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64화
164화
1430년 2월 중순 모일.
미야코 동북부. 라이고인.
히에이산의 한적한 산기슭에 있는 천태종 사원인 라이고인의 승방 툇마루에는 젊은 승려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승려의 법명은 기쇼. 지난해 사망한 쇼군 요시모치의 이복동생이자, 후계자 제비뽑기의 후보 네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고 미카도까지 사망한 뒤로 미야코의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조정의 지시로 이곳 라이고인에 반쯤 격리되다시피한 지 몇 달째였다.
"여기 계셨군요."
기쇼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시커먼 갑옷을 차려입은 사내 십수 명이 승방 건물 뒤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내들은 기쇼가 앉아 있던 툇마루 앞 자갈 정원에 줄을 맞추어 서더니, 가장 앞에 있던 장신의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와 기쇼에게 말했다.
"제 이름은 아카마츠 노리시게. 스님을 모시러 온 사람입니다."
그 말에 기쇼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모시러 오다니 무슨 소리요. 나는 조정의 지시로 여기에 와 있소. 그런데 나를 데리러 왔다면서 조정의 사람이 아니라 무사들만이 온 것을 어찌 믿겠소.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여기 들어온 게요?"
"조정의 명 없이 모시러 왔으니 당연히 조정의 사람은 없습니다. 오는 것 역시 조정의 눈을 피해 히에이산을 타고 왔습니다. 계림도가 화려하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을 본떠서, 갑옷도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모두 떼고 천 부분에 검은 물을 들이니 눈에 잘 띄지 않아 좋더군요."
허리춤에 찬 계림도를 툭툭 치며 그렇게 말한 노리시게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던 기쇼가 말했다.
"그래서 대체 무사들께서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나를 데리러 오신 것이오?"
"이미 짐작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스님을 다음 쇼군으로 옹립하고자 온 것입니다."
"나는 출가자요. 그것도 일곱 살 때 출가했으니 쇼군으로 오르기 위한 자격이 되는 관직도 없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슈고와 호족들 같은 영주들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내가 어찌 그 높은 자리에 오르겠소."
"그것은 스님의 형제인 다른 세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들도 모두 출가자시지 않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후보였던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오. 법랍이야 내가 조금 많지만 환속하여 쇼군이 되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지 않소. 그런데 왜 그분들을 두고 막내인 나에게 온단 말이오?"
노리시게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마 지금쯤 다른 형제분들께도 각각 옹립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찾아갔을 것입니다. 저희는 네 후보 중에서 스님을 옹립하고자 하기에 여기에 온 것이지요. 왜 막내이신 스님을 옹립하고자 하냐면……."
자신 뒤에 줄 맞춰 서 있는, 저마다 야심으로 눈을 빛내는 무사들의 얼굴을 돌아본 노리시게가 다시 기쇼를 보고 말했다.
"저희도 모두 막내거나, 막내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단지 막내라는 이유 때문에 발휘하지 못하던 저희 능력만큼의 몫을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도 그리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쇼가 어릴 때 출가해 세속의 일에 어두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예 세상 소식에 깜깜하거나 보는 눈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북조의 긴 내전이 끝나고 승자들은 많은 영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자식들에게 골고루 영지를 분할해 상속하여 후대의 다툼을 막았다.
'하지만 영지를 나누면 나눌수록 약해질 뿐만 아니라, 애초에 땅을 무한정 나눌 수도 없다. 결국 어느 시점이 되면 더 이상 분할해서 상속하면 위험해지는 순간이 오면 자식 한 명에게 몰아 주어 약화를 막게 되지. 상속받게 되는 것은 대부분 장남이고, 나머지 아들들은 장남을 보좌하게 되거나 아예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일찌감치 출가 당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능력만큼의 몫을 스스로 쟁취한다. 매우 좋은 말이긴 하지만 결국 나를 옹립해 쇼군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 그대들도 권력자로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자 하는 것 아니오?"
기쇼는 대놓고 말했지만 노리시게는 시원하게 긍정해 버렸다.
