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49화
149화
1428년 6월 중순 모일.
제북항. 군 주둔지 지휘소.
회경군이 창설되고 조선이 동북방 국경을 수복하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양녕은 갑작스럽게 배를 타고 제북항을 찾았다.
"갑자기 오셔서 사실 약간 놀랐습니다. 시찰 오신 겁니까?"
제북항 일대의 관리를 맡은 회경군 우군사단장 겸 5보병여단장 김효성은 양녕을 자신의 지휘소 건물로 안내해 같이 차를 마시며 그렇게 물었다.
"시찰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오. 이번에 나 먼저 한성부로 돌아가게 되었소."
그 말에 의외라는 듯 김효성이 눈을 크게 뜨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문제가 생겼거나 한 것은 아니오. 사실 칠주도를 정벌했을 때처럼 중요한 일은 다 끝내고 가는 편이 나도 마음이 놓이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 동북방 개척은 한두 해 걸릴 일이 아니지 않소. 내가 여기 계속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오."
"그렇지요. 대군께서 동북면에만 계속 계실 수가 없지요. 그래도 비록 중요한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나 대군께서 기반을 다 다져놓아 주셨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기반 위에서 나머지도 잘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다행이겠소."
"그리고 아예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한성부로 돌아오셨던 칠주도 정벌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여전히 정착도감 도제조이신 상태로 일하시는 장소만 옮기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실제로도 지금 정 직전(정인지)이 일하고 있는 한성부의 정착도감이 본 관청입니다. 그러니 대군께서 한성부로 가시는 게 중요한 일을 남겨 두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간 여기 나와 계셨던 것이 동북면의 일을 직접 도와주러 오래 머무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김효성의 말에 양녕이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맙소.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려."
"그런데 그 얘기를 전하러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오. 이번에 한성부에 가면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여기 제북항부터 육로를 따라 한 번 쭉 정착도감의 관할 지역을 돌아보고 갈까 해서 말이오."
"하긴 육로로 쭉 돌아보고 그대로 한성부로 가시려면 여기 제북항에서 시작하는 게 맞지요. 그럼 대군 한 분께서만 돌아보고 가시는 겁니까?"
"그렇소. 원래는 회경군단장(김종서)하고 같이 돌아보려 했는데, 일이 많아져서 같이 오지 못했소. 대신 바쁜 것이 끝나면 직접 다녀보고 항상 살피라 일러두었으니, 조만간 올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마침 점심때도 되었으니 우선 식사를 하시고, 그 다음 제가 여기 제북항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한참 뒤.
제북항 외곽.
식사를 마친 양녕은 미리 말했던 대로 김효성의 안내를 받아 제북항 일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항구 부두는 점석회로 되어 있었는데, 제북항 주변에 둘러진 것은 아직 목책이구려."
"예. 아직 점석회로 개축을 못 했습니다. 우선 부두를 깔아야 점석회를 들여오기 좋아지니 그쪽을 우선했지요. 대신 항구 바깥의 정말 중요한 몇몇 요충지에 목책으로 요새를 세워 추가로 방어 중입니다."
"점석회 우선순위가 밀린 상황에서 공께서 노고가 많소. 점석회 말고 다른 물자 순위도 좀 밀릴 텐데, 식량에 문제는 없소?"
"예. 작년에 농사를 시도해 본 게 제법 성공적이었습니다. 목책으로 방어되는 항구 일대와 밖에 지은 요새 근처에서 꾸준히 농사를 지어 군량에 보태려 합니다."
"좋은 소식이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여진족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어찌 지내고 있소?"
"포섭하고 조선말 가르치고 하는 과정이 너무 번거로워서 다 생략하고, 본인들 의사와 상관없이 일단 마을 전체를 조선인으로 귀화시킨 다음 일을 돕게 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조선말도 금방 배우더군요."
귀화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받아 달라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필요로 하는 능력과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귀화당했다는 그 상황에 양녕이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조선인이 먼저 되고 말은 나중에 배우다니, 조선말 배우고 조선인 연줄 만들어서 어떻게든 조선인이 되려던 칠주도 왜인들이 알면 뒤집어지겠소."
