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54화
154화
1428년 8월 하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이방원의 말에 도움을 받고서 며칠 뒤, 드디어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이도는 다시 중신들을 모아두고 얘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업무가 붕 떠 있던 사섬서를 사섬시로 승격시키고 세금을 거두는 것에 관한 업무를 맡기겠소. 또 평시서를 상평시로 승격시키고 전국의 물가를 고르게 유지하는 일을 맡길 것이오. 이 두 기관에 더해서 세금 제도를 고치기 위해서 임시로 세제상정소를 둘 것이오. 세제상정소에서 세금 제도를 더 토의하고 연구한 다음, 지방관과 만백성에게 두루 의견을 물어보고 나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겠소. 결정까지 끝나면 세제상정소는 해산하고, 그 이후로 세금 제도를 관리하는 업무는 사섬시로 이관될 것이오."
"예, 전하. 그리 시행하겠습니다."
모든 중신들이 기쁘게 대답하는 가운데, 업무가 폭증할 예감에 혼자서만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호조판서를 보고 슬쩍 웃은 이도가 이어서 말했다.
"의견이 나왔던 여러 세금들 역시 세제상정소에서 토의해 보고 정할 것이오. 상속세는 경들 간에도 찬반양론이 치열했으니 채용할지 말지 정하는 데 한참 걸릴 것이오. 관세도 마찬가지요. 지금은 조선이 면포를 만들거나 말을 중계해 팔면서 큰 이익을 얻고 있소. 이런 상황에서 관세를 물리면 교역이 둔해져 오히려 이익보다 손해가 클 수 있으니, 확실히 이익이 될 때까지는 시행을 보류할 것이오. 인지세는 상인이나 장인들에게 세금을 물리는 방법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으며, 사치를 억제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생각하오. 그러니 더 연구해 보고 최대한 빨리 시행하는 방향으로 가겠소."
"예, 전하."
"전하, 신 우의정 허조 아뢰옵니다. 신이 생각해 본 것이 있는데, 그것 하나만은 바로 시행하는 것이 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도는 중신들이 다 같이 대답하자마자 갑작스럽게 끼어든 허조에게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허조의 성격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오?"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했던 법을 폐지하는 것입니다."
허조의 당당한 그 말에 이도는 물론이고 양녕과 중신들 모두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면 처벌하는 부민고소금지법은 이방원의 승인으로 이도가 시행한 법이었으나, 건의한 것은 바로 허조였다. 그것도 그냥 건의한 정도가 아니라, 여러 신하들이 법의 시행을 반대하자 이방원에게 이 법이 시행되면 지금 죽더라도 편히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서 그 말에 감동한 이방원이 시행하자고 하게 만들 정도로 강하게 추진했던 것이다.
"아니, 그 법은 우상께서 건의하고 추진하셨던 것 아니었소? 왜 6년 만에 생각을 바꾸신 것이오?"
허조는 이도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당초에 부민고소금지의 법을 만든 것은 호족들 때문입니다. 고려는 호족들의 나라인지라,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수많은 속현들은 토호들이 자신의 영지처럼 다스렸지요. 태조대왕께서 조선을 일으키신 이후로 속현마다 지방관이 파견되어 주현이 되었고, 얼마 전 드디어 모든 속현이 사라지고 주현만이 남았으나 여전히 토호와 토호 출신 향리들이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 많습니다."
"그랬지. 토호들은 그 땅에 오래 뿌리를 내리고 지배해 왔고, 수령은 주현이 되면서 갓 부임해 온 이들이니, 토호가 수령을 무시하거나 속이고 제 마음대로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다 보니 백성들도 수령이 아니라 토호를 더 따르게 되었소. 심지어는 토호의 노비가 수령을 무시하는 말도 안 되는 일도 더러 있었고 말이오."
"그리고 토호들이 수령을 괴롭히고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 바로 고소였습니다. 일단 고소당하면 사헌부의 조사를 받아야 하니, 잘못이 없음이 밝혀지더라도 조사받는 동안 제대로 고을을 다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신이 지치게 됩니다. 이것을 반복하면 수령이 지쳐서 토호와 타협하거나 아예 영향력을 잃게 되지요."
