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65화 (16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65화

165화

1430년 2월 하순 모일.

스오노쿠니. 교역항 관리소.

오우치 가문 영지인 스오노쿠니에서 가장 큰 항구인 이곳 교역항은 오우치 가문이 조선과 교역해 온 물건들을 다른 일본 영주들에게 파는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역량이 바닥을 치는 사태가 몇 달을 이어진 끝에, 오우치 모리하루가 직접 상황을 살피고자 교역항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오늘도 교역량은 얼마 없는 상태로군."

"예. 이렇게 찾아와 주시기까지 했는데 좋은 소식이 없어 송구스럽습니다."

풀이 죽은 교역항 관리관에게 모리하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교역항을 찾는 상인들이 줄어든 게 어찌 자네 탓이겠는가. 예측을 제대로 못 한 내 탓이지."

그렇게 말한 모리하루가 한숨을 푹 쉬는데 관리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안 좋은 소식 하나가 더 들어왔습니다."

"무엇인가?"

"오랜만에 교역하러 온 나니와(현 오사카) 상인에게 들은 것인데, 무라카미 해적 놈들이 통행료를 이전보다 더 받기 시작했다 합니다."

그 말에 모리하루가 탄식했다.

무라카미 해적, 자칭 무라카미 수군은 칠주도와 미야코 사이의 해역, 즉 훗날 세토 내해로 불리게 되는 좁은 바다를 장악한 해상세력이었다.

항행하는 선박들을 약탈하거나 좁은 수로에 관문을 설치하고 통행료를 뜯어내는 해적질이 본업이었으나, 통행료 겸 보호비만 잘 낸다면 안전한 물길로 배를 인도해 주거나 다른 해적들에게서 확실하게 지켜 주는 측면도 있었다.

"그 망할 해적 놈들이 왜 또 갑자기 돈을 더 받으려 드는지도 알아냈나?"

"예. 해적들이 그 상인 배를 안내해 주면서 왜 돈을 더 받게 되었는지도 말해 줬다 합니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내전이 빈발하고 있는데, 내전에서 밀리는 세력은 영지 안에 거점을 둔 해적들을 묵인해 주는 대신 해적질로 얻은 수익 일부를 바치게 해 군자금으로 쓰기도 하고, 아예 고삐가 풀린 세력은 자신들이 직접 수군을 조직해 해적질을 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허허, 남조 놈들이 왜구 짓 하던 게 생각나는군. 그래서 돈을 더 받는다던가?"

"예. 위험요소가 늘었으니 호위비를 더 받는 것이라 했답니다. 상인이 이 얘기를 하면서, 예상 못 한 지출이 늘어난 탓에 나니와로 돌아갈 때도 호위비를 뜯기고 나면 이윤이 없다 못해 손해를 볼 지경이니 조금만 더 깎아 주면 안 되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리해 주었습니다."

"잘했네. 이런 상황에도 교역하러 와 준 상인이기도 하고, 값을 잘 쳐준다는 소문이 나야 다른 상인들도 호위비가 늘어난 걸 감수하고 교역하러 오겠지.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한숨을 푹 쉰 모리하루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온 것은 교역항 상황을 살펴보러 온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자네에게 정확하게 알려 주러 온 것이기도 하네."

"무슨 문제가 또 있습니까?"

"그렇네. 며칠 전 들어온 소식이네. 마침내 미야코에서도 내전이 터진 모양이야. 쇼군 후보 네 사람을 각각 옹립하려는 파벌뿐만 아니라 온갖 세력들이 뒤섞인 난전이라는군."

"그건…… 우리에겐 차라리 잘 된 것 아닙니까?"

관리관이 조심스럽게 묻자 모리하루가 끄덕이며 말했다.

"일본이 쪼개지고 약해지는 것이니 계응국으로서는 호재지만 교역에서는 불리하네. 일본은 땅이 길고 산이 많아 길이 얼마 없지 않은가. 이곳 교역항에서 거래된 물건들이 관동으로 간다 치면 우선 무라카미 놈들이 장악한 해역을 지나 나니와와 미야코에 풀리고, 다시 거기서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긴 교역로를 타고 관동으로 옮겨가는 수밖에 없지."

"각지에서 내전이 터지면서 그 교역로가 다 끊기게 되었군요."

"그렇다네. 조금 전 자네가 말한 것처럼 영주들이 해적질을 조장하거나 직접 해적질을 하는 상황이 전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테니까."

"조선제 사치품을 사가서 불만을 달래는 하사품으로 쓰던 쇼군도 죽고 없는 데다가, 사방에서 내전이 일어나는 긴박한 상황이니 다들 교역을 할 상황도 아니겠습니다."

"맞아. 게다가 지금까지는 거래를 쇼군이 독점적으로 하다시피 했으니, 지금 거병한 이들은 교역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감을 못 잡고 있을 걸세. 이리될 것을 내가 예측했어야 하는데……."

심각해진 표정의 모리하루에게 관리관이 힘내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이 상황이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이야 전국에서 거의 동시에 내전이 터졌으니 교역로가 모두 마비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일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져 교역로가 끊기더라도 다른 길로 우회하면 되고, 혼란이 정리된 것이지 난세가 끝난 것은 아니니 다들 다른 영주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역을 해 세력을 키우고자 할 것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초기의 혼란이 끝난 이후 본격적인 전국시대에 접어들면 일어났던 일이니만큼 관리관의 예측은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리하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교역이 줄더라도 버티다 보면 자네 말처럼 되겠지. 특히 우리의 주 교역품인 면포는 오래 보관한다고 쉽게 상하는 물건도 아니고, 대군께서 도움을 주셔서 은광을 개발해두었으니 버티는 동안 식량이나 다른 물자가 부족해지더라도 은으로 대금을 치르고 칠주도에서 사 오면 돼.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다른 위험이 생기네."

