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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57화 (15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57화

157화

애초에 삼대를 추증해 달라는 윤봉의 말을 들은 예조판서가 당황한 것은, 아무리 처녀 진헌을 제외하고 동북방 국경 회복 승인을 받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나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에 불과한 윤봉이 자기 조상을 추증해 달라는 소리를 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윤봉이 자기 조상을 추증해 달라 할 수 있으니 미리 검토해 두고 주상의 승인까지 받아 두었다가, 정말로 요구하면 바로 시행할 수 있게 해 달라 했었지. 대종백은 알겠다고 하면서도 설마 아무리 그래도 정말 그런 요구를 할까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정말로 윤봉이 그 소리를 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자기 패악질에 당황했다 생각하고 이리 즐거워하니, 이보다 더 우스운 것도 없겠지.'

이윽고 웃음을 멈춘 양녕이 다음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태감께서는 조선에 오셨을 때 고향인 서흥군에 가시면 아우분 댁에서 머무르십니까?"

윤봉은 갑작스러운 양녕의 질문에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예. 제 것으로 된 집이 있긴 하지만 딸려 있는 사람이 없으니, 성묘하러 서흥군에 가면 시중들 사람이 있는 아우네 집에서 묵고 오지요."

그 말을 들은 양녕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역시 훗날 조선으로 돌아오시려는 거군요."

"맞습니다. 아무리 명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 한들 고향만 하겠습니까. 그래서 황궁에서 나오면 조선에 돌아와서 살 집을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딸려 있는 사람이 없으면 관리가 잘 안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아우더러 계속 관리해 달라 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럼 제가 관리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윤봉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군께서 말씀이십니까?"

"예. 그러면 돌아오셨을 때도 바로 거주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짐을 가지고 멀리 명나라까지 가실 필요 없이 집에 두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뒤쪽 얘기를 들은 윤봉의 눈이 빛났다. 양녕이 은근히 돌려 말했지만 탐욕에 익숙한 윤봉은 그 뜻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양녕이 말한 짐은 조선에 와서 개인적으로 교역하거나 갈취한 물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걸 그대로 가지고 명나라로 돌아가면 사사로이 욕심을 부렸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고,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올 때 전부 챙겨서 오기도 눈치가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받자마자 조선에 미리 쌓아두면 그럴 걱정이 없는 것이다.

"그리해 주신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리 쌓아두는 짐은 제 개인 재산인데 그것까지 대군께 관리를 맡기는 것은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아우에게 집 관리는 대군께서 해 주신다 하였으니 재산 관리만 좀 해 달라고 부탁해 보겠습니다."

윤봉의 말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것보다도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입니까?"

"형제의 재산은 부탁을 받아야 관리해 주기 마련이지만, 자식이 부모의 재산을 살피는 것은 기꺼이 나서서 하게 되는 법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양녕이 씨익 웃으며 이어 말했다.

"양자 들이시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명나라에서는 모르게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있던 윤봉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퍼졌다. 조선의 환관은 결혼도 할 수 있고 양자를 들여 가족을 꾸릴 수도 있지만, 명나라의 환관에게는 양자는 물론이고 결혼도 금지되어 있다. 그렇기에 탐욕을 부리고 사치에 빠져들지만,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정말로…… 그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비록 명나라의 법으로는 금지되어있다 하나 조선에서는 허용된 일이고, 태감께서도 조선인이시니 조선으로 돌아오실 것이고, 양자도 조선에서 계속 살 것이니 문제될 것 없습니다. 설령 조정에서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오더라도 제가 그 정도 힘은 쓸 수 있습니다. 태감 덕분에 제가 처녀 진헌 제외와 동북방 진출 승인의 공로자가 되어 얻은 힘이니, 태감을 위해서 쓰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윤봉은 기대감이 벅차오르는 듯 말했다.

"그리만 된다면 당장에 아우네 막내아들을 양자로 들이고 싶습니다. 그 아이는 환관으로 만들지 않고 잘 키워서, 제대로 혼인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보고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응당 그리해 드려야지요."

이미 조정에서 다 승인까지 난 이야기였지만, 정말로 양녕이 자신을 위해 노력해 주는 것이라 생각한 윤봉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군께서 이리도 큰 선물을 해주시는데 어찌 사람이 되어서 받기만 하겠습니까. 제가 무언가 해드릴 게 있겠습니까?"

드디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자 양녕은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지난번 뵈었을 때에 잠깐 말이 나왔던 것이지만,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면서 어려움을 겪는 품목 중에 금은이 있습니다. 혹시 그것을 조공품목에서 제외해 주시는 데에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감격으로 가득했던 윤봉의 얼굴에 살짝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금은 조공이라……. 확실히 금은 조공이 면제된다면 조선도 부담이 줄어들고 대군께서도 더 입지가 오르시겠지요. 그런데 이게 처녀 진헌처럼 황제폐하의 취향에만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북방 진출처럼 선황제 때 약조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명나라 전국에 돈으로 유통시킬 금은이 부족하기에 조공품으로 요구하는 것이니, 제가 최대한 힘은 써 보겠지만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예 면제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조공품으로 금은을 바칠 것이니, 조공품목에서만 빼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면 품목에서만 빠지는 것인데 의미가 있습니까?"