"그래서 우상께서 건의하셨던 것 아니오. 종묘사직에 관한 죄나 살인죄가 아니라면 고소를 하는 것만으로 처벌을 받게 되니 사실상 고소 자체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상왕전하와 나도 그 뜻에 동의해 시행한 것이었소."
그렇게 말한 이도는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 법이 시행되면 토호들이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고소를 할 수 없다고 대소신료들이 걱정했지만, 나는 오히려 토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라고 시행한 것이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 나라는 고려가 아니라 조선이며, 자신들은 백성들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부유한 일개 백성에 불과함을 뼈저리게 느끼게끔 말이지."
순간 이방원을 떠올리게 하는 싸늘한 그 목소리에 중신들 모두가 움찔했지만, 허조는 오히려 신난 듯 말했다.
"맞습니다. 대신 정말로 잘못을 저지르는 수령들을 잡아내기 위해 각지에 찰방을 암행시키셨지요. 결국 수령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잡아내는 것은 토호의 고소가 아니라 나라에서 보낸 찰방이니, 그 또한 토호들에게 현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리도 역설하셨던 우상께서 왜 갑자기 폐지하자고 하시는 것이오? 게다가 세금 제도를 얘기하던 지금 상황에서 말이오."
이도의 그 질문에 허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부민고소금지의 법을 폐지하되, 수령을 고소할 때 인지세를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바로 실행하는 것이 나라에 이로운 일입니다."
그 말을 듣고도 다른 중신들은 무슨 소리인가 가만히 있는데, 양녕과 이도가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 웃던 양녕이 어리둥절해 있는 중신들에게 말했다.
"고소를 할 수 있게 하되 인지세를 내게 하는 건 이런 것이오. 정말로 억울한 일이 있거나 수령에게 잘못이 있다면 돈을 내고서라도 고소하고자 할 것이오. 만일 그런 게 아닌데도 토호가 수령을 괴롭히고자 고소를 남발한다면, 그때마다 나라에 알아서 세금을 바치는 꼴이 되오."
웃음을 그친 이도도 말했다.
"게다가 그냥 고소해서 수령을 귀찮게 만드는 것은 백성들 눈에 토호가 수령을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것으로 보이니 꼭 토호가 위인 것처럼 보이오. 하지만 돈은 돈대로 계속 쓰면서 고소를 하는데도 수령이 잘못이 없어서 계속 고을로 돌아온다면, 오히려 토호가 돈만 쓰고 아무 수확도 못 얻는 바보로 보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오."
다들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자 이번에는 맹사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 좌의정 맹사성 아뢰옵니다. 그리하면 토호가 고소할 때는 문제가 없겠으나, 토호 아닌 일반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없는 돈까지 끌어모아 수령의 잘못을 고소할 때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수령은 잘못했으니 벌을 받는 것이지만, 그 백성은 마땅하고 옳은 일을 하고서도 가난해지는 폐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가난마저도 감수하고 마땅한 일을 고변한 상으로 인지세만큼의 상을 주면 되오. 또 종묘사직에 관한 죄나 살인죄를 고소하는 것은 인지세를 받지 않으면 되오. 아무리 기세등등한 토호라도 이 두 가지는 감히 거짓으로 고소할 수 없을 테니 말이오. 다른 의견이 없다면 이대로 시행하시오."
반대한다면 부민고소금지법을 유지하자는 소리가 되기도 하고, 애초에 마땅히 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중신들은 일단 그대로 하기로 했다.
"아뢰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중신들의 대답에 흡족하게 끄덕인 이도는 허조 때문에 끊겼던 부분부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좋소. 그럼 다음은 군역과 요역으로 넘어가겠소. 지금처럼 청년이 노인이 될 때까지 매해 몇 달씩 군역을 지러 오가는 것은 효율이 떨어지오. 따라서 이것을 한 번에 몰아서 하게 할 것이오. 군역 대상이 된 장정은 3년간 쭉 이어서 군대에 있으면서 무기 다루는 것과 진법과 병법을 익히고, 수자리를 서거나 원정에 따라가게 될 것이오."
