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52화
152화
"기억하고 말고요. 그때 종기 치료법하고 기름비누하고 같이 아바마마께 드리고 갔었지요. 칠주도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칫솔이라고 불리면서 궁 안에는 이미 다들 쓰고 있었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퍼지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래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잘 퍼지지 않았지요. 아무래도 돼지털과 대나무로 된 물건이니 직접 만들어서 쓰기도 어렵고, 사서 쓰자니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물건에 선뜻 돈을 쓰기 어려운 것도 있었을 겁니다. 대신 소금 생산이 늘고 값이 내리면서 소금으로 닦는 백성들은 많아졌지요."
"좋은 일입니다. 소금으로만 닦을 수 있어도 충치로 고생하는 백성들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양녕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미소 지은 이도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좋은 일은 또 있습니다. 신백정들이 동북면 개척에 참여하면서 평소 사고 치던 이들은 다 그쪽으로 떠났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군인도 되고 장사도 하면서 잘 산다는 말도 들리고, 남아 있는 신백정들은 상대적으로 얌전하고 농민들과도 제법 잘 어울리는 데다가 숫자도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주변에서 신백정들을 보는 눈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입니다. 의도한 대로 되었군요."
"또 제철감에서 철을 싸게 만들어서 공급하다보니 농기구 값도 비싸지 않고, 작은 고을의 대장장이들도 호롱기니 나선양수기니 하는 것들을 만드는 데 익숙해진 덕분에 농기구 보급도 잘 되어서 농민들이 농사짓기도 좋아졌습니다. 살림이 나아지니 고기도 먹고 싶어지는데, 그러다보니 또 가축을 키우고 고기를 파는 신백정들을 찾게 되지요."
"흥미롭군요. 그런데 고기를 내다 판다고 해도 소를 잡는 건 나라에서 제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들 관아 눈치를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라도 먹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돼지를 잡으면 가죽이 나오지 않습니까? 원래는 신백정들이 돼지가죽을 무두질하면서 빠지는 털은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잡는 양이 늘어나니 돼지털도 많이 나오게 되지요."
드디어 이도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한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주상께서 칫솔 얘기를 하시다가 백성들 이 닦는 얘기로 넘어가시더니, 왜 또 갑자기 신백정들 얘기를 하시다가 고기 먹는 얘기를 하시나 했습니다. 신백정들이 그 돼지털로 칫솔을 만들어서 파는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대신 형님께서 만드셨던 것처럼 대나무가 아니라 자신들이 버들고리 만들면서 익숙하게 다루던 버드나무 가지로 손잡이를 만들더군요."
"칫솔 손잡이에 버드나무 가지라. 어찌 보면 대나무보다 그게 더 이치에 닿는 일이겠군요."
버드나무 가지는 끝을 씹어 섬유질을 풀어지게 해 이를 문질러 닦는데 쓸 수 있다. 석가모니가 직접 정한 승려의 제한된 소지품에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유서도 깊었다. 그 영향력도 커서, 버드나무 가지의 한자어인 양지는 한국어에서는 양치의 어원이 되고, 일본어에서는 한자까지 그대로 쓰이면서 이쑤시개를 뜻하는 요지라는 말이 되었을 정도였다.
"백성들도 버드나무를 재료로 썼다 하니 익숙하기도 하고, 소금으로 이를 자주 닦다 보니 칫솔에도 관심이 갔겠지요. 거기다 남는 것이 돼지털인지라 신백정들이 많이 만들어서 팔다 보니 값도 비싸지 않고, 아예 그냥 하나 줄 테니 써 보라면서 권유하고 다니기도 한 모양입니다."
"허허허. 역시 공예품을 만들어서 팔던 이들답게 장사하는 요령이 있군요."
"예. 그리고 그 요령이 먹혔는지 적어도 한성부하고 성저십리에서는 칫솔과 소금을 같이 쓰는 백성이 매우 많아졌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잘된 일입니다. 백성들은 이가 건강해져서 좋고, 신백정들은 물건을 팔아서 좋고, 도축해서 나온 것이 무익하게 버려지지 않아서 좋고, 나라에서는 소금을 팔아 수익이 생겨서 좋으니, 그야말로 일거사득입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 전 들은 흥미로운 얘기는 여기부터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본론이 아니었군요? 무엇입니까?"
"돼지털이나 버드나무 가지나 오래 가는 재료는 아닙니다. 게다가 이를 닦는다는 것이 결국 축축한 곳을 솔질하는 것이니, 닳아서건 썩어서건 망가지기 쉽지요. 백성들은 그렇게 망가진 칫솔은 함부로 버리지 않고 모아놨다가 정월 대보름날 새벽 일찍 불에 태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칫솔을 다 태운 다음 부럼을 깨물지요."
"흥미롭습니다. 이가 튼튼하기를 기원하면서 하는 것 같군요."
"맞습니다. 충치는 다 쓴 칫솔에 옮겨 가서 불에 타서 없어져 버리고, 한 해 단단한 것을 마음 놓고 깨물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이가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그리 한다고 합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 풍습에 양녕이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고, 그들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모습이란 언제나 대단하군요."
"백성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다 형님께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고안해내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이도는 그렇게 말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이도의 팔을 가만히 보던 양녕이 말했다.
"주상의 옥체가 많이 강건해지신 것 같습니다."
양녕의 말에 이도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살이 빠진 자기 몸을 한번 슥 만지더니, 혈색 좋은 얼굴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도 요즘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도 형님 덕분입니다. 아바마마께서 형님께서 알려주신 비방이라며 가르쳐 주신대로 하고 있지요. 차를 자주 마시니 고기도 소화가 잘 되고, 꾸준히 말을 타고 땀 흘리고 씻고 나면 고기 맛도 더 좋게 느껴지더군요."
