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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55화 (15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55화

155화

1428년 9월 초순 모일.

한성부. 연화방 신궁.

이방원이 쓰러지고 며칠이 지났다. 멀리 나가 있던 왕자와 공주들도 급하게 한성부로 달려왔지만, 이도와 양녕은 한순간도 이방원의 곁을 떠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맡기지도 않으며 직접 간호하고 있었다. 식사와 약을 먹여주는 것은 물론 몸을 닦아주는 것까지 둘이서 직접 할 정도였다.

"벌써 가을이 되었나봅니다."

"예, 주상. 눈에 띄게 서늘해졌어요."

임금과 대군이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옷까지 그대로 입은 상태로 번갈아 눈만 잠깐씩 붙여 가며 밤새 간호하는데다가, 이도가 고기반찬을 안 먹은 지 며칠이나 되자 신하들까지 걱정하기 시작했고, 결국 보다 못한 경녕군 이비가 그러면 제발 잠시 바람이라도 쐬라며 두 형을 건물 밖으로 떠밀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나온 이도와 양녕은 나란히 의자에 앉아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 중이었다.

"무언가 더 할 게 있을까요?"

"우선…… 전국의 도관(도교 사당)과 사찰에 지시를 내려 도사와 승려들에게 아바마마의 쾌유를 빌게끔 했었지요."

"각지의 명산과 대천에도 사람을 보내어 쾌유를 빌게 했습니다."

"종묘와 소격전에도 종친과 좌상을 보내서 기도를 하게 했고, 길한 방위를 점쳐서 아바마마를 여기 연화방으로도 모셔왔지요."

전국의 도관을 줄여 나가던 이도와 불교를 도구 정도로 여기던 양녕이었지만, 이방원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도와 불사를 지시했다.

"그러면 할 것은 다 한 모양입니다. 전국에 사면령도 내려서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죄인들은 거의 다 석방하였으니까요."

"괴력난신을 진지하게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나서 아바마마께서 조금 차도를 보이시니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양녕의 말에 이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제 간호만 잘 하면 되겠지요. 여기서 더 기도나 불사를 지시하는 것도 과한 일이고, 죄인을 더 사면할 수도 없으니까요."

"예. 조금만 더 땀을 식히고 들어갑시다."

그리고 말없이 이도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양녕의 눈에, 별 사이를 가르듯 흰 선을 그으며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양녕이 조심스럽게 옆을 보자, 이도 역시 눈을 크게 뜨고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를 땅으로 향한 이도가 입을 틀어막듯 손으로 가리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각지 사찰에 지시해서 약사여래와 관세음보살에게 불사를 올리라 해야겠습니다. 약사여래와 관세음보살을 모시지 않는 사찰에서는 수륙재나 나한재라도 지내라고 해야겠습니다."

병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와 현세의 중생을 도와준다는 관세음보살을 지목해서 말한 이도는 긴장에 입이 마른 듯 침을 겨우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들 중에서도 모반죄나 강상죄를 저지른 이들 말고는 석방하라 해야겠습니다."

양녕도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긴장으로 목소리가 갈라진 탓에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 *

며칠 뒤.

한성부. 연화방 신궁.

잠에서 깨며 눈을 뜨는 이방원의 귀에 이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바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예, 주상."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이방원은 흐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상 옆에는 이도와 효령대군, 양녕이 가까이 앉아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뚜렷하지는 않지만 다른 자녀들과 중신들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대강 상황을 짐작한 이방원이 말했다.

"내가 계속 잠만 잤나봅니다."

"예.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이도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이방원이 작게 말했다.

"재궁을 준비하십시오."

그 말에 건물 안 모든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재궁이란 가래나무로 만든 궁궐, 즉 왕의 시신을 넣는 관을 말하는 것이다.

"아바마마, 어째서……."

"내 몸은 내가 잘 압니다. 그리고 전할 것이 있어요."

흐린 눈으로 이도를 바라보며 이방원이 입을 열었다.

"내 상례는 이일역월의 제도로 시행하세요."

"하오나……."