"3년 뒤에는 군역이 아예 끝나는 것입니까?"
이도는 허조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3년 뒤에 계속 군문에 남고자 하는 이는 시험을 거쳐 군교가 될 것이고, 아니라면 군대에서 나가게 되오. 군에서 나간 뒤로는 매해 농한기에 관아에 모여 군대에서 배운 것들을 잊지 않게 훈련하다가 만일 큰 난리가 터지면 다시 군으로 소집될 것이오. 앞서 3년 동안 쭉 이어서 하는 군역을 현역이라 하고, 그 이후의 군역을 예비역이라 할 것이오."
양녕의 조언을 받은 이도가 시행하려고 하는 것은 원래 역사에서 훗날 프로이센이 시행하게 되는 예비군 제도였다. 생소한 제도를 접한 중신들이 저마다 생각에 빠져 있는 가운데, 병조판서 황상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시정이라 하여 아프거나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는 경우 그 정도에 따라 아들 하나에서 전부에 이르기까지 군역을 잠시 면제하고, 시정에 해당하는 조건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군역을 지게 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이들은 우선 예비역에 편성해 두고 해당 조건이 없어지면 현역으로 보내면 될 것이오. 부모 봉양만이 아니라 본인이 아프거나 부양할 가족이 많은 등 현역으로 갈 수 없는 여러 사례가 있을 것이니, 이는 병조와 세제상정소에서 협의해서 정리해 올리시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역이오. 앞으로는 요역을 직접 시키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나중에 일꾼 품삯으로 줄 것인데, 몰아서 시킬 수 있는 군역과 달리 큰돈을 한 번에 내라 하는 것은 어렵소. 따라서 세금처럼 매해마다 내게 할 것이오."
"신 영의정 황희 아뢰옵니다. 군역은 3년간 군문에 있다 나오면 부담이 크게 줄어듭니다. 하지만 요역을 대신할 세금은 장정 숫자에 따라 매해 내야 할 테니 백성들이 무겁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집집마다 장정 숫자를 숨기려 들 수도 있고, 반대로 지방관이 없는 장정이 있다고 문서를 속여 세금을 갈취할지도 모릅니다."
황희의 걱정에 이도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세금을 장정 숫자가 아니라 가진 땅에다 물리면 되오. 8결마다 장정 한 사람에 해당하는 요역세를 내는 식이지. 그렇다면 땅이 8결 있는 집은 장성한 아들이 둘이건 다섯이건 한 명분만 내면 되니, 자식을 여럿 낳는 부담도 없고 굳이 숨기지도 않을 것이오. 장정이 많다고 세금이 늘지 않으니 지방관이 문서를 속일 일도 없고 말이오."
"그러면 땅 많은 이들이 자기가 가진 땅을 숨기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지금 전국을 측거의로 측량해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 있소. 그때 각 땅의 소유자를 명확히 정리해서 고을 수령이 관리하고 조정에도 한 부 보내게 하면 되오. 그때 땅을 숨겼다가는 주인 없는 땅으로 간주되어 나라에 몰수될 것이오."
"그러면 그 뒤로도 땅을 새로 개간해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다른 이와 땅을 거래할 때에도 나라에 등록해야 확실히 인정받게 될 것이고, 조정에도 보고가 올 것이니 꾸준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수령이 사사로이 속이지도 못하겠군요. 그렇게 등록할 때마다 인지세를 받는 것도 괜찮다 생각합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럼 세부적으로 어찌 적용할지는 역시 세제상정소에서 논의하게 하겠소."
이도가 드디어 길었던 토론을 끝내려 하는데, 조계청 문을 열고 내관 하나가 다급히 들어왔다.
"전하, 상왕전하께서……."
그 모습을 본 이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또 아바마마께서 말을 타고 싶어 하시느냐?
"상왕전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그 순간 이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