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56화
156화
1428년 10월 초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이방원이 사망하고 27일이 지났다. 일로 달을 삼으라는 이방원의 유언에 따라 원래대로라면 27개월째에 거행하는 제사인 담제를 27일째인 오늘 거행하고, 상복에서 길복(평상복)으로 돌아온 이도와 양녕은 조계청에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주상,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안 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지쳐서 그런지 오히려 정신이 너무 맑아져 잠도 안 올 것 같습니다. 형님이야말로 좀 쉬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다시 짧은 침묵 뒤에 이도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도를 미리 정비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도라니요?"
"본디 국상은 제도를 정하여 두지 않는 것이 당나라 이후의 관례입니다. 신하들의 임금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참람하다는 이유도 있고, 불길하게 미리 준비해 두는 것보다 흉사를 당하여 그때 고전을 참고하여 거행하는 것이 더 효에 가까운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지요."
"상례의 제도를 말씀하는 것이었군요. 하긴, 급히 고전을 참고하다 보니 예법에 혼란이 와 제대로 거행하기가 어려워 오히려 불비한 점이 많아지곤 했지요."
이성계가 사망했을 때에는 경황이 없던 나머지 이방원이 이성계의 빈전에 밀교식 진언불사를 지시하거나, 중신들에게 시켜 금가루를 아교에 갠 것으로 불경을 쓰게 하는 등 불교에 호의적이지 않던 평소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었다.
이런 사례는 계속 이어져서 원경왕후 민씨의 능 옆에 이도는 사찰을 지으려 하고 이방원이 반대하는 상황까지 일어났을 정도였다.
"예. 지금도 그렇지요. 원래는 27개월에 걸쳐서 5개월째에 발인해 산릉에 모시고, 돌아와 혼전에 신주를 모시고, 졸곡하고, 1년째 되면 소상을 지내 연복을 입고, 2년째 되면 대상을 지내 담복을 입고, 27개월이 되면 담제를 지내고 길복으로 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27일로 갈음하면서 꼬여 버렸지요. 지금만 해도 담제까지 지내고 이미 길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아직 재궁은 빈전에 모셔져 있고 발인하기 전이니까요."
"그나마 태조대왕의 상례 때에는 신하들만 27일로 갈음해 담제를 마치고 업무를 보게 하고, 아바마마께서는 정무를 돌보시면서도 27개월간 그대로 상례를 진행하셨으니 이처럼 나중 제사가 먼저 끝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지요. 같은 제사를 신하들이 한 번, 군주가 한 번 따로 지내는 셈이니까요."
잠시 말을 멈췄던 이도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이일역월로 지내면서도 예법을 충족하는 새 제도를 만들어 정비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임금과 신하가 다 같이 이일역월로 상례를 치르는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아바마마의 뜻이니까요."
"예. 저도 도울 것이고, 대소신료들 모두 도울 겁니다. 그리고 그리 완성된 예법은 천년만년을 이어질 겁니다. 대행대왕의 뜻을 주상이 받들어 만든 제도인데 누가 감히 고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형님."
그렇게 말하고 힘없이 미소 짓는 이도를 보면서 양녕은 속으로 안도했다.
원래 역사에서는 이방원이 이성계의 상례 때 했던 것처럼 이도 역시 소복을 입고 정사를 보며 27개월간 상례를 진행했고, 결국 그 방식으로 제도가 굳어져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거친 옷을 입지는 않았고 곡하는 것을 멈추었다고는 하지만 끊임없이 장례식 중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정신과 육체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고, 그 탓에 이도는 건강을 크게 해쳤으며 아들인 이향(원래 역사의 문종) 역시 어머니 심씨와 아버지 이도의 삼년상을 연달아 치르고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그게 계유정난의 발단이 되고 결국 집현전 해체와 조선군 약화로 이어진 것과는 또 별개로, 왕이 죽을 때마다 27개월간 왕실의 혼인과 임신이 멈춰 버리니 다른 문제를 만들기도 했고 말이야.'
그때 가만히 있던 이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상?"
눈을 크게 뜬 이도는 대답 대신 조계청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급히 이도를 따라 창가로 온 양녕이 본 것은 마당에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이었다. 예리한 청각을 가진 이도의 귀에 그 작은 빗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이윽고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더니,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시원한 빗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말로 비가 오는군요. 작년의 가뭄과 올해의 동풍으로 메마른 농토와 저수지도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방원을 생각하듯 비오는 하늘을 슬픈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이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1429년 1월 중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해가 바뀌어 마침내 이방원의 산릉 안장이 끝났고, 이도가 집현전과 예조에 지시해 새로 정리한 상례의 제도도 완성되었다. 그 새로운 제도에 따른 마지막 제사를 마치고 마침내 이방원의 상례가 전부 종료되었다.
"이제 태종대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까지 마쳤으니, 비록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으나 새 제도에 따라 평상시처럼 나라를 다스리되, 다만 마음속으로는 상중인 것처럼 처신하는 심상으로 27개월을 채울 것이오."
"주상전하께서 왕도와 권도를 아울러 행하시는 것이 실로 성인의 모범이십니다."
이방원은 부인이었던 원경왕후 민씨가 안장된 헌릉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기존의 존호였던 성덕신공에 문무광효라는 글자를 더해 시호로 삼았다. 그리고 태조의 뒤를 이어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이기에 아무런 이견도 없이 태종의 묘호가 올려졌다.
"과찬이시오. 그나저나 이제 곧 명나라에서 정한 시호가 도착하겠구려."
