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61화
161화
양녕의 말에 조말생은 떠오른 것이 있는 듯 말했다.
"이전에 명나라에게 보내는 조공 품목에서 금은을 제외하는 계획을 세우실 때, 금은이 조공 품목에 들어 있어서 바치는 것과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셨지요. 그리고 제외가 되고 나면 그 차이를 더 키울 것이라고 하셨고 말입니다. 자발적으로 바치게 된 것이 조선이 금은을 돈으로 쓸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는 차이를 만든 것이니, 더 크게 만드시려는 차이 역시 금은과 관련된 것인 듯합니다."
"정확하오. 이제 동전에 더해서 금은 역시 돈으로서 조선 각지를 돌며 물산을 통하게 만들 것이오. 그렇게 사방의 물건들이 잘 통해야 조선의 부도 더 커질 것이고 말이오. 그런데 지금 생산되는 물건이나 돈은 늘어나고 있는데 운송이 따라가질 못하고 있소."
호조판서 안순이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맞습니다. 전국 각지에 대군께서 만드신 새 기법으로 도로가 깔리고 있고, 미곡과 포목 말고 동전으로도 세금을 조금씩 거두기 시작하면서 물자가 오가는 데에 여유가 조금 생길까 했으나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오가는 물자의 양이 급격히 늘었지요."
"많은 양을 빠르게 옮겨야 하다 보니 특히나 해운의 수요가 늘었고 말이오. 그런데 지금 해운의 대다수는 대마군 주민들에게 의존하고 있소. 이것이 당초 계획된 것이 아니라 칠주도 정벌과 삼척부 개발, 동북면 개척 등을 거치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라는 게 문제점이오. 대마군의 힘만으로 모든 해운을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지."
"상인들이 찻잎이나 소금을 옮기는 것이면 몰라도, 각지 목장의 말을 옮기는 것이나 동북면으로 점석회와 군량을 수송하는 것은 차질이 생기면 안 됩니다. 그 품목들을 배로 나르는 것만이라도 나라에서 가져와 관리한다면 대마군 주민들도 여유가 좀 생기지 않겠습니까?"
병조판서 황상의 말에 안순이 어렵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김해군에서 철을 생산하기 위한 소석탄을 석주부에서 싣고 오는 것 다음으로 대마군 주민들의 해운업에서 비중이 큰 것이 바로 점석회 수송이오. 그들의 생업을 나라에서 빼앗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소. 게다가 설령 가져온다 하더라도 조정에 해운에 익숙한 이가 많이 없으니 잘 돌아갈지 장담할 수 없소이다."
두 판서의 대화를 듣던 양녕이 말했다.
"오늘 내가 가져온 방책이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 나라에서 관리하면서도 생업을 빼앗지 않고, 해운에 익숙한 관료가 얼마 없더라도 잘 돌아갈 수 있소."
선문답 같은 그 말에 집중되는 시선을 받으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바로 나라에서 돈을 내어 상단을 만드는 것이오.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물건을 배로 옮겨주는 것을 주력으로 삼는 상단이오. 그 상단에 대마군 주민들을 직원으로 고용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배를 사들여서 쓰면 되오. 그럼 대마군의 해운업을 통째로 가져와 나라에서 관리하면서도 생업을 잃는 이도 없고 관리도 잘 될 것이오."
안순이 양녕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괜찮은 방법이오나 그렇게 통째로 해운업을 가져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목장의 말이나 점석회, 군량을 맡아서 운반하는 주민들만 고용하고 그들이 쓰는 배만 사들여서 상단을 만들거나 관청을 만들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만일 국방의 중요한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리 해도 괜찮을 것이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건 조선의 부를 더 키우고 활용하기 위한 것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라에서 돈을 내어 만든 상단이 돈을 벌면 당연히 그 수익의 일부는 나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오. 세금을 걷지 않고도 국고를 채우는 셈이오. 게다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도 아니고, 해운으로 물건을 옮겨주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번 정당한 돈이니 문제될 것도 없소."
양녕의 설명을 들은 허조가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말했다.
