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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58화 (15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58화

158화

1429년 6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예, 형님. 우선 이리 앉으시지요."

양녕이 자리에 앉자 이도가 사관을 슬쩍 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칠주도에서 올라온 보고가 몇 있습니다. 형님께서 실제로 통치하지는 않고 계신다 하나 엄연히 축자국의 후작이시니 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여 오시라 한 것입니다."

"그렇군요. 무엇입니까?"

"우선 첫 소식은 쇼니 미츠사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양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조금 전 이도가 왜 사관을 슬쩍 봤는지 알 수 있었다.

쇼니 미츠사다가 정동군에 투항한 것이 아니었고 등자사 또한 그 아들인 쇼니 스케츠구가 아니라는 진실은 조선이 칠주도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실록에 남는 것도 막기 위해 조정에도 알리지 않은 것이었고.

칠주도 정벌 과정에서 그런 비밀이 한두 개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도는 몇몇 상황만으로도 어렴풋하게나마 많은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고, 양녕의 의도도 파악했기에 더 파고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칠주도에서 올라온 보고를 통으로 전하면, 완벽한 진실을 아는 내가 알아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길 바란다는 것이로군. 역시 현명하시다.'

"결국 죽었군요."

양녕이 사관은 절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끄덕여 알았다는 뜻을 전하며 말하자, 이도 역시 작게 끄덕이고 말했다.

"예. 마지막까지도 제정신을 찾지는 못했지만 딸과 아들을 애타게 찾다 죽었다 합니다."

"참 안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계속 침을 질질 흘리고 피부에 진물과 딱지가 심한 것이 전염병이 의심되어서 반쯤 갇혀 있다시피 하다가 죽은 것이기도 하고, 아들인 등자사가 말하길 미치기 전에는 불심이 지극했던 데다가 왜인으로 살다 왜인으로 죽었으니 매장이 아니라 화장으로 장사지내고 싶다고 하여 그리하였다 합니다."

'다행히 마지막까지도 미쳐 있던 상태였군. 침을 흘리고 피부에 염증이 생긴 것은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많이 먹인 약재인 진사의 성분이 수은인 탓에 중독 증상을 보인 것일 게고 말이야. 미츠사다가 죽으면 꼭 화장하라고 한 것도 등자사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대로 시행했으니, 훗날 유전자 검사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비밀이 탄로 날 걱정은 없어졌다.'

"그럼 이제 가족이라고는 누이밖에 남지 않았을 텐데, 등자사는 어찌한다고 합니까?"

"미츠사다의 유골을 성복사에 안치하고 100일 뒤에 탈상이 끝나면 누이를 데리고 한성부로 올라오고자 한다 합니다."

'좋아. 과거에 합격하건 내 천거를 받건 상관없으니 한성부에 와서 조선의 신하가 되어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 조선의 충신으로 이름을 남겨라. 그게 네가 쇼니 가문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양녕의 그 말에 이도는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다.

"몇 년 전에 계응국, 그러니까 오우치 가문이 자신들 영지 동쪽의 야마나 가문 영지를 공격한 일을 기억하시지요?."

"예. 하필 처녀 진헌을 면포와 말로 막 대체했을 때 전쟁을 시작해 버린 덕에, 전비를 지원해 줄 면포가 부족해져서 급하게 각종 기계를 만들어 겨우 해결했었지요."

"맞습니다. 그 이후로 공방을 거듭한 끝에 동쪽의 석견(이와미)과 안예(아키) 두 지역을 얼마 전 마침내 완전히 장악했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같은 사건에 대한 것인데, 석주부와 계응국에서 전혀 다른 내용이 올라왔습니다."

"양쪽 말이 다르단 말입니까?"

"예. 석주부에서는 계응국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여서 대응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계응국에서는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석주부가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일단 석주부에서 계응국을 향해 포를 쏜 것은 확실한 모양입니다."

"허허, 이런. 큰일이로군요."