이도가 말한 것처럼 명나라의 시호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원칙대로라면 명나라에게서 받은 두 글자 시호만 써서 ○○왕이라고만 칭하는 것이 제후국의 예법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외교적 목적으로 명나라에 예의를 갖출, 즉 사대할 뿐 스스로를 낮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예법대로 군주를 주상이라 하고, 그 부인을 중전이라 하고, 계승자를 동궁이라 하고, 무덤을 능이라 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황제만 쓸 수 있는 조종의 묘호를 쓰고 자체적으로 시호까지 올려서 쓰는 것이었다.
'물론 명나라에게 받은 시호를 앞에 붙여서 쓰고, 황제가 아니라 대왕, 황후가 아니라 왕후라고만 올려 추존하긴 한다. 하지만 그나마도 축문에서 현고가 아니라 황고라고 칭하니, 사실상 칭제건원만 안 하고 몇몇 예법만 낮췄을 뿐 거의 모든 것이 천자국의 예법이다. 뭐 이건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말이야.'
"신 우의정 허조 아뢰옵니다. 이미 명나라가 보낸 시호 없이 헌릉의 석비를 새기고 종묘에 옥책과 금보를 봉헌했습니다. 이미 태조대왕 때에도 명나라에서 강헌이라는 시호를 보내기 전에 조선에서 올린 지인계운성문신무라는 시호로만 옥책과 금보를 봉헌한 바 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와 문서에서는 명나라가 보낸 시호를 써야겠지만 단지 그뿐이니, 전하께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그 말에 이도가 슬쩍 웃고 말했다.
"우상의 말씀은 당연한 것이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나라가 정한 시호가 아니라, 그 시호를 가지고 오는 사신이오."
"아무래도 조선에 대해 잘 아는 윤봉이 또 오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도 그렇소. 그리고 윤봉이 온다면 이번에 꼭 해야 할 것이 있어서 말이오."
"무엇입니까?"
"금은을 조공품목에서 제외하는 것이오."
"신 좌의정 맹사성 아뢰옵니다. 지금 명나라가 조선에 금은을 조공품으로 많이 요구하는 탓에, 칠주도 각지에서 캐 올리는 금은으로 요구량을 충당하고 겨우 조선에서 쓸 것을 남기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나라도 나라 안에 돈으로 돌릴 금은이 부족해서 조선에 요구하는 것이니 쉽게 제외하여 주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걱정스러운 맹사성의 말에 옥좌에 가까운 상석에 앉아있던 양녕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좌상께서는 걱정하실 것 없소. 이번에도 내가 윤봉을 상대할 것인데, 나 역시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소. 조선이 아예 채굴을 멈추고 금은을 쓰지 않으면서, 광산이 고갈되어 더 이상 금은이 나지 않는다고 명나라에게 주장한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계속 금은을 요구할 것이오."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시려는 겁니까?"
"아니오. 만일 금은을 캐기가 어려워 조선 백성들이 고생한다면 그 방법도 생각해야겠지만, 요역으로 억지로 데려와 인력만으로 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품삯 받고 일할 이들을 모아 나선양수기나 거중기 등을 써서 캐니 고생하는 이가 적고, 연은분리법을 사용하니 금은의 정련도 어렵지 않소. 또한 금은을 조공품으로 보내면 그 가치가 큰 만큼 돌아오는 회사품도 크니, 명나라에 보내고도 조선에 쓸 것이 남는 상황에서 굳이 이익이 되는 금은의 교역을 우리 손으로 끊을 필요는 없소."
"금은을 조공에서 제외하신다면서 교역을 끊지는 않으신다니,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려울 것 없소. 그저 명나라에서 얼마만큼의 금은을 조공품으로 보내라고 지정하는 품목에서는 뺄 것이지만,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바치는 조공품으로는 계속 보낼 것이오."
"그러면 별 차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의아해하는 조말생의 질문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그 둘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소. 그리고 금은의 조공품목 제외가 잘 되고 나면 그 차이는 더 커질 것이오. 아니, 더 키울 것이오."
* * *
1429년 2월 초순 모일.
한성부 인근 누각.
사신으로 한성부에 도착하고 며칠 뒤, 지난번처럼 양녕과 단둘이 누각 위층에서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윤봉의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태감께서 매우 즐거워 보이십니다."
얼마 전 명나라 환관의 가장 높은 관직인 태감에 오른 윤봉은, 양녕이 꼬박꼬박 태감이라고 불러주자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예, 대군. 어제 경복궁의 경회루에서 연회가 있었습니다."
"경회루가 누각이 웅장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올라가서 보는 경치도 대단하지요. 2층에만 올라도 벌써 시야가 탁 트이는데, 3층까지 오르면 온 한성부가 다 보일 듯하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경치보다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즐거워하시는 거였군요. 이토록 즐거워하시니 무슨 일인지 궁금해집니다."
"연회 때 대종백께 제 위로 삼대, 그러니까 증조부까지 관직을 추증하여 달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대군을 뵈러 오기 전에 조정에서 사람이 왔는데, 제 요청대로 세 분 다 추증하여 주신다 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선조의 이름을 높이셨으니 지극히 즐거우신 것도 당연합니다. 자, 한 잔 드시지요."
양녕이 따라준 술을 마신 윤봉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 그 말을 꺼내니 대종백께서 엄청 당황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머뭇거리시기에 제가 '내키지 않으신다면 내일 양녕대군을 뵈면서 말씀드릴 것이니 괜찮습니다.'라고 하자마자 아니라면서 바로 주상전하께 말씀드리겠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이 참 즐거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하하!"
"대군께서도 이런 걸 좋아하시나 봅니다. 하하하하!"
양녕이 웃은 것은 윤봉에게 맞춰 주려는 연기가 아니라 윤봉의 어리석음에 정말로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윤봉이 좋다고 웃는 것을 보고 양녕은 더욱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