"실제로도 대군께서 칠주도 왜인들에게 하셨던 걸 참고했습니다. 귀화당한 이들에게 잘 대해 주면서, 다른 여진족이 와서 물어보면 본인들이 원해서 조선에 귀화한 것이고, 덕분에 지금 잘 살고 있노라고 말하게 시켰지요."
"자원도 당하고 귀화도 당하고 좋은 대접도 당하다니, 공 덕분에 그 여진족들이 진귀한 경험을 많이 하는구려. 하하."
그 말에 김효성도 웃음을 터뜨렸다.
* * *
며칠 뒤.
솔빈성. 관아.
조선의 손에 들어온 주루 호톤은 바로 솔빈성으로 명명되었다. 원래 이 지역의 이름으로 유서가 깊기도 했거니와, 발해의 솔빈부를 되찾았다는 것이 조선에 있어서는 엄청난 정통성과 위신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양녕은 애초에 솔빈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는지 양녕이 경원부를 되돌리고 일곱 진을 두겠다는 건의를 보냈을 때보다도 빠르게 승인이 났다.
"한잔 드시지요."
"고맙소."
조금 늦은 시간 솔빈성에 도착한 양녕은, 솔빈성에 주둔하며 관리를 맡은 우군사단 소속 2기병여단의 여단장인 이징옥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양녕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보던 이징옥이 말했다.
"멀리까지 오시느라 힘드셨겠습니다."
"다녀 본 적 있는 길이라 괜찮았소. 원래 아는 길은 짧게 느껴지는 법이지 않소."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거양성 동쪽에 쓸 만한 고을이라고는 여기 솔빈성하고 저 남쪽 제북항이 전부라 큰일입니다. 그 사이에 제대로 된 고을이 하나도 없어 하룻밤 쉬어갈 수가 없으니 솔빈성과 제북항을 오가려면 무조건 하루에 주파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소. 하지만 괜찮소. 임시로나마 군현의 편제가 잡혔으니 곧 다른 고을이 설치될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오."
양녕의 말에 이징옥이 되물었다.
"군현의 편제가 잡혔다니요?"
"여기 오기 전에 제북항에서도 우군사단장에게 내가 직접 전달한 것이지만, 비우진보다 북쪽, 즉 요동도사를 통해 승인을 받아 확실한 조선의 땅이 된 지역을 묶어 거솔도로 삼겠다는 건의가 주상의 승인을 받았소. 그 회신을 받고 기반은 다 다져졌구나 싶어 한성부로 돌아가겠다 한 것이고 말이오."
"거솔도라……. 거양성과 솔빈성을 딴 것이겠군요. 그런데 새로 만들어진 군현인데 부가 아니라 도입니까?"
이징옥의 질문에 양녕이 끄덕거리고 말했다.
"새로 얻은 땅이 엄청 넓은데도 고을이 몇 없지 않소. 그래서 뭘 어떻게 나눠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우선 도를 설치한 것이오. 부보다 넓은 지역에 쓰이던 명칭이니 어울리기도 하고, 다른 도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언젠가는 부로 나뉘어 개편될 것임을 나타내기도 하는 목적이외다."
"그렇군요. 그런데 사실 도 이름에 들어갈 정도로 활성화가 된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제북항이지 않습니까?"
자신이 맡은 고을이 중요한 취급을 받았다고 기뻐하기보다 원칙대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이징옥의 모습에 양녕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빈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오. 반대로 거양성은 깨진 종이라는 큰 증거가 있고 규모도 크고 활성화도 되어있기 때문에, 윤관이 설치한 최북단의 성이라는 의미가 있는 공험진을 제치고 도의 이름에 들어간 것이지. 어찌 보면 도 이름의 균형이 맞게 되었다 하겠소."
"복잡하군요. 그럼 거솔도의 관찰사는 누구입니까?"
"도원수(최윤덕)가 맡았소."
"어……. 그럼 회경군 도원수 겸 경원부윤 겸 거솔도 관찰사가 되신 것이군요. 힘드시겠습니다."