조선의 지방관이 조선의 봉신을 공격했다는 심각한 얘기였지만, 양녕의 표정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을 본 이도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형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양녕은 사관이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

1429년 6월 초순 모일.

미야코(교토). 다이리(궁궐).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죽었다.

휴양하러 갔던 온천에서 무심코 허벅지에 난 종기를 긁어 터뜨려 버렸는데, 그 뒤로 종기 터진 자리가 점점 악화되고 열도 나기 시작했다. 결국 며칠 뒤 의식을 잃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은 나를 위해 좁은 다이리로 모두 모여 주어서 고맙다. 그럼 다 모였으니 이제 시작하겠다. 가져와라."

미카도의 말에 조정 신하 하나가 상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가져와 바닥에 놓았다. 9년 전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에서 거행된, 요시모치의 뒤를 이어 쇼군이 될 사람을 뽑은 제비 반쪽이 담긴 상자 중 미카도가 보관하던 것이었다. 그 옆에는 이미 요시모치의 측근이던 무사들이 가져온, 요시모치가 보관하던 나머지 반쪽이 담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쇼군이 세상을 떴으니, 지난날 물었던 하치만신의 뜻을 확인하여 새 쇼군을 정할 것이다. 봉인을 풀어라."

조정 신하와 요시모치의 최측근 무사가 각자 가져온 상자의 봉인을 풀기 시작하자 주변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여 있는 이들은 쇼군 후보인 요시모치의 네 형제가 각각 출가해 있는 사원의 주지와 승려들,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의 신관들, 중앙 귀족들과 미야코에 올라와 있는 지방 호족들 등 다양했다.

"봉인을 다 풀었으면 봉인문을 펼쳐라."

미카도가 그렇게 말하고 기침을 몇 번 하는 동안 봉인을 푼 두 사람이 각각 삼끈 매듭 안에 들어있던 봉인문을 꺼내어 바닥에 펼쳤다. 겨우 기침을 멈춘 미카도가 두 장의 봉인문을 보고 말했다.

"내가 쓴 봉인문이 맞다. 두 종이에 겹쳐서 찍은 것 또한 내 도장이 확실하다. 좌중에게 보이고 다음으로 넘어가라."

두 사람이 봉인문을 높이 들어 좌중에게 보였다가 다시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비단에 싸여있는 반쪽짜리 제비를 한 사람씩 들고 절단면을 마주 대자 딱 맞아 떨어졌다. 말을 하기 힘든지 미카도가 손짓으로 대신하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 각자가 들고 있는 제비의 비단을 풀고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종이를 펼친 순간, 사방에 적막이 찾아왔다.

"이게 무슨……."

마른기침을 겨우 참은 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미카도가 두 종이를 다시 확인하더니 표정이 창백해졌다. 두 종이에는 분명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문제는 두 종이 모두 먹물이 번져서 이름을 알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때 종이와 먹, 붓은 전부 같은 것을 썼으니 그것으로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제비를 한 사람이 다 쓴 게 아니라 각 사원에서 오신 스님들께서 나눠서 쓰셨으니, 혹시라도 자신이 쓴 것인지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면 확인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장소만 빌려준 것이나 다름없어서 상대적으로 발언에 부담이 없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의 고위 신관이 그리 말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쓴 것이 맞더라도 밝히는 순간 제비를 번지게 만든 책임을 지게 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미카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최악이다. 글자꼴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번져 있거나, 아니면 아예 백지가 들어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다. 그랬다면 하치만신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제비 내용을 없애 버리신 것이니, 새로 제비를 뽑아 바뀌신 뜻을 확인하자고 하면 될 테니.'

적막도 잠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번진 글자가 누구 이름 같냐며 저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우연에 맡겨 신령의 뜻을 묻자는 말이 먹힐 수가 없다. 어정쩡하게 번져 있는 탓에 어떤 글자로도 읽힐 수 있으니 이것이 자기가 원하는 후보 이름이라 밀어붙이면 그만인데 누가 그 기회를 버린단 말인가?'

