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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53화 (15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53화

153화

이방원은 종이를 쭉 읽어가며 말했다.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을 때 그 일부를 내는 세금,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이 물건을 팔 때 물리는 세금. 이런 것은 의도를 알 것 같다. 법적인 문서를 만들 때 도장을 찍는 세금. 이건 좀 괜찮구나. 길거리에 뒷간을 만들어 두고 쓸 때 돈을 내게 하는 세금이라니, 이건 상상도 못 했다. 이 온갖 세금들이 다 네가 떠올린 것이란 말이냐?"

"몇몇은 회회인들을 통해서 들은, 실제로 있거나 있었던 세금입니다. 뒷간을 쓸 때 물리는 세금은 옛 대진국(고대 로마)에 있었고, 회교도 아닌 이에게 물리는 세금은 서역에 지금도 있는 것이지요."

그 말에 이방원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거 참 세상에 별 세금도 다 있구나."

양녕이 집필 중인 것은 실제로 있었던, 혹은 원래 역사에서 이후에 생겨났던 세금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었다.

물론 그 세금이 나타난 시기나 문화, 기술적 배경 등을 고려해서, 이 시기 조선에서 알고 있거나 구상해 낸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들만 적었다.

책이 후대에 전해지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온갖 세금을 다 적은 이유가 있느냐? 내가 처음 보고 아직 정리하기 전인 초고가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로 내용이 많은데 이걸 전부 적용할 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많아서는 뭘 골라서 적용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중에서 적용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주상이시라면 신하들만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백성들에게도 의견을 묻고 제도를 정하실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제도의 초안을 만들고 찬성과 반대를 물어야겠지요. 그 초안을 만들 때 참고할 수 있도록 쓴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던 이방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과연, 지금 보니 어떤 세금인지 설명만 하고 끝이 아니라 각 세금의 장점과 단점, 악용될 우려가 있는 부분이나 제대로 적용되지 않을 시 생길 문제까지도 다 적어 두었구나. 네 말대로 제도를 만들 때 정말 큰 참고가 될 것이야. 그런데 벌써 이리 분량이 많은데 아직도 쓰는 중이라면 살펴보고 참고하기도 쉽지 않을 양이구나."

"괜찮습니다. 지금 조정에 유능한 신하들이 많고, 졸음을 쫓을 찻잎도 칠주도에서 많이 사다놓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이방원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주상만큼이나 너도 신하들 일 시키는 법을 잘 아는구나. 하하하!"

* * *

1428년 8월 중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양녕의 집필이 끝나고 보름여 뒤. 조계청에는 이도와 양녕, 중신들이 모두 모여 세금 제도를 두고 회의 중이었다.

"일단 공법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하나라에서 쓰였던 제도라고 해도 문제가 많아요. 소출의 십분의 일을 거둔다고 하지만 그 양을 매해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의 평균을 내서 정하는 게 공법 아닙니까. 풍년이 든 해에는 많이 걷어도 되는데 적게 걷고, 흉년에는 구휼해 줘야 할 상황에서 전처럼 걷어 가게 되니, 백성의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고 옛 성인께서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허조의 강경한 말에 맹사성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래도 풍년이 든 해에 비축해 두고 흉년이 든 해에 먹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또 지금도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 구휼도 해 주고 세금도 감하거나 면제해 주니 그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희가 입을 열었다.

"풍년일 때 나라에서 거두는 게 적어지는데 무엇으로 구휼을 하며, 거기서 또 세금을 감하고 면제하면 나라는 무엇으로 꾸려 가겠소. 게다가 곳간이 차면 인구가 늘어나는 법. 사람은 그대로고 곳간만 차야 풍년의 비축을 흉년에 쓰는 것이지, 식구가 늘어서 그 곡식을 다 먹게 되면 오히려 흉년에 굶주리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오."

"맞습니다. 괜히 선현께서 조법보다 좋은 게 없고 공법보다 좋지 않은 게 없다 하셨겠습니까? 지금 조선에서 쓰이는 세금 제도도 그래서 조법에 기준을 둔 것 아닙니까. 당해 소출을 확인해서 십분의 일을 거두니 공법의 폐해가 없지요. 그러니 차라리 지금 제도를 더 철저히 시행할 방법을 찾는 게 맞습니다."