"맞습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다른 형제를 위해서만 쓰거나, 아니면 살기 위해서 능력을 감추거나, 아예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출가해야 하는 막내의 처지인 것은 스님도 저희와 같지 않으십니까? 그런 막내끼리 천하의 권력을 쟁취하여 나누어 가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의 무력과 스님의 명분을 기반으로 삼아서 말입니다."
"명분이라고 하나 미약한 것이오.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받아들일 겁니다. 이것은 천하의 흐름입니다."
"천하의 흐름?"
"예. 쇼군이 제안하고 미카도가 뽑았던 후계자 제비는 먹물이 번져서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이건, 하치만 신께서 선택을 거부하신 것이건 간에 쇼군과 미카도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천하의 권위는 다 조정에서 나오던 것이었습니다."
"그건 알고 있소. 각 가문의 가독 후계자도, 슈고 계승자도 결국 조정의 인정을 받아 정해지던 것이니까. 아, 설마……."
기쇼가 뭔가 알아차린 듯한 모습에 노리시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승인해 줄 쇼군의 자리는 비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노리는 것처럼 네 후보 가운데 한 분을 쇼군으로 옹립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그 공로로 승인을 받을 수 있겠지요. 거기에 출신은 상관없습니다. 서자 출신 막내라도, 먼 방계 출신이라도, 심지어 슈고 밑에서 일하던 호족이라도 쇼군을 옹립하는 데에 기여할 능력만 있으면 가독이 되고 슈고가 될 수 있지요."
"그걸 천하의 흐름이라고 할 정도라면 전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요?"
"그렇습니다. 네 후보 중 누구를 쇼군으로 추대할 것인지를 두고 내전이 터진 가문이 한둘이 아니지요. 표면적으로는 적합한 사람을 쇼군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의견 다툼이지만 실상은 각 가문 계승 대상자 간의 권력 싸움입니다. 그리고 쇼군을 옹립해 권력을 얻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지만 다른 이유로 내전이 일어난 곳도 있습니다."
노리시게가 말하지 않았지만 기쇼 또한 그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야마나 가문이겠소."
"맞습니다. 오우치 가문에 패배해 영지를 빼앗기면서 누구 책임인지를 두고 가문 안에서 싸움이 났지요. 원래대로라면 쇼군이 중재했겠지만, 쇼군 자리가 비어 있으니 결판이 날 때까지 내전이 이어질 겁니다. 관동 지역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심하다는 소문입니다."
"관동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게요?"
"관동부 장관이 제비가 번진 것은 하치만 신께서 네 후보 다 부적격자로 여기셨기 때문이라면서, 자신이 미야코로 군사를 몰고 가 소란을 진압하고 쇼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니다. 쇼군가의 가까운 방계 출신인 데다가 호칭도 쇼군과 같은 쿠보니까 할 수 있는 주장이지요."
관동부 장관이 후보자 옹립도 아니고 아예 찬탈에 가까운 일을 꾸미고 있다는 그 말에 기쇼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노리시게가 바로 이어서 말했다.
"물론 실제로는 군사를 일으켜서 이쪽으로 오지는 못했습니다. 관동부 장관 보좌이자 실세인 우에스기 가문 안에서 그걸 두고 의견이 분분히 갈린 끝에 내전이 일어나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역시 표면적으로는 장관을 쇼군으로 옹립해야 한다, 조정에 거스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를 두고 싸우고 있지만, 실상은 그걸 명분으로 삼은 권력 쟁탈전이지요."
"중재할 사람은 아예 없소?"
"쇼코인(전 미카도)께서 승하하신 뒤로 계속 공석인 미카도 자리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예. 없습니다. 쇼군이 옹립되더라도 미카도의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쇼군으로서의 명분이 생길 것이니, 당연히 누가 미카도가 될 것인지 역시 권력 싸움의 대상이 되지요. 이런 상황이니 치천(상황)께서도 다음 미카도를 지목하실 수 없습니다. 직면한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또 있소?"
질린다는 표정으로 묻는 기쇼의 질문에 노리시게가 끄덕이고 대답했다.