"있지요.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동전만이 아니라 금은도 돈으로 씁니다. 그런데 조공품으로 지정되는 만큼의 금은을 명나라에 계속 보내다 보니, 나라 안에 돈이 말라 버려 제대로 상업이 소통되지 않습니다."

"하긴, 조선에서 금은을 조공으로 보낸 것이 한두 해가 아니니, 그간 보낸 금은을 다 합치면 그 수량이 결코 적지 않겠습니다."

"예. 게다가 나라 안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구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왜인들을 교역으로 달래 주고 있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 교역에 쓸 은도 부족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아직 은이 화폐로 쓰이지도 않고 왜구 짓을 하던 왜인들도 모조리 토벌당해 없어졌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윤봉은 양녕의 실감나는 연기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큰일입니다."

"그래서 조공품목에서 제외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뒤로도 금은을 캐거나 교역해서 얻는 대로 명나라에 조공으로 보낼 것이기는 하지만, 갑자기 조선 땅의 금은이 확 줄어들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조절해서 남기고 조공으로 보내려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었군요. 조선에서 큰 곤란을 겪고 있기도 하고, 금은 조공이 아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거라면 황제폐하께 건의드려볼 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처녀 진헌 때는 사람 대신 면포와 말을 바치겠다는 것이 백성을 아끼는 일이 되는지라 괜찮았지만, 금은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다 보니 다른 물건으로 대신하겠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요. 자칫하다가는 상국과 거래하려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태감께서 황제폐하께 건의드릴 때, 조공품목에서 금은이 제외되면 조선이 지금까지 처녀 진헌 대신 바치던 말의 일부를 해동청으로 대신할 수 있음을 은근히 전달해 주십시오."

그 말에 윤봉은 살짝 놀라서 말했다.

"얼마 전 안남에서 군사를 물렸고, 북원도 오이라트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져서 북원을 방어하는 일도 그리 급하지 않게 되면서 말의 필요가 줄었습니다. 또 황제폐하께서는 사냥을 매우 좋아하시니 조선의 빼어난 해동청을 반기실 것입니다. 그런데 안남의 일이야 그렇다 치고, 황제폐하께서 무엇을 즐기시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윤봉의 반응을 본 양녕은 씨익 웃었다.

'사냥을 즐기는 선덕제가 원래 역사에서 재위 내내 조선에 줄기차게 해동청이며 사냥개를 요구했던 것을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

"다 방법이 있습니다."

"하긴, 저번에 뵈었을 때는 명나라와 북원의 상황도 알고 계셨으니 이정도야 놀랄 것도 없겠지요. 알겠습니다. 대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황제폐하께 은근히 그리 전달해서 건의를 성공시키고, 좋은 소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되면 제 입지가 더 크게 오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태감."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하지요. 황제폐하께서 해동청 조공을 반기실테니 제 입지도 커질 뿐만 아니라, 대군 덕분에 양자도 들일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자, 한잔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술잔을 채워주는 윤봉을 보며, 양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1429년 4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창덕궁의 조계청에 해당하는 경복궁의 사정전에서는 이도와 양녕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확실히 경복궁이 엄청 큽니다."

"예. 저도 갑자기 큰 편전을 쓰려니 아직 적응이 잘 안됩니다."

봄이 되자 이도는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겼다. 창덕궁보다 면적도 넓고 건물들의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격식까지 갖추어 지어진 웅장한 경복궁은, 그 위엄으로나 활용도로나 앞으로 이도가 추구하려는 길에 꼭 맞는 것이었다.

다만 이방원이 경복궁을 꺼렸던 탓에 이방원 생전에는 계속 창덕궁을 썼을 뿐이었다.

"근정전 서쪽에 크게 고쳐짓는 건물은 집현전으로 쓰실 것이지요?"

"맞습니다. 다루고 연구하는 것이 많은 데도 창덕궁의 집현전은 크기가 작아 불편한 점이 많았으니, 앞으로는 그럴 걱정 없게 큼직하게 지어주려 합니다. 이후로도 경복궁에서 지내면서 필요에 따라 건물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짓거나 할 것입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이리도 빨리 승인할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께서 하신 예측대로 정말로 황제가 사냥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양녕이 윤봉을 통해서 했던 금은의 조공품목 제외는 바로 선덕제의 승인을 받았다. 그것도 그냥 빠른 정도가 아니라 윤봉의 건의를 듣자마자 수락했나 싶을 정도였다.

"지금 황제가 영락제를 많이 닮았다고 하지만 영락제처럼 직접 군을 끌고 원정을 다니지는 않으니, 그 성격이 사냥으로 표출될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게다가 안남에서 군사를 물리고 막북의 위험도 덜해지면서 재정에도 여유가 생겼으니, 금은 조공을 조선 형편에 맞게 받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겠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말을 꾸준히 조공으로 보낸 덕에 조선을 신뢰하게 된 것도 있겠지요. 덕분에 이제 조선에 많이 유리해졌습니다. 조선의 여건에 맞춰서 금은을 조공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기병에 도움이 되는 말 조공을 황제의 사냥에만 쓸모가 있는 해동청 조공으로 일부나마 대체했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명나라의 군사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군요."

그렇게 말한 양녕이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즐겁게 웃자 이도 역시 즐거운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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