허조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황희가 입을 열었다.

"집집마다 소출을 확인하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오.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면 현지 상황을 잘 몰라서 제대로 확인이 안 되고, 향리들에게 맡기면 현지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악용해서 백성들에게 많이 거두고 부유한 이에게 적게 거두는 폐단이 있소. 매해 그렇게 조사하는 게 쉽지 않아서 지금 공법 얘기가 나왔던 것 아니오."

황희가 맹사성과 허조 두 사람의 제안에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하는 상황을 보며 쓴웃음을 짓던 양녕이 나섰다.

"농민들만 생각할 일이 아니오. 상인과 장인들에게는 어떻게 세금을 거둘 것인지도 정하려 모인 것인데, 이건 평균을 내어 거둘지 매해 따져보고 거둘지 이전에 십분의 일을 어떻게 확인하는지 자체가 문제이외다. 농사는 추수 전에 밭에 가서 살펴보면 된다지만, 상인과 장인들이 1년간 얼마나 이득을 봤는지를 무슨 수로 관리가 정확히 확인하겠소."

가만히 있던 조말생도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 대동법은 농지 한 결마다 정해진 대동세를 물립니다. 이것처럼 전세도 땅에다 물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땅에 따라 이미 낼 세금이 정해져 있으니 수확이 많아지면 낼 세금의 비율이 줄어드는 셈입니다. 그러면 농사도 열심히 지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새 농법도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또 상인과 장인들도 마찬가지로 가게나 공장에다가 세금을 물리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이도가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남의 땅을 부쳐서 먹고 사는 농민들이 많소. 그런데 세금을 땅 기준으로 물리면 그들에게 땅을 빌려주던 지주들이 자기에게 전부 넘어온 세금을 얌전히 내겠소? 농사짓게 해 주는 대신 소출의 일부를 받던 것을 더 늘려 받아 그것으로 세금을 내려 할 것이오. 결국 농민들 부담으로 그대로 넘어가는 셈이지."

"그래도 대동세는 얌전히 내고 있지 않습니까?"

"대동법 실시 이전에는 공납을 마을 단위로 거두었기 때문이오. 그래서 지주들 땅에서 농사지을 노비들과 땅 빌려 농사지을 농민들까지 다 특산물을 구하러 다녀야 했지. 일손이 줄어드는 피해가 자신들에게도 오니 차라리 대동법을 반겼던 것이오. 그리고 가게나 공장마다 팔고 만드는 물건들이 크기와 가격대가 다 다른데 건물의 숫자나 크기만으로 측정해서는 안 될 것이오."

기술관 출신인 공조판서라 잘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이천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

"차라리 그러면 절충해서 땅이나 건물에 약간씩, 수익에 약간씩만 세금을 물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떠넘기더라도 큰 부담이 안 될 것이고, 어쩌면 고을 민심을 얻고자 자기가 내고 말지도 모릅니다. 상인과 장인들도 괜히 얼마 안 되는 세금을 속여서 냈다가 들켜서 벌 받을 위험을 감수하느니 솔직하게 소득에 맞게 내지 않겠습니까?"

"그럼 모자란 세금은 어디서 충당하오?"

"지금 방직감과 제철감에서 포목과 철을 팔아 얻는 수익이 제법 됩니다. 나라에서 소유한 각지의 염분에서 소금을 만들어 파는 이익도 적지 않지요. 전매를 해서 생필품을 틀어쥐고 백성들의 돈을 빼앗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양녕대군 덕분에 싸고 좋고 많이 만들어 팔게 되어 백성들도 이득을 보면서 얻는 수익입니다. 거기다 일본과 병나라, 여진족들과 교역해서 벌어들이는 것도 제법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것들을 좀 확대하면 충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천의 제안이 제법 흥미로웠는지 가만히 듣던 황희가 말했다.

