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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50화 (15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50화

150화

"주둔 중인 2기병여단이 군량과 말 먹일 사료를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 둔전을 만들려면 초지를 개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개간해서 농사짓기 좋은 초지면 여진족들에게는 가축을 놓아 풀을 뜯게 하기 좋은 초지이기도 하지요."

이징옥의 푸념과도 같은 말에 양녕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여진족을 유사시에 제압할 기병을 유지하고 육성하려면 초지를 충분히 개간해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개간이 너무 과하면 여진족들이 반발하니 오히려 유사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지는구려. 기병 관리와 여진족 관리 사이에서 개간하는 정도와 장소의 균형을 잡는 게 어렵겠소."

"예. 바로 그 부분이 어렵습니다.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 근처 여진족들은 말 타고 사냥하고, 가축 길러서 젖이나 고기를 먹으며 생활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인들이 오더니 이 추운 지역에서 무슨 작물을 기른답시고 소중한 초지에 불을 질러 대니 반발할 만도 하지요."

"그래도 제대로 농사가 자리 잡고 나면 그 여진족들도 농사를 짓게 유도해서 조선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오. 공께서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들도 농사를 모르거나 거부하는 건 아니고 기후 탓에 안 될 거라 생각할 뿐인 것 같으니, 오히려 농민들 사이에 살면서도 꿋꿋하게 농사보다 목축을 좋아하던 신백정들보다 농사시키기 쉬울지도 모르지 않소."

"맞습니다. 일단 농사가 자리 잡는 것이 우선이니, 지금부터 그 뒤의 일을 걱정할 것도 없지요. 사실 농사가 자리 잡은 다음에는 여진족들이 조선인이 되는 걸 거부하거나 농사를 거부하는 정도면 몰라도, 조선에 대항한다면 군량도 넉넉하겠다, 전부 쓸어버리면 그만이기도 합니다."

"좋은 생각이오. 그나저나 공께서 고생이 많으신데, 내가 곧 한성에 가니 계속 살피면서 도와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뭔가 가능하면 도와주고 가고 싶소. 내가 도와줄 만한 게 있소?"

양녕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이징옥이 입을 열었다.

"작년에 둔전에서 밀 농사를 성공해서 밀을 제법 많이 수확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곡물이긴 하지만 최 직전(최만리)께서 집현전에서 정리했던 것이라며 군영마다 보내 주셨던 농법서가 있어서 그걸 참고했지요. 도정하려고 방아로 빻으면 알곡이 잘 깨지는 게 정상이라 보통 가루로 먹는다는 것이나, 어떻게 조리하면 된다는 것도 그 책으로 익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생겼습니다."

도와줄 만한 것을 질문했는데 돌아온 대답치고는 빙 돌아가고 있었지만, 양녕에게도 제법 흥미가 동하는 내용이었다.

"무슨 문제였소?"

"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많이 모른다는 거였습니다. 처음에는 국수를 뽑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그렇게 먹으니 질릴 뿐만 아니라, 매 끼니때마다 반죽해서 면을 뽑는 것도 고역이더군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밀전병을 부쳐서 이런저런 걸 싸서 먹었습니다."

"그건 어땠소?"

"밀전병이 밥이 되고 전병에 소로 들어가는 게 반찬이 되는 셈인데, 전병은 얇고 소는 많으니 밥으로 치면 한 숟갈마다 반찬만 엄청 퍼먹는 꼴입니다. 곡식을 적게 먹으니 식사가 안 되지요. 그나마 전병을 좀 두껍게 부치고 몇 장 겹쳐서 먹으니 그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쯤에서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때까지 마땅히 비축해 둔 다른 반찬이 없어서 나물을 뜯어다 먹고 있었는데, 날이 추워져서 나물이 없어지자 소로 넣을 만한 주된 재료가 하나만 남아 버린 것이지요."

"순무로군."

"맞습니다. 절인 순무를 가늘게 썰어다가 전병에 싸서 먹기만 며칠을 하자 병사들이 끼니때마다 한숨 한 번씩 쉬고 먹게 되더군요."