"만약 관청을 만들어 그런 일을 하고 돈을 번다면 꼭 나라에서 벼슬아치들을 써서 장사를 하는 모양새가 되니 문제가 되겠으나, 이건 상단에 돈을 댄 것이니 괜찮겠군요."
"그런데 통째로 가져온다면 예산도 문제가 됩니다. 이미 지금 여러 세금 제도를 시험하면서 백성들 피해가 적도록 세율을 전반적으로 낮춰놓은 상태입니다. 거기다 동북면 개척에도 꾸준히 돈이 들어가지요. 쓸 수 있는 예산을 최대한 긁어모으더라도 아마 대마군 주민들을 고용하고 배를 사는 시점에서 바로 바닥을 보일 것입니다."
"이런, 그럼 결국 늘어난 해운 수요 감당은 안 되겠소. 게다가 그렇게 빠듯하게 굴리면 국고로 수익이 들어오는 것도 기대하기 어렵겠고 말이오."
부정적인 의견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양녕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종잣돈을 늘리면 괜찮소. 그걸로 대마군의 해운업을 통째로 사들인 다음 배도 더 만들고 직원도 더 고용하고 시설도 짓는 것이오. 그러면 늘어난 해운 수요도 감당되고, 규모가 커지니 여러 이점도 있소."
"규모가 커지면 건당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으니 수익을 늘리거나 이용료를 낮출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면 괜찮겠습니다만 이번에는 종잣돈을 어디서 구할지가 문제 아닙니까?"
"단독으론 힘들더라도 여러 사람의 돈을 합치면 충분하지 않겠소?"
"아! 국부론에 쓰셨던 고본제라는 것이로군요!"
고본이란 원래 역사에서 훗날 주식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바로 그것이었다.
"맞소."
안순이 고본제라는 말을 꺼내자, 다른 중신들이 한참 기억을 더듬더니 이내 하나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양녕이 쓴웃음을 지었다.
'주식이란 에도 시대 만들어진 카부시키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한국식으로 읽은, 그것도 애초에 상인조합이라는 뜻의 카부나카마에서 나온 것인지라 직관적이지 않다. 대신 원래 역사에서 훗날 주식이라는 말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에서 널리 쓰인 고본이라는 말을 가져오긴 했으나, 어차피 기존에 없던 개념인 것은 피차 다를 게 없으니 다들 바로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그런데 고본제를 써서 상단을 만들더라도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부유한 백성 한 사람이 많은 고본을 가진다면 상단 운영에도 영향력이 생길 것입니다. 나라에서도 돈을 냈고 그 액수도 클 테니 어느 이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지요. 만일 그걸 막고자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고본의 비율을 제한한다면 종잣돈을 모으기 힘들 것이고 말입니다."
그때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이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굳이 제한할 것 없소. 백성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온다 한들, 내수소에서 관리하는 내탕금에 비하면 얼마 안 되지 않겠소?"
내탕금 얘기가 나오자 안순은 물론이고 이조판서 권진도 눈을 크게 떴다.
내탕금은 이성계가 개국 전부터 가지고 있던 개인 재산에서 기원한 왕실 소유의 재산이었다. 건국 초에는 왕실 재산을 전부 국고에 편입시키고 왕실에 필요한 물건은 주례 천관편을 따라 이조에서 마련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걸 추진하던 게 하필 정도전이라서 그가 아바마마 손에 죽고 난 다음 계획이 멈췄고, 아바마마께서 왕실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시면서 내탕금으로 굳어졌지.'
대신 이조에 내수별좌라는 자리를 만들어 관리하게 했고, 이도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내수소라는 관청을 만들어 전담시켰다. 물론 내탕금을 국고에 편입시킨 것은 아니고, 오히려 형식상으로나마 왕실 자금을 이조에서 관리하는 모양새를 만들어 주례 천관편을 따랐다는 명분까지 굳혀 버리려는 이도의 전략이었다.