원래 유교의 상례는 27개월, 즉 햇수로 삼년상이 기본이다. 그러나 왕은 정무를 보아야만 하므로 이일역월, 즉 날로써 달을 삼아 27일로 상을 마치는 제도가 있었다.

"알고 있어요. 태조대왕께서 붕어하셨을 때 내가 27개월을 전부 지켜서 했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내가 잘못된 선례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상께서 산릉을 마치고서야 상복을 벗겠다 했을 때였지요."

자신의 부인이자 이도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의 상례를 치르면서 이방원은 이일역월을 적용해 13일로 끝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도는 차마 그리 하지 못하겠다며 산릉(매장)이 끝난 다음에야 상복을 벗겠다고 했다. 산릉이 끝난 다음에도 이방원이 이성계가 죽었을 때 삼년상 치른 것을 들어 소복을 입고 정사를 보겠다고 했다가 이방원이 반대하여 무산된 적이 있었다.

"내가 그때 그리하면 옷으로만 하는 삼년상에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실제로 삼년상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 했지요. 그 말이 나에게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아마 내가 이대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으면 주상께서는 몸이 상하더라도 정말로 삼년상을 다 치르겠다 하시겠지요. 그러니 내가 유언으로 제도를 굳혀서 내가 어긋나게 만든 것을 바로잡겠습니다."

천천히 작게 말했지만 힘이 들었는지 잠시 멈췄던 이방원이 다시 말했다.

"이일역월로 27일에 상을 마치십시오. 그 기한이 지나면 27개월이 지난 것처럼 상복에서 길복(평상복)으로 돌아와 백성들을 돌보십시오. 이것이 나의 뜻입니다."

"그렇지만 어찌 산릉도 마치기 전에 상복을 벗겠습니까. 어마마마 때처럼 산릉까지는 상복을 입고 있겠습니다."

이도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이방원의 뜻은 확고했다.

"길복을 입으시고 각 제사와 산릉 때에만 상복을 입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거친 참최복을 입었다가 연복, 상복, 담복을 거쳐서 길복으로 돌아오는 것은 슬픔이 점점 흐려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슬픔이 옷으로만 드러나겠습니까. 길복을 입더라도 상례를 지내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아바마마."

이도의 대답에 아주 작게 끄덕인 이방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내 무덤에는 석실을 만들지 말고 점석회를 쓰십시오. 튼튼하고 금방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본디 무덤에는 회격을 쓰는 것이 법도 아니겠습니까. 산릉 또한 5개월을 기다리지 말고 공사가 되는 대로 3개월 안으로라도 마치십시오. 겨울이 되고 땅이 얼면 파기도 어렵고 사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경들은 들으시오. 내가 즐겨 쓰던 은입사 안장을 주상께서 쓰게 하시오. 내가 더는 주상과 나란히 말을 타고 거닐 수는 없을 테니 그것으로 대신할 것이오. 또 주상이 건강을 해칠까 우려되니 상중이라도 고기를 드시게 하시오."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울먹임 섞인 중신들의 대답을 들은 이방원은 눈을 감고 숨을 몇 번 깊게 쉬더니, 다시 눈을 뜨고는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이도 쪽으로 내밀었다.

이도가 그 앙상한 손을 양손으로 조심히 맞잡자, 이방원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둥아……."

그 말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도를 아련히 바라보며 이방원이 입을 열었다.

"내가 옥좌에 있는 동안 너무 많은 재해가 있었다. 경원부가 약탈당하고, 왜구가 들끓고, 가뭄과 홍수가 잦았지. 내가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포은이며 삼봉이며 아우들까지 너무 많은 이를 해쳐서 그 업보를 받는 것인가 생각도 많이 했다. 그리고 너에게 양위하고서도 재해가 계속 이어져서 정말로 괴로웠다. 왕의 자리란 그 자체로도 부담되고 괴로운 것인데, 내가 내 업보까지 물려줘 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도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약하게 가로젓자 이방원이 미소 짓고 말했다.