자신의 조언을 비방이라며 이도에게 말한 이방원이나, 정말로 고기를 위해서 꾸준히 운동하는 이도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온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생각보다 말 타는 것이 좋더군요. 잔뜩 집중해서 말을 타다가 생각이 비워지는 순간이 오면 새로운 것이 떠오르거나 고민하던 답이 나오곤 합니다. 요즘은 그래서 생각이 막히면 말을 타기도 하지요. 물론 말을 몇 번 타더라도 답이 안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기에 그것 때문에 말을 몇 번이나 타실 정도입니까?"
"세금 내는 제도를 고치는 것입니다."
"세금 제도를요?"
"그렇습니다. 공납이 대동법으로 대체되면서 많은 폐단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특산물이라 해서 무작정 그 지방에서 걷던 것보다 쌀이나 포목으로 거둔 다음 필요하만큼만 상인에게 사오는 게 이점이 더 많습니다. 요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성부 도성을 새로 축조하고 그 뒤로도 몇 번 큰 공사를 해 보니, 억지로 백성들을 끌어다 요역을 시키느니 쌀이나 포목을 대신 걷고 필요할 때 품삯을 주고 사람을 쓰는 것이 더 낫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원래 역사보다도 조금 이른 세금 개혁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듣는 양녕을 향해 이도가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런데 형님께서 수많은 것들을 만들고 고치시면서 세상이 엄청 달라졌습니다. 공납과 요역뿐만 아니라 다른 세법들 역시 이전 것을 그대로 쓸 수가 없어요. 총은 하루 배운 사람이라도 능히 장사를 죽일 수 있고, 한 달을 배우면 괜찮은 병사가 됩니다. 이런 무기가 군에서 널리 쓰이는데 지금의 군역 제도는 그 이점을 살리지 못합니다. 또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장인과 상인의 수가 늘었는데, 그들에게 한 결당 곡식 몇 말을 내라는 전세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꾸시려는 것이군요."
"예. 그래서 여러모로 궁리를 해 보아도 도통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혹시 형님께서는 무슨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양녕은 엷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세금이란 삼대 시절(하, 상, 주의 세 나라)은 물론이고 그 이후 역대의 제왕들과 성인들이 모두 고심하였음에도 아직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저라고 답이 있지는 않지요. 아마 그렇기에 주상께서도 주상 혼자만의 생각이나 몇 사람의 의견에만 의지하지 않고, 문무백관과 만백성에게 직접 물어보아서 세금 제도를 정하고자 하실 겁니다."
그 말에 이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주상이라면 그리 하실 것 같았습니다."
신기하다는 듯한 이도의 시선을 받으며 싱긋 웃은 양녕은 이어서 말했다.
"제가 답을 낼 수는 없지만, 문무백관과 만백성에게 묻기 전에 무엇을 물어볼 것인지를 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도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리하여 주시면 큰 도움이 되지요. 무엇입니까?"
"조만간 책으로 써서 드리겠습니다."
잠깐 생각하던 이도는 책으로 써야 할 만큼 내용이 많다는 뜻임을 이해하고 더 기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 * *
1428년 7월 하순 모일.
한성부. 정착도감.
정착도감의 오늘 할 일이 끝나고 정인지와 다른 관원들은 모두 퇴청했지만 양녕은 여전히 책상 앞에 남아 있었다.
종이 위에 깃털 붓으로 글씨를 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던 정착도감에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방향을 바라본 양녕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바마마! 정착도감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양녕의 놀란 얼굴을 보고 슬쩍 웃은 이방원이 정착도감 안에 들어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네가 아직도 정착도감에 있다고 해서 잠깐 얼굴이나 볼까 해서 왔다."
이방원은 마치 옆 건물에 있다가 잠깐 들르듯 온 것처럼 말했지만, 이방원의 거처인 수강궁과 양녕이 있는 정착도감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양녕은 이방원이 자신의 집까지 갔다가 아직 퇴청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또 정착도감까지 발걸음 했음을, 즉 순전히 자신을 보러 멀리까지 움직였던 것임을 눈치챘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이리 앉으시지요. 다모를 시켜서 차를 내오라 할까요?"
"아니, 괜찮다. 요즘 차를 마시면 밤에 잠이 잘 안 와서 말이다."
이방원이 그렇게 대답하면서 탁자 앞 의자에 천천히 앉자 양녕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퇴청을 못 했다니, 정착도감 일이 많은가 보구나."
"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은 다 끝났지만 요즘 책을 쓰는 것이 있어서 오늘 정착도감에서 갈아놓은 먹물을 다 쓸 때까지만 쓰고 가려고 남아 있던 것입니다."
"책? 이번에는 또 어떤 신기한 것을 쓰고 있느냐?"
이방원이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지으며 그렇게 묻자 양녕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까지 쓰던 것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이것입니다. 주상께서 세금의 제도를 고치려 하시는데, 거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책으로 정리해서 드리기로 했습니다."
"세금의 제도를 고친다니 처음 듣는구나. 아무래도 신하들과 어떻게 고칠지 의논할 때 밀리지 않으시려고 조용히 미리 준비를 해 두시려는 것이겠지. 어디 보자……."
이방원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이내 양녕이 가져온 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환갑을 넘긴 침침한 눈으로 천천히 종이를 읽던 이방원이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양녕에게 말했다.
"초고라서 정리가 덜 된 것이 아니라 이게 완성본인 게지?"
"예. 맞습니다."
양녕의 대답을 듣고 다시 종이로 눈을 돌려 읽던 이방원이 재밌는 것을 보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정말이지 기상천외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