"이 모든 게 무사들이 멋대로 정무를 보면서 미카도와 공경귀족들을 무시한 탓에 신벌이 내린 것이니, 무사들을 모두 복속시키고 미카도께 통치권을 되돌려드려야 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력은 가장 약하지만 명분으로는 이들을 따를 자가 없긴 하지요."
"그 혼란한 세속의 일에 나도 끼어들라는 것이오?"
그렇게 말하고 기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기쇼의 등 뒤인 승방 안쪽에서 화려한 가사를 두른 승려가 한 사람 걸어 나왔다.
"아, 주지스님. 이 사람들이 온 것을 아셨습니까? 조정의 허가 없이 들여보냈다가 괜히 여기에 피해라도……."
라이고인 주지를 돌아보며 말하던 기쇼가 말을 흐렸다. 주지는 비단에 받친 계림도 한 자루를 들고 있었고, 뒤를 따라온 다른 승려들도 저마다 무언가 하나씩 들고 있었다. 기쇼의 옆에 앉은 주지가 계림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주로 들어왔던 계림도입니다. 받으시지요."
"주지스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사들이 와서 스님을 모셔갔는데 여기가 멀쩡하면 저희가 조정의 지시를 무시하고 이 무사분들과 내통했다는 추궁을 받지 않겠습니까? 이곳 라이고인에 보관하고 있던 금은으로 된 패물과 비단, 조선제 면포를 들고 가실 수 있을 정도로 가져왔습니다. 이것을 가져가 군자금으로 쓰시고, 저희는 무사들이 스님을 억지로 데려가면서 이것들도 빼앗긴 것이라 하여 추궁을 피하겠습니다."
기쇼가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주지스님께서도 저더러 환속하여 속세의 일로 손을 더럽히라 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난세입니다. 누군가 손에 피를 묻히며 이 난세를 빨리 끝내지 않는다면 더 많은 중생들이 괴로워하겠지요."
"모자란 나에게 어찌 난세를 끝낼 수 있는 재주가 있다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내가 후보에서 물러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의 추대를 받으며 형님들과 쇼군의 자리를 두고 다투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난세를 더 어지럽게 하는 일 아닙니까."
"반대로 난세를 끝낼 재주가 없다 확인된 것도 아닙니다. 또 다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것을 스님께서 결정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님께서 환속하지 않으시더라도 후보자로서 가지고 계신 명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그 명분을 위협으로 여기는 이들은 스님의 목숨을 노릴 것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목숨을 잃으신다고 해서 난세가 빨리 끝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주지의 말이 끝났지만 기쇼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짧은 고요 속에서 다들 말없이 기다리는데 별안간 기쇼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으하하하하!"
당황한 승려들과 무사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고 그렇게 한참을 웃은 기쇼가 드디어 웃음을 멈추고는, 무언가 소란이 났는지 시커먼 연기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미야코 방향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법랍도 십 년을 넘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염주와 발우뿐이었던지라 욕심을 버리고자 애쓰며 살아왔는데, 앞일이란 게 알 수 없는 법인지라 이런 때도 오는구나."
그렇게 말한 기쇼는 고개를 내려 노리시게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그대의 말을 믿고 천하를 노려보겠다. 필요하다면 내가 가진 명분과 권위는 얼마든 빌려줄 것이니, 나에게 기대하게 한 만큼의 성과를 내어야 할 것이야."
그 말에 노리시게가 놀라 기쇼를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젊은 비구가 아닌, 야심 가득한 청년의 얼굴을 한 기쇼를 보고 노리시게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주군."
노리시게의 대답에 흡족하게 웃은 기쇼는 이번에는 주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스님께서 주신 계림도를 비롯한 다른 것들은 내 유용하게 잘 쓰겠소. 그리고 내가 천하를 손에 넣는다면 오늘의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오."
주지 역시 그 말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주신다면야 소승은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지의 대답까지 들은 기쇼는 계림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좋다. 그럼 천하의 주인이 되려 가 보자."
원래 역사보다도 앞당겨진, 기나긴 난세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