께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대군께서 오우치 가문이 교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면서, 가서 인사드리면서 혹시라도 어려움이 있으면 바로 도왔으면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리 준비를 해서 온 것입니다."
그 말에 모리하루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렸다.
"그런 거였구려. 말씀드리기도 전에 어려움을 알고 도움을 주시니, 실로 대군께서는 대단한 분이시오. 이 고마움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그나저나 그러면 대군께서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알고 계시오?"
"예. 미야코가 일본 교역의 중심지인지라 상인들이 이곳 교역항에 와서 교역해 간 물건들도 역시 미야코를 거친 다음에야 전국으로 가는 것인데, 미야코가 내전에 휩싸였으니 이곳에서 전국으로 가던 물자의 흐름이 막혀 곤란을 겪고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한명회의 말이 딱히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것도 아니었고, 겪고 있는 어려움이 그것만 있던 것도 아니었던 탓에 모리하루는 순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납득했다.
'하긴, 대군께서 신통력이 있으신 것도 아니신데 전부 다 아실 리는 없지. 애초에 전부 다 아셨다면 우리에게 미리 대책을 주셨을 분이지 않은가. 아니면 전부 다 알고 계시지만 교역에 문제가 많다는 게 조정에 알려지면 우리가 독점 교역을 잃을까 봐 일부만 언급하신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모든 게 더 큰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겠다.'
"그렇소. 대군께서 말씀하신 데로요. 게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지 않고 미야코에서 소비되던 교역품들 역시 내전 때문에 제대로 교역이 되지 않는 상황이오."
양녕에게 들어 지금 상황의 전말을 다 알고 있는 한명회는, 모리하루가 양녕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면서도 호족들이나 은광에 관한 얘기는 숨기는 모습에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희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도움이오?"
"해운을 주력으로 삼는 척동상단이니 해운으로 도와드려야지요. 상인들이 여기에 오기 어렵다면 상인들을 찾아가 파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찾아가 파는 것을 돕는다 하면?"
한명회는 자기 등 뒤에 정박해있는 큰 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배들에 물자를 싣고 거래 목적지까지 옮겨드리겠습니다."
한명회의 말을 들은 모리하루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이 크고 육중한 배들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몰고 온 군선이 아니라 해운에 쓰는 수송선이란 말이오?"
"예. 이런 배로 옮겨드릴 것이다 하는 것을 보여 드리고자 오늘 끌고 온 것입니다. 실제로도 양녕대군께서 고안하신 군선 설계를 개량해 만든 것이니 보좌께서 정확하게 보신 셈입니다."
판옥선을 기반으로 수송에 특화되게 개량한 수송선들을 감탄스럽다는 듯 보던 교역항 관리관이 말했다.
"그런데 배가 한 종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물살이 복잡하고 섬이 많은 연안에서 쓰기 좋은 평평한 바닥의 수송선도 있고, 탁 트여 있지만 수심이 깊고 파도가 거친 큰 바다에서 쓰기 좋은 뾰족한 바닥의 수송선도 있지요. 목적지까지 가는 바다 상황에 따라 어떤 것이든 쓸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배 위마다 걸린 저 깃발은 무엇입니까? 꼭 한성부에서 공부할 때 봤던 주상전하의 어기를 닮았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대군께서 쓰시던 좌독기와도 닮았군."
한명회는 고개를 돌려 관리관과 모리하루가 무엇을 보고 말하는지를 확인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저 깃발을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조선국을 상징하는 깃발입니다."
"조선국을 말이오?"
왕이나 가문도 아니고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이라는 생소한 개념에 모리하루가 신기하다는 듯 묻자 한명회가 설명했다.
"예. 오우치 가문을 돕게 되면 일본 각지를 다니기도 해야 할 것이니 조선에 속한 배임을 드러낼 필요가 있는데, 그렇다고 왕실이나 조정, 군에서 쓰는 깃발을 상단에서 사사로이 쓰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나라를 나타내는 깃발을 만들어 백성들이 자유롭게 쓰게 하자는 대군의 건의로 어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라를 나타내는 깃발이라. 역시 대군께서는 생각하는 것도 남다르시군. 그나저나 그래서 어기와 좌독기를 모두 닮은 것이겠소."
"예. 백성들이 기억하기도 쉽고 만들어 쓰기도 좋게 바탕을 흰색으로 하고 괘를 넷만 사용하였으며, 대신 가운데의 태극에 붉고 푸른 색깔을 써서 나라를 나타내는 깃발로서의 화려한 위엄을 드러낸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군.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색깔이 진하고 화려하오."
"예. 저희 깃발은 바다에서 쓸 용도인지라 바닷바람이나 햇빛에 바래지 않게 염료가 아니라 안료를 써서 만들어서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이리 크고 강한 배로 옮기는 데다가 조선의 깃발까지 달려있으니 섣불리 덤비는 놈도 없겠소. 이런, 배에 정신이 팔려서 손님을 계속 서 계시게 했군. 안으로 모시겠소. 거기서 천천히 얘기해 봅시다."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해보자는 소리임을 알아들은 한명회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 * *
1430년 2월 하순 모일.
스오노쿠니. 교역항 관리소.