양녕은 메밀전병에 무채를 넣고 말아서 만든 음식인 제주도의 빙떡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전병을 만드는 재료가 밀과 메밀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논농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재배할 수 있는 한정적인 작물들로 어떻게든 음식을 만들다 보니 수렴하게 된 것이다.

"가끔 먹으면 별미일 맛일 게고, 여기보다 남쪽에서야 밀가루 음식이 귀한 것이라지만 그리 많이 먹으면 질릴 수밖에 없겠소."

"실제로도 그래서 소에 콩나물도 같이 넣어보고 콩나물만 넣어도 보고 별 시도를 다 했습니다만, 이미 다들 밀전병 자체에 질린 터라 얼마 가지 않아서 병사들은 물론이고 군교와 군관들도 지쳐가는 게 보였습니다. 결국 이전에 제북항을 통해서 군량으로 보급 받아 두었던 다른 미곡들을 먹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밀만 먹었던 이유가 있소? 어차피 군량으로 들어온 건 똑같으니 다른 미곡들하고 번갈아 가며 먹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밀이 쌀을 대체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보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 남쪽에서 올라오는 곡식에만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것이었군."

"여하튼 그리해서 쌀과 다른 곡식들을 적당히 섞어가며 밥을 지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반찬이 순무하고 콩나물만 남은 건 똑같았지만 다들 그전에 먹던 밀전병보다는 나은지 아무 불평 없이 먹더군요. 다행히 콩하고 밀을 수확하자마자 메주를 띄워 만들어 둔 장이 그때쯤 완성되어서 한숨 돌렸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이징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사실 된장은 소로 넣어도 좋고, 간장이나 된장을 써서 국을 끓이면 거친 잡곡밥도 어찌 넘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시 밀전병으로 주식을 바꿔 볼까도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어서 그대로 겨울을 났습니다. 그리고 봄이 된 다음 문제가 생겼지요."

이징옥이 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양녕도 알 수 있었다. 보관해 둔 밀가루가 상해 버린 것이다.

"둔전에서 밀을 수확해 보관했던 많은 지역에서 비슷하게 일어난 일이오. 쌀농사에 익숙해서 다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니, 공이 잘못해서거나 여기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사건은 아니오."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예상 밖의 일이었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벼는 수확한 다음 탈곡해서 햇볕에 잘 말리고, 이듬해 파종할 만큼만 남기고 방아를 찧어 쌀로 도정해서 보관한다. 밀 또한 그렇게 도정을 해서 밀가루로 만들어 보관을 했었다.

문제는 이 당시의 도정 기술로는 밀을 가루 내면서 밀눈과 밀기울을 다 제거할 수 없었는데, 그렇게 섞여 들어간 밀눈과 밀기울이 밀가루를 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예. 다른 곳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반해 산간에서 메밀을 길렀던 화전민 출신들에겐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메밀은 도정하면 한 달이면 상해 버리지만 낟알째로 두면 몇 년도 가니 밀도 그리 생각하고 보관한 덕에 전부 무사했다는 얘기도 들었지요."

"맞소. 그래서 그걸 확인한 다음 밀은 수확하면 낟알째로 잘 말려서 보관하고, 그때그때 먹을 만큼만 찧어서 쓰라 지시를 내렸던 것이오."

"그래서 말인데, 낟알째로 말려서 보관하는 것 말고 밀을 가루 낸 다음에도 잘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징옥의 질문에 양녕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낟알째로 말려서 보관하는 거에 문제라도 생긴 것이오? 삼남이나 칠주도처럼 습하고 더운 곳이면 몰라도, 북방은 사시사철 건조한 편이라 말려서 보관하면 여름이라도 상하지는 않을 것인데?"