"위험이라니요?"

"지금은 교역이 중심이고 은광은 보조일세. 그런데 교역이 줄어들고 은을 채굴해서 버티면 은광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지지 않겠는가."

"그렇지요."

"그런데 조선과의 독점 교역은 오우치 가문에 묶인 것이라 다른 자들이 가져갈 수 없지만, 은은 은광만 뺏는다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 이런 상황에서 교역이 쇠퇴한다면 호족 중에 누군가가 우리를 몰아내고 은광을 손에 넣으려 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관리관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래도 호족들 대다수는 주군을 향한 충심이 깊은 이들입니다. 게다가 그런 짓을 한다면 조선의 봉신을 해친 것이니, 훗날 교역이 정상화 되더라도 조선과 교역을 못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조선에게 응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 점령당해 우리 땅이 된 이와미와 아키 지역 호족들도 오우치 가문에 충심이 깊지는 않겠지. 또 우리가 조선의 봉신이지만 일본의 슈고이기도 하니 조선 역시 응징 명분으로 쉽게 개입하기 어려워."

"그것은 그렇겠군요."

"거기다가 우리가 사라지고 나면 조선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몰아낸 이들과 교역을 하게 될지 모르네. 만일 조선에서 오우치 가문이 아닌 자와는 교역을 하지 않겠다면서 새로운 세력과 교역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어차피 쇠퇴하던 교역 대신 은광을 노리던 것이었으니 은을 캐어 돈을 벌면 그만일세."

"그러면 버티다 보면 교역이 회복될 것임을 호족들에게도 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더 위험한 일일세. 우리의 주 수입원이 줄어들었다는 소리를 우리 입으로 하는 것 아닌가. 약해졌으니 노려 달라는 소리와 다를 게 없지. 게다가 교역이 회복되어 다시 번성하더라도 어차피 자기 손에 들어올 이익이 마땅히 없는 호족들이라면, 우리가 약해진 팀을 타 몰아내고 은광을 얻는 게 차라리 더 이익일 수 있어."

"이거 큰일이로군요."

"어쩔 수 있겠나. 그나마 대군께서 은광을 개발해 주신 덕에 교역이 줄더라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니, 위험을 감수하고 최대한 호족들을 관리하면서 교역이 회복될 때까지 견뎌 봐야지."

모리하루는 양녕에게 감사해하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의 이 위기는 양녕의 의도대로였다. 오우치 가문에게 조선과의 교역 독점권을 주어 번성할 수 있게 했지만, 실상은 조선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제구조로 만들면서 체급을 과하게 키워 조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무너져버리게 만든 것이었다.

은광을 개발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은광이 없다면 교역이 줄어드는 것에 맞춰 호족들과 협력해 경제구조를 바꾸려 시도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은광이 개발된 이상 모든 호족들은 오우치 가문의 교역이 쇠퇴하는 순간 은광을 노리러 달려들 잠재적 위협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양녕의 다음 수가 나올 차례였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관리소 문밖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관리관은 모리하루를 보았다. 모리하루가 괜찮다고 끄덕이자 관리관이 말했다.

"들어오게."

장지문을 열고 들어온 교역항 관리원이 모리하루와 관리관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인사를 받은 관리관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 큰 배가 몇 척 입항했습니다."

"배가? 요즘 상황에 나니와에서 교역선이 오면 좋은 일이긴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입항한 걸로 보고를 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나니와에서 온 게 아니라 조선에서 온 배입니다."

그 말에 모리하루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군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신 모양이군. 어서 가 보세."

* * *

잠시 후.

교역항 부두.

부두에 나와 본 모리하루와 관리관은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양녕이 아니라 처음 보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척동상단 대방 한명회라 합니다."

"안녕하시오. 오우치 가문 가독 보좌 오우치 모리하루라 하오."

엉겁결에 따라 인사한 모리하루에게 한명회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침 보좌께서 교역항에 와 계셨군요.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와 계셨던 겁니까? 표정이 꼭 무슨 문제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아, 그런 것은 아니외다. 그저 지금까지 우리가 직접 칠주도에 배를 보내서만 조선과 교역해 왔었고, 여기에 직접 조선의 배가 오는 것은 양녕대군께서 오실 때뿐이었어서 대군께서 오신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조금 당황했을 뿐이오. 그나저나 공을 뵙는 것도 처음이지만 척동상단이라는 것을 듣는 것도 처음인데, 혹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말해 줄 수 있소?"

"물론입니다. 애초에 오늘 척동상단 대방으로서 첫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한 한명회는 모리하루와 관리관에게 척동상단의 설립 경위와 사업 내용을, 외부에 공개해도 되는 범위 내에서 설명했다.

그렇게 한참 이어진 설명을 들은 모리하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된 것이구려. 그런데 설마 인사하는 것 때문에 대방께서 이렇게 큰 배 여러 척을 직접 이끌고 오신 것이오?"

"아닙니다. 인사와는 별개로 용건이 있어서 배들을 끌고 왔습니다."

"무엇이오?"

한명회는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서 말했다.

"예. 지금 일본 내에서의 교역에 어려움을 겪고 계시지요?"

그 말에 모리하루가 화들짝 놀랐다. 교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조선 조정에 도움을 요청할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오우치 가문이 교역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독점 교역권을 잃을까 걱정되어 최대한 어떻게든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몇 달을 끙끙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조금 전 척동상단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든 생각이지만, 설마 조선에서 상단을 만들어 일본과 직접 교역하려는 것인가.'

침을 꿀꺽 삼킨 모리하루가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그렇소. 어떻게 아셨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