"일이 많긴 하오. 그걸 돕느라 회경군단장도 나를 못 따라온 것이고. 그러니 제장들께서 도원수와 군단장을 잘 도와주시기 바라오."
"예. 그러겠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 이징옥에게 양녕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 일대를 개간하고 둔전을 만드는 것이나, 기병을 육성하고 여진족을 관리하는 것은 잘 되어 가오?"
"잘 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균형을 잡는 게 좀 어렵습니다."
"균형?"
"이 일대는 습지가 많지만 강에서 좀 떨어진 곳은 괜찮은 목초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진족들은 가축, 특히나 말을 키울 때는 항상 풀을 먹여서 키우지 않습니까."
"그렇소. 곡식을 먹이기보다 풀어놓아 풀을 뜯게 하고, 방한도 잘 해주지 않고, 눈비가 내려도 그냥 맞게 둔다고 알고 있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오. 그렇게 키워야 언제 혹한이 몰아닥칠지 모르는 거친 북방에서 견디고 살 만큼 튼튼해지기도 하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말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니 다툼도 적어지지. 애초에 여진족들에게 그 많은 말들 먹일 곡식이나 덮어 줄 면포나 넣어둘 마구간이 없기도 하지만 말이오."
이징옥은 양녕이 자신의 말 이야기를 받아 주자, 기병여단장답게 눈을 빛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맞습니다. 북방산 말을 칭하는 호마 안에서 굳이 몽골의 달단마와 서역의 서역마를 나누어 취급하는 것에는 그런 사육법의 영향도 있지요. 달단마는 덩치가 작고 순간적으로 내는 힘이 약해서 중기병의 군마로 삼기는 모자란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초원의 풀만 뜯어 먹고도 살 수 있고, 전속력으로 몇 리를 달릴 수 있고, 질주하다가도 민첩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지요. 드넓은 몽골의 초원은 달단마들에게는 얼마든 뛰어다닐 수 있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먹을 것이 지천에 깔린, 그야말로 제집 앞마당과 같은 곳입니다."
"그렇기에 몽골이 달단마를 타고 천하를 말발굽 아래 꿇릴 수 있었겠소. 여진족은 그런 달단마의 품종과 사육법을 이어받은 것이겠고."
"예. 반대로 조선은 달단마와 그 사육법을 그대로 들여와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구력과 민첩성을 길러 달단마를 키워 낸다 한들, 조선처럼 산이 많고 길이 험한 지역에서는 초원만큼의 질주력을 발휘하기 힘듭니다. 민첩히 치고 빠지는 몽골인들의 전술을 써먹을 수도 없지요."
직접 기병 부대를 이끌어 본 이징옥의 말은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기에 양녕도 유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복시(전국의 목장과 말에 관한 일을 살피는 관청)나 목장에서 달단마보다도 대완마 같은 서역마 품종을 선호했던 것이구려. 하긴, 태조대왕께서 타셨던 여덟 마리 준마들도 다 서역마에서 나온 것들이었지."
"맞습니다. 서역마들은 달단마만큼은 아니지만 먼 거리를 주파하는 능력과, 궁기병이 적을 둘러싸고 돌며 화살을 쏟아붓는 전술을 쓰기에 충분한 민첩함을 가지고 있지요. 거기다가 중기병을 운용할 수 있을 만큼 체격이 크고 튼튼하며 순간적인 힘도 강합니다. 그런 말들의 종자를 받아 잘 크고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곡식도 적당히 주고, 상하지 않게 계절에 따라 잘 보살펴 가며 목적에 맞게 키워 내는 것이 고려 때부터 이어져 온 조선의 말 기르는 법입니다."
이징옥의 설명을 들은 양녕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넓은 평지로 이루어진 사막의 군벌이나 민병대는 연비와 적재량, 정비성이 좋은 민수용 트럭에 각종 화기를 얹어 운용했지만, 제대로 된 정규군은 연비와 정비성은 떨어지더라도 장갑차와 전차로 강한 기갑부대를 운용했다. 어찌 보면 전쟁이란 시간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듣고 있는 양녕에게 이징옥이 작게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