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62화
162화
1429년 10월 중순 모일.
한성부. 흥인문 인근.
"대사공께서 직접 와서 살피시는 걸 보니, 이번 일이 확실히 중요하긴 한가 보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옆을 돌아본 공조판서 이천은,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양녕을 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대군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마침 일이 있어서 나온 김에 와 보았소."
그렇게 대답한 양녕은 이천 옆에 나란히 서서 공사 현장을 같이 보았다.
널찍한 공터에는 새롭게 만들어진 척동상단이 쓰게 될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내탕금과 국고가 들어가긴 했으나 일단은 민간 상단인 척동상단의 건물을 짓는 현장에, 그것도 이조나 호조 관원도 아니고 공조판서인 이천이 직접 와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점석회를 성벽이나 항구를 짓는 데에는 많이 썼지만 건물 짓는 데에 쓰는 건 처음인지라,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공사가 시작된 뒤로는 여기로 등청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아마 별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대사공께서 조금만 더 신경써 주시오. 이번 건축이 성공한다면 장차 다른 건물을 짓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물론입니다."
척동상단 건물을 점석회로 짓게 된 것은 이도의 뜻이었고, 그 돈 역시 내탕금에서 나왔다.
이도는 기술 개발을 겸해서 척동상단 건물을 하사할 테니 초기 비용을 줄인 만큼 종잣돈을 유용하게 쓰라는 뜻이라고 말하며 지시했지만, 실제 속내는 따로 있었다.
'내탕금을 나라를 위해서 써주기도 할 테니 척동상단에 고본으로 투자해서 내탕금을 불리는 것도 얌전히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토 달지 말라는 뜻이지.'
이유야 어찌되었건 척동상단 건물은 잘 지어지고 있었다. 점석회로 건물을 짓는 첫 시도인지라 벽의 두께 자체도 여유 있게 잡았을 뿐만 아니라, 양녕의 조언으로 문과 창문의 아치 구조, 버팀벽과 벽기둥 등의 구조적 요소를 도입했고, 한성부 일대에서 모아들인 품질 낮은 말총을 섞어 점석회 자체의 강도도 보강했으니 큰 문제가 생길 구석이 애초에 별로 없었다.
"사실 이 건물에서 걱정되는 건 점석회 벽이 아닌 다른 부분입니다. 그래서 조만간 대군께 도움을 구하러 갈 생각이었지요."
이천의 말에 양녕이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마침 잘 온 것이로군. 어떤 부분이오?"
"벽과 기초야 점석회로 만들지만, 아래층 천장이자 위층 바닥이 될 부분과 지붕은 기존의 방식대로 만들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소."
"바닥 겸 천장이야 어차피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마루를 짜듯 만들 것이니 크게 걱정할 게 없다 쳐도 지붕이 문제입니다. 들보나 도리 같은 큰 목재를 높이 올리는 것은 거중기나 녹로를 쓰면 된다 치더라도 그 위에 또 흙과 기와까지 올리면 무게가 엄청 늘겠지요. 기존의 나무 기둥은 그 성질이 질긴 것이니 무거운 지붕을 받치면서도 기울거나 돌아갈지언정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점석회는 그 성질이 단단한 것이니 지붕 무게에 자칫 깨지거나 무너질까 염려됩니다."
이천의 우려는 정확한 것이었다. 여름이면 찌고 겨울이면 얼어붙는 혹독한 기후를 버티기 위해서 조선 건축의 지붕은 두껍게 흙을 쌓아 단열층을 만들었고, 당연히 그 무게도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상대적으로 추위에서 자유로운 일본 건축은 지붕을 가볍고 높게 만들어서 한국보다 잦은 눈과 비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지만, 홋카이도 지역을 식민화할 때는 그 추위를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었지. 만일 점석회 벽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겠다고 어설프게 지붕을 가볍고 얇게 만들었다가는 그것처럼 도저히 겨울에 사람이 지낼 수 없는 건물이 나오고 말 것이다.'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되겠소. 혹시 이미 천장 겸 바닥과 지붕에 쓸 목재를 구해 두었소?"
"아직입니다. 아직 벽을 만드는 중이라 약간 시간 여유가 있으니 대군께 도움을 구하고 나서 조달할 생각이었습니다."
"다행이오. 내 해결책을 한 번 생각해 보고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주도록 하겠소."
그 말에 이천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한시름 덜게 된 이천은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척동상단이 중요한 건물이고 가까이서 관리할 필요가 있으니 한성부에 짓는 것이겠지만, 실제로 물류가 오가는 동쪽 바다에서는 너무 멀리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건 괜찮소. 여기는 척동상단 본부가 될 것이고, 대마도에 지부를 하나 더 만들 것이오. 아무래도 척동상단 자체가 대마군 주민들의 해운업을 흡수해 만들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미 기반이 다져 있는 대마군에도 거점을 하나 만드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테니 말이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이거야 원 기계에 축성에 온갖 일로 바쁘다 보니 척동상단 건물을 지으면서도 척동상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알기가 어렵군요."
"중요한 일로 바쁘시니 다른 지역 소식을 잘 듣기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소."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 양녕은 길어지기 시작한 자기 그림자를 슬쩍 내려다보고 이어서 말했다.
"이제 슬슬 내 오늘 용무를 보러 가야겠는데, 가기 전에 대사공께 내가 얼마 전 들은 다른 지역 소식 하나 알려 드리고 갈까 하오."
"오, 감사합니다. 어떤 소식입니까?"
"공납을 폐지하고 대동세로 대체한 뒤로 제법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궁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은 상인을 통하거나 장인에게서 직접 사들이는 것도 정착이 되었소. 그런데 모든 물건을 한성부 근처에서 구할 수가 없지 않소?"