"보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대신 만일 밀을 어딘가 군량으로 싸들고 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쌀이나 다른 곡식은 그냥 그대로 가져가서 솥에다 밥을 지어 먹으면 되지만, 말린 밀 낟알을 싸들고 가면 가루 내고 반죽해서 면을 뽑건 전병을 부치건 해야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물론이고, 가뜩이나 솥이 무거운데 방아까지 챙겨야 하지요. 그걸 미리 해결해 두고 싶습니다. 제가 대군께 도움을 청한다면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양녕은 흡족한 표정으로 이징옥을 보았다. 일신의 무력의 출중함이나 충직함, 청렴함으로만 알았던 인물이었는데, 군사적으로 내다보고 대비하는 장군으로서의 재능도 매우 우수한 것이다.

"낟알처럼 손이 많이 가지도 않고, 밀가루처럼 쉽게 상하지도 않는 보존방법이라……."

양녕이 생각에 빠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이징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라도 제가 무리한 얘기를 한 것이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먹기까지 손이 많이 가고 가루가 잘 상하는 것은 밀이라는 작물이 타고난 천성인 것인데, 사람이 그것을 바꾸는 일이 어찌 쉽게 되겠습니까."

"방법이 있소."

양녕이 예상과 정반대의 대답을 하자 이징옥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이렇게 바로 말입니까?"

그 반응에 양녕도 당황해 물었다.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을 기대하고 물어본 것 아니었소?"

"아무리 그래도 한 식경도 걸리지 않고 이리 순식간에 답이 있다 하시니, 어찌 안 놀라겠습니까."

"그저 이러면 어떨까 하는 구상일 뿐이오. 검증된 방법이 아닌 이런 구상이야 금방 나올 수 있지 않소."

"그거라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시도해 보고 잘 되면 그 방법을 조선 곳곳에서 널리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양녕은 기대감에 눈을 빛내는 이징옥에게 자신의 구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밀을 가루 내되 그대로가 아니라 면을 만들어서 보관하는 것이오."

"면으로 말입니까? 면은 물을 넣어 반죽해서 만든 것이라 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면이라면 그렇겠지만, 잘 마를 수 있으면서도 나중에 너무 쉽게 부러지지 않을 굵기로 면을 뽑은 다음, 건조한 곳에 널어 잘 말리면 괜찮을 것 같소. 만일 제대로만 된다면 물기가 없어 잘 상하지 않고, 보관하기도 쉽고, 끓는 물에 넣어 익히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될 것이오."

양녕의 설명에 이징옥은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만일 잘 된다면 쓰임이 많겠군요. 멀리 나가서도 간장이나 된장, 주변에서 뜯은 나물을 넣고 국을 끓인 다음 국수만 넣으면 밥과 반찬을 따로 하지 않아도 끼니를 쉽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면을 뽑아 말리는 게 잘 되지 않거나, 잘 되더라도 군량으로 비축할 밀가루를 전부 면으로 뽑아 말리는 게 힘들다면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오."

그 말에 이징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법이 또 있단 말입니까?"

"그리 권장할 방법은 아니오. 대신 이건 아마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오."

"무엇입니까?"

"밀가루에 물하고 소금을 넣고 잘 반죽해서 한 식경 정도 천으로 덮어 가만히 두오. 그다음 반죽을 넓게 펴고 잘라서 적당한 크기와 두께의 네모진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오. 그런 다음 젓가락 같은 걸로 구멍을 여러 개 뚫고 번철이나 솥을 써서 타지 않게 구워 내는 방법이외다."

양녕의 설명에 이징옥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반죽해서 굽기까지 했으면 두껍게 구워 낸 전병 비슷하게 나오는 것 아닙니까? 말린 면이랑 다르게 익히기까지 한 것이니 바로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병하고는 다르게 겉이 단단해질 때까지 굽는 것이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오. 한 번 구운 다음 말리거나 다시 구워서 수분을 바싹 말리는 게 중요한 부분이오."

저 멀리 유럽의 선원이 들었으면 기겁했을 보존법이지만, 그 보존법으로 무엇이 만들어지는지 모르는 이징옥은 그저 흥미롭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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