"내탕금이 들어간다면 그 액수가 결코 적지 않으니 백성들이 아무리 많은 종자돈을 댄다 하더라도 영향력 있는 고본 비율을 가질 수가 없겠지요."
안순이 머뭇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랏돈이 아니라 왕실의 돈인지라 불교 행사 등에 쓰더라도 신하들이 제대로 막을 수 없던 것이 내탕금이다. 게다가 지금은 양녕이 자리를 만들고 이도가 내탕금 얘기를 꺼낸 것을 보면 이미 둘 사이에서는 계획이 다 짜여있는 것이 분명했고, 내탕금을 투자하는 명분까지 확실했으니 막을 이유도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내탕금이 들어가 액수가 커진 종자돈을 굴린다면 내탕금 없이 굴린 것보다 수익도 커질 것이고, 당연히 국고로 들어오는 배당금도 늘어난다. 이전의 내탕금은 그저 왕실에서 알아서 재산을 관리하고 불리는 데에 그쳤지만, 이렇게 고본으로 투자해 굴리면 내탕금이 국고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니 사실상 불가능한 내탕금 국고 편입을 제외하면 이만한 차선책도 없지.'
내탕금을 불려 주게 된다는 점이 중신들에게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듯했으나, 양녕의 생각대로 결국 다들 차선책임을 인정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럼 종잣돈은 고본제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누가 관리할지를 정해야 할 듯합니다. 기존의 대마군 주민들만으로 운영하게 하면 나라의 관리가 미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황희의 말을 이어 안순과 권진도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국고가 들어갔다 해서 호조에서 사람을 보내 관리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호조가 이미 세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전부 관리하고 있는데, 여기에 내탕금과 국고를 종잣돈으로 삼은 큰 상단까지 관리한다면 너무 권한이 커집니다."
"하지만 내탕금이 들어갔다고 내수소에 맡기는 것도 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내수소의 유일한 관원인 내수별좌 한 사람이 모든 내탕금을 관리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지라 실제로는 임금이 내관들을 통해 관리했다. 그런데 그것은 왕실 소유의 토지나 건물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따로따로 내관을 보내 관리하게 할 수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고, 지금처럼 상단 한 곳에 큰돈이 모여 있는데 내관에게 관리를 맡긴다면 내관에게 권력을 쥐어 주는 명나라 같은 짓을 하게 될 뿐이었다.
"혹시 대군께 묘책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이쯤 계획을 짜 두었으면 그 대비책도 있으리라 생각한 황희의 질문에 이도가 답했다.
"있소. 나라에서 맡으면 권한이 너무 커 문제가 되고, 대마군 주민에게 맡기면 관리가 잘 안 되는 것이 문제인 것 아니오? 그러면 절충해서 대마군 주민들은 실무와 중간 관리를 맡게 하고, 조정에서는 몇 사람씩 파견해 운영을 감독하고 보조하게 하는 것이오."
"이조와 호조만이 아니라 조정 전체가 범위입니까?"
"그렇소. 예를 들자면 외교적으로는 예조가, 기술적으로는 공조가 상단 운영에 도움을 주거나 반대로 상단에서 배워오는 것이 있을 수 있소. 실제로 육조 모두에서 파견하지는 않더라도 굳이 한정 지을 이유도 없지."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리고 상단 전체를 관리하고 운영할 이는 대마군 주민이 아닌 백성 중에서 재주 있는 자를 가려 뽑되, 이조와 호조의 검증을 거치고 주상께서 임명하신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오."
양녕의 말에 다른 중신들도 딱히 다른 의견이나 이의를 내지 않자 황희가 정리하듯 말했다.
"문제되는 부분은 없어 보이니 우선 그리 운영해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럼 그냥 상단이라고만 부를 수 없으니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인데, 주상전하께서 이름을 내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이도가 말했다.
"서해안을 오가는 해운도 적지는 않으나, 지금 해운 대다수는 칠주도에서 삼척부를 거쳐 제북항에 이르기까지 동쪽 바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소. 그러니 동쪽을 개척한다는 의미로 척동상단이라 하겠소."
최초의 주식회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