애초에 제비를 뽑아 후계자를 정하기로 한 것은 이미 귀족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슈고와 호족들이 누구를 요시모치의 후계자로 만들지 파벌이 갈렸기 때문이다.

만일 요시모치가 누군가를 지목한다면 전국에서 파벌 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 있으니 신령의 뜻을 묻는 제비뽑기로 정해 누구도 반발할 수 없게 하려던 것인데, 이렇게 되면 요시모치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어 버린 상황에서 제비뽑기마저 불가능해진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요시모치가 지목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목된 사람은 권위를 가지고 우위를 점하니 혼란을 빨리 수습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네 후보가 똑같은 상황에서 싸우게 되는 것 아닌가. 설령 싸울 마음이 없는 후보가 있더라도 그자를 쇼군으로 만들려는 파벌은 싸우려 할 것이다. 성공만 하면 승려 출신인데다 추대 받아 취임한 탓에 아무런 힘도 없는 쇼군을 마음대로 다루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데 후보의 마음이 뭐 대수겠는가. 대체 어쩌다 이렇게…….'

그때 미카도는 오우치 모리하루를 떠올렸다. 제비를 뽑을 때 쓴 상자를 준비한 것이 모리하루였다. 제비뽑기 며칠 전 은밀히 자신을 찾아온 것도 모리하루였다. 그리고 며칠 뒤의 제비뽑기에서 자신과 함께 속임수를 쓰자고 한 것 역시 모리하루였다.

'자기는 후보 중 최연장자인 기엔이 쇼군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지. 그리고 기엔은 쇼군이 되면 온 일본을 평온하게 만들고 큐슈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고코마츠인)가 미카도의 얼마 안 되는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정작 진짜 미카도인 나는 허수아비인 지금 상황을 타파할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과 나의 이익이 겹치니 기엔이 쇼군이 되게 도와달라는 제안이었지.'

모리하루가 설명한 속임수는 간단했다. 자신에게 상자 제작을 맡기고 제비를 만들 때 쓸 종이와 먹, 붓과 비단을 달라. 그러면 상자 내부 옆면에 기엔의 이름이 적힌 제비를 숨겨놓겠다. 제비를 뽑을 때 그 숨겨진 제비를 꺼내기만 하면 되며, 어차피 상자는 태워버릴 것이니 증거도 사라진다. 만일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바뀐다면 상자 내부 옆면을 열지 않고 그냥 다른 제비 중에 아무 거나 뽑으면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속임수에 동참하기로 했지. 설령 모리하루가 날 속이고 다른 후보의 이름을 적었다 해도 어차피 제비뽑기니 들키지도 않을 것이고 손해 볼 것도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왜?'

제비를 만들 때 쓴 종이와 먹 둘 다 최상품이었으니 절대로 스스로 번졌을 리는 없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번질 리는 없으니 분명 모리하루가 의도적으로 번지게 만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이 속임수에 동참했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니, 모리하루를 따로 불러 이유를 묻기로 마음먹은 미카도는 바짝 마른 목을 가다듬고 옆에 있던 조정 신하에게 물었다.

"분명히 승려들이 먹물을 잘 말린 다음 종이를 접었을 것인데 이리도 번져 버리다니 정말 기이한 일이다. 그나저나 오우치 모리하루는 어디에 있기에 보이지를 않느냐? 설마 오늘 참석하지 않은 게냐?"

"도유선사 말씀이십니까? 쇼군이 세상을 뜨고 며칠 뒤 갑자기 큐슈의 조선군이 스오 일대에 대포를 쏘는 일이 생겨서, 방어를 위해 급하게 영지로 내려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카도는 진실을 깨달았다. 모인 이들에게 다급히 그것을 말하려 했지만 충격에 숨이 가빠오고 기침이 심해지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으나 귀에서 삐 소리가 심하게 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눈앞이 어두워져 균형을 잃고 쓰러진 미카도는 곧 절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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