"작년에는 가뭄이 심했고, 올해는 동풍이 심하다. 동풍 한 달이면 초목이 마른다는 말이 있는데, 내 업보로 백성들이 곤궁해하지 않을지, 그 원망이 너에게 가지 않을지 걱정이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는 대로 비를 내리게 해 백성들을 구하마. 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인 것 같구나."

그리고 이방원은 조심스럽게 손을 빼어 효령대군에게 내밀었다. 벌써 눈물을 뚝뚝 흘리며 효령대군이 손을 잡자, 이방원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순둥이가 아비 때문에 많이 우는구나. 내 어찌 이런 너에게 짐을 더 지우겠느냐. 그저 너의 성품이 점잖고 순하니, 종친 간에 다툼이 있으면 중재하고, 상심한 이가 있으면 달래주며, 네 형과 아우와 우애 좋게 지내기만 해다오."

눈물을 더 뚝뚝 흘리며 끄덕이는 효령대군에게서 천천히 뺀 이방원의 손을 양녕이 말없이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맏이야. 너에게는 아명이 없다. 그 이유를 아느냐?"

양녕이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젓자 이방원이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부인에게서 얻은 첫 아들을 채 1년도 안아 보지 못하고 먼저 떠나 보내고, 그 뒤로도 태어난 두 아들 역시 걸음마도 떼지 못하고 먼 길을 가 버렸다. 내 업보가 이리도 잔혹하게 돌아오는 것인지 절망하고 있을 때 네가 태어났지. 백성들은 아이를 귀하게 여기면 귀신이 시기해 해코지를 할까 봐 천한 아명을 짓는다고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귀신이 시기할까 두려워 너에게 아명을 짓지 않은 것이란다."

먼저 떠나보낸 자식들을 떠올렸는지 이방원의 표정에 슬픔이 비치자, 양녕이 말없이 이방원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네가 크면서 너무 많은 사고를 치고 내 속을 썩인 끝에 결국에는 폐세자 되기에 이르면서, 아 이번 업보는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보인 다음 더 큰 괴로움을 주는구나 하고 또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아니었어. 네가 더 자격 있는 아우에게 지존의 자리를 양보한 것이었다. 그 뒤로도 아우를 보필하며 많은 것을 해 주었어. 왜구의 뿌리를 뽑으며 나라를 넓혔고, 내가 잃어버린 조종의 옛 땅도 더 크게 되찾아왔고, 백성들의 곤궁함도 해결해 주었으니, 내 업보로 일어난 일들을 네가 다 수습해 준 것이다. 어디 그뿐이냐? 네가 해동의 오 태백이 되고 막둥이가 계력이 되면서, 이 모자란 내가 고공단보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방원은 힘든 듯 숨을 몇 번 몰아쉬고 마저 말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우를 보필하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힘써다오."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양녕이 쥐어짜 내듯 말하자 이방원은 안심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그대로 배 위에 손을 올린 이방원은 자녀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너희 모두에게 더 바라는 것은 없다. 그저 서로 간에 다투지 말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돕거라. 본디 형제란……."

갑자기 이방원이 놀란 듯 말을 멈추자 다들 따라 놀라서 이방원을 보았다.

이방원은 이내 깨달음을 얻은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베개를 바로 베고 천장을 보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랬던 것이었구나. 그래서 그때 내가 드린 약을 드시지는 못했지만 나를 두 번 보셨던 거였어. 이리도 간단한 것을 어찌 평생 알지 못하다가 삶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알아챘을꼬. 아니,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구나."

조용히 혼잣말을 하던 이방원은 미소 띤 얼굴로 눈을 감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그 말을 끝으로 바늘이 아니라 깃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의 적막이 찾아왔다.

모두가 그대로 멈춰 있는 가운데 처음으로 움직인 것은 이방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내관이었다. 내관이 품에서 꺼낸 목화솜을 조금 찢어서는 떨리는 손으로 이방원의 인중에 놓았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인중에 올라가 있는 목화솜 조각을 본 내관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붕어하셨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모든 이들의 입에서 울부짖음과도 같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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