한명회는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마주앉은 모리하루에게 말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도와드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니, 운송료는 실제로 든 비용에 조금만 더해서 받겠습니다."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웠던 주제를 한명회가 먼저 꺼내 주자 모리하루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로 감사한 일이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가 조선에서 교역해 온 물건을 영주들에게 가져다 팔고 얻는 이윤이 운송에 든 비용에 못 미치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오. 우리가 돈 나올 곳이 없는 게 아니니 운송료를 못 내지는 않겠지만, 계속 그리되면 교역을 더 할 이유가 없어지지 않겠소."
"괜찮습니다. 몇 가지만 도와주시면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무엇이오?"
"첫째로 판매 가격을 조금 늘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윤이 늘어나니 운송에 든 비용을 못 건질 위험이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모리하루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당연히 그리 해야지. 물자가 제대로 통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직접 가져와서 팔아주는 것이니 교역하는 영주들도 당연히 여기고 받아들일 것이오."
"둘째로 저희가 운송하러 갈 때마다 보조해 줄 계응국 관원을 몇 명씩 동승시켜 주십시오. 미리 어떤 물건을 얼마에 교역하겠다는 약조가 된 상태에서 저희가 물건만 옮겨도 되겠지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관원이 타고 있는 게 좋다 생각합니다. 또 저희가 사칭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오우치 가문의 물건을 교역 중임을 확인해 주는 증인도 되어 줄 수 있지요."
한명회가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교역하는지 감시하는 일도 할 수 있다는 숨은 뜻도 읽어낸 모리하루가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겨서 손해 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이윤이 늘어나는 셈이겠구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희가 땅을 살 수 있게 오우치 가문 이름으로 소개장을 써 주실 수 있으십니까?"
"땅을 사는 데 소개장이라니?"
완전히 예상 밖의 말에 영문을 몰라 하는 모리하루에게 한명회가 말했다.
"일본은 태풍이나 지진이 잦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바로 항구에 정박하지 않으면 교역품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상하는 일이 생길 수 있겠지요. 그걸 대비해서 미리 적당한 자리에 상단 돈으로 땅을 사서 항구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에서 온 상단이 땅을 산다고 하면 의심을 살 것이니, 그 부분을 오우치 가문의 소개장으로 해결하는 것이지요."
"확실히 일본에 재해가 많은 편이기는 하지만, 굳이 돈을 써서 항구까지 만드실 것 없이 이미 있는 항구들을 파악해 두었다가 쓰셔도 괜찮지 않겠소?"
"그 항구들이 저희 선박을 수용하기에 시설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시설이 충분하더라도 재해가 일어나서 다른 배들도 전부 대피하러 몰린다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항구를 가진 영주가 기회다 싶어 정박료를 비싸게 물릴 수도 있겠지요. 배와 선원을 잃느니 돈을 내는 것이 나으니 어쩔 수 없이 내기야 하겠지만 그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긴 하오."
"그런데 온전히 저희 소유인 항구가 있다면 그럴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재해가 생겼을 때 다른 배들을 정박시켜 주고 돈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재해가 일어나지 않은 평시에는 저희 선박이 항해 중에 경유해 보급을 받는 용도로도 쓸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계산해 보면 항구를 짓는 게 더 싸게 먹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오우치 가문에 이로운 점도 있습니다."
"무엇이오?"
한명회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항구를 만들면 그곳은 척동상단 선박이 수시로 들리는 곳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선박에는 항상 계응국 관원이 타고 있으니, 새로 계응국과 교역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여기까지 올 것 없이 항구에서 관원을 기다리면 됩니다."
"거리가 멀어 교역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도 교역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구려."
"예. 거기다가 영지가 내륙에 있는 영주라면 교역을 위해서 항구까지 와야 할 것인데, 항구는 상단 것이지만 거기까지 오는 육로는 여전히 항구 지을 땅을 판 영주의 것입니다. 오가는 데에 통행료를 받을 수도 있고, 적대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아예 교역을 막아버릴 수도 있겠지요."
흥미로운 표정으로 듣고 있는 모리하루에게 한명회가 설명을 계속했다.
"또 항구에서 필요한 것 중에 급히 필요하거나 운송비가 더 나오는 것. 이를테면 건물을 지을 목재나 석재 같은 것은 가까이에 있는 영주에게서 사서 쓰는 것이 나을 테니, 항구 지을 땅을 판 영주는 그것으로 부수입도 올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항구 지을 땅을 파는 게 여러모로 이익이 되는데, 저희는 오우치 가문과 협의되지 않은 곳에는 땅을 사지도, 항구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드디어 한명회의 말을 이해한 모리하루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과연. 항구를 유치해 이익을 보고 싶다면 오우치 가문에 잘 보여야만 하겠군. 대방께서 도와달라고 한 세 가지 모두 우리에게도 이로운 것이니 어찌 마다하겠소. 좋소. 앞으로 일본 다른 지역으로 교역품을 운송하는 것은 척동상단에 의뢰하겠소. 앞으로 잘 부탁하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명회는 모리하루의 말에 사람 좋은 미소로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다. 아무리 대군께서 추천하셨다고 해도 나이도 어리고 검증된 것도 없는 내가 대뜸 척동상단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것에 불만이나 불안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내가 직접 나서서 큰 거래를 성사시켰으니 그런 반응도 줄어들겠지. 대군께서 나에게만 알려주신 내용을 가지고 이뤄낸 것이니 다른 이들 모두 이번 일은 내 실력으로 이뤄 낸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말이야. 대군께서 나를 이리도 도와주시니 그 보답을 해야 마땅하겠지. 그럼 우선 오우치 가문이라는 사냥개를 잘 길들이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