"그리되면 좋겠다만, 충당이 될 만큼 확대가 될지 모르겠소. 양녕대군께서 이번에 쓰신 책에 있던 상속세나 관세, 인지세라는 것도 같이 도입하면 괜찮을 것도 같고 말이오."

"일단 전세에 관한 것은 며칠만 더 토론해 보고 최대한 정리한 다음 지방관과 백성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보고 정해야겠소. 지금 경들과 토론한 지 몇 시진이 지났지만 아직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고 있으니 말이오. 우리가 이것만 붙잡고 있을 수가 없지 않소. 군역과 요역도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하오."

그렇게 말한 이도가 작게 한숨을 쉬고, 중신들도 저마다 계속 얘기하느라 마른 목을 차로 축이거나 지끈거리는 이마를 만지기 시작했다. 양녕도 관복 목깃 쪽을 살짝 잡아당겨 더운 몸에 바람이 통하게 하며 생각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시간이 엄청 걸리는군. 차라리 자료가 없었으면 적당히 토론한 다음 바로 의견 조사로 넘어가고 문제점은 차차 고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점이 정리된 자료가 책 한 권 분량이나 있으니, 그걸 토론 단계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지.'

양녕이 정리한 책에는 세금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 원래 역사에서 후대에 시행되었던 세금 제도들과 그 문제점도 적혀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세금 제도를 구상해 보고 문제점도 예상해 보았다는 형식으로 적었을 뿐, 조선에서 시행되었던 영정법과 균역법에서 명나라의 일조편법과 청나라의 지정은제, 에도 시대의 운상금과 어용금까지 두루 다루고 있었다.

"그럼 우선 군역을……."

이도가 다시 토론을 시작하려는 그때 조계청 문이 열리고 내관 한 사람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상왕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국정을 논하는 것도 좋지만 더운 여름날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몸에 좋지 않으니, 중신들도 잠깐 쉬게 할 겸 양녕대군과 함께 말을 타며 머리를 식히러 가지 않겠냐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방원이 토론 도중에 사람을 보내 이런 내용을 전하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중신들은 물론이고 이도도 약간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양녕이 이도에게 말했다.

"그리하시지요, 주상. 옥체가 강건해야 국정도 돌보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 * *

잠시 후.

창덕궁 후원.

이방원과 이도, 양녕은 말을 타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후원을 천천히 돌고 있었다.

"명나라가 드디어 안남국(베트남)에서 군사를 뺐다 들었소."

"예. 여리(레 러이)라는 자가 봉기를 일으켜 명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워 대월국이라 이름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합니다."

양녕은 약간 뒤에서 따라가고, 이방원과 이도는 그 앞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며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꼭 고구려의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을 몰아낸 것을 닮았소. 그나저나 명나라가 결국 안남에서 군대를 물리고,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천자국을 선포하는 것까지 가만히 둔 것을 보면, 이제 영락제 치세의 확장하던 기세도 다 사라진 모양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전쟁이 하나둘 줄어들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고 있으니, 그 시대에 맞는 좋은 세금 제도를 만들어 백성들이 더 잘 살게 해주고 싶은데 쉽지가 않습니다."

이도의 그 말을 듣고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던 이방원이 말했다.

"한 번에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세금 제도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오. 애초에 완벽한 세금 제도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겠지. 양녕이 쓴 국부론만 봐도 물건을 사고팔 때 수요와 공급이 복잡하게 얽혀 움직이지 않소. 서로 이익을 보고자 하는 거래가 그런데 하물며 세금은 나라에서 일방적으로 거두는 것이니 어찌 쉽겠소."

"그 말씀이 맞습니다."

"차라리 세금을 관리하는 관청을 만들어 두고, 시대의 흐름과 그에 따라 생겨나는 문제점들을 꾸준히 반영하고 살펴가며 고쳐 나가는 건 어떻겠소?"

그 말을 들은 이도가 눈을 크게 뜨고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역시 아바마마십니다. 돌아가면 바로 중신들에게 말해봐야겠군요."

신이 난 이도를 이방원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뒤에서 따라가던 양녕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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