"예. 멀리서만 나는 물건도 많은데, 그런 것을 백성들이 한성부까지 자기들 힘으로만 옮겨오기 힘들다는 것도 공납을 폐지한 이유 중 하나였지요."
"그래서 상인들을 시켜 멀리까지 가서 살펴보고 다니며 적합한 물건을 사 오라고 지시하되 증서를 남기게 했소."
"어떤 증서입니까?"
"조정의 지시로 상인 아무개가 어디 사는 아무개에게서 어느 품목을 얼마를 주고 샀다 하는 증서요. 똑같은 것 세 장을 만들고 세 장 전부에 판매자와 상인의 손도장이나 수결까지 찍소. 그다음 판매자와 상인이 한 장씩 가지고 남은 한 장은 물건과 함께 조정에 제출하는 것이지."
"그러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 잘못인지 파악하기 좋겠군요. 반대로 좋은 물건이 있으면 다음번에도 같은 사람에게서 구해올 수 있고 말입니다."
"그렇소. 그런데 판매자들이 그 증서 자체를 장사에 써먹는 모양이오."
"증서를 장사에 쓰다니요?"
"내가 파는 이 물건이 나라님도 사가서 쓰실 만큼 좋은 물건이오, 하는 의미로 쓴다 하오. 상인들은 들고 다니면서 보여 주고, 장인들은 족자처럼 만들어서 공방에 걸어 놓곤 한다는군."
그 말에 이천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정말 장사수완이 대단합니다."
"그러게 말이외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해결책은 정리되는 대로 여기로 가져오겠소이다."
"감사합니다, 대군. 그럼 살펴 가십시오."
이천의 인사를 받으며 양녕은 공사 현장을 떠났다.
* * *
잠시 후.
한성부. 피마길 주점.
주점 입구로 다가간 양녕은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내의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내가 찾던 사람이 와 있는가?"
"예. 오늘도 이놈을 켜자마자 찾아왔습니다. 3층 창가에 옥색 옷 입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겉에 술 주 자를 쓴 종이등, 즉 주점이 장사 중임을 알리는 불 켜진 등이 높은 장대 위에 걸려 있었다.
"그렇군. 알겠네. 그럼 나는 바로 올라갈 테니 내가 전에 맡긴 것을 가지고 올라와 주게나."
"예, 대군마님."
사내의 인사를 받으며 양녕은 주점 입구에 걸린 푸른 포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계단을 걸어 3층까지 올라가자 과연 창가에 옥색 옷을 입고 앉은 청년이 있었다.
술병과 술잔을 앞에 두고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양녕은 그대로 다가가서 탁자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밖에 뭐 재밌는 거라도 있는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청년이 눈을 크게 뜨고 양녕을 보았다. 난데없이 앞자리에 앉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입은 옷과 분위기에서 예사 사람이 아님을 느낀 청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 십니까?"
"양녕대군이라 하네."
그 말에 청년이 화들짝 놀랐다.
"대, 대군께서 어찌 이런 곳에……."
"폐세자까지 된 한성부 제일가는 난봉꾼이 한성부 술집에 오는 데 뭐 이상할 거라도 있는가?"
양녕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청년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여기가 대군께서 즐겨 앉으시던 자리인 겁니까? 그럼 당장 비키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청년을 손짓으로 앉히며 양녕이 말했다.
"아닐세. 앉게.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라 자네를 만나러 온 것이야."
"저를 말씀입니까?"
"그렇네. 자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네. 올해 치러진 과거시험 발표가 끝나자마자 매일같이 여기 낙방루에 얼굴을 내민다고 들어서 말이야."
그 말에 청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낙방루는 이곳의 별명이었다. 경치가 좋으면서도 과거 시험장만은 다른 건물에 절묘하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는 탓에, 합격자 발표가 나면 낙방한 응시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기로 유명해져서 붙은 별명이었다.
"맞습니다.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종이에 몇 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그나마도 뭐라고 썼는지도 기억 안 날 정도로 횡설수설 써서 냈으니 당연히 낙방하지요. 차마 맨정신에 집에 들어가기 민망해서 계속 이리 술을 마시러 옵니다."
거기까지 말하던 청년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합격한 것도 아니고 낙방한 저를, 그리고 이 술집에 오는 수많은 낙방한 이들 중에서 저를 어찌 아시고, 또 어떤 연유로 수소문까지 해서 찾아오신 겁니까?"
"자네의 재능을 쓰고자 해서 찾았네."
"예? 저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인 데다가 과거에도 떨어졌고 다른 일을 했던 적도 없습니다. 심지어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닌데 저도 있는지 모르겠는 제 재능을 대군께서 어찌 아시고……."
말하는 내용과는 딴판으로, 양녕이 자신의 재능을 쓴다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멍하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 청년을 보고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래서 말인데."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된 양녕은 청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나하고 일 하나 합세. 자네에게 꼭 맞는 일이 하나 있어."
"일이라 하시면?"
"척동상단이라고 들어 보았는가?"
"예. 국고만이 아니라 내탕금에서도 종잣돈을 댄 큰 상단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그 척동상단 높은 자리에 자네를 추천하고자 해서 말이야."
그 말에 청년의 눈빛이 달라졌다.
"해동의 오 태백이신 대군께서 저를 추천하신다고 하면 정말로 저에게 꼭 맞는 일이 있는 것이겠지요. 어떤 자리입니까?"
"하하하, 이제 좀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통성명부터 마무리 짓는 게 어떻겠는가?"
그제야 양녕이 자기를 알고 찾아왔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아직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청년이 멋쩍은, 하지만 기대와 야심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한명회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