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48화
148화
"조선의 왕자가 사람을 보냈다고? 이상하구나. 내가 어디 무슨 샛길로 다닌 것도 아닌데 부령진 교역소에 갔다오는 동안 왜 못 마주친 거지? 그 사람은 기다리고 있느냐?"
"이미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선의 왕자는 우리보다도 북쪽에 머무르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부령진 교역소에 오가다가 마주쳤다면 그걸 더 수상히 여겨야겠지요."
판차의 말에 먼터무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 경원부를 저 두만강 근처로 되돌렸었지. 그래, 그럼 무슨 일로 사람을 보낸 거였느냐? 왔다가 내가 없는데도 돌아간 걸 보면 나한테 용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나 보구나."
"형님한테 용무가 있는 건 맞았습니다. 다만 급한 것도 아니고 얼굴을 보고 전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 저한테 전달해 달라고만 하고 돌아갔을 뿐입니다."
"그런 거였구나. 그래서 전달한다는 내용은 무엇이냐?"
"조만간 여기 오무호 근처 중요한 길목마다 관문을 지을 것이니 알아두라 했습니다."
내용을 들은 먼터무가 피식 웃었다.
"별걸 다 전달하러 오는구나. 건설을 시작했다고 알리는 것도 아니고 조만간 시작할 것이라고 알리러 오다니 말이야. 관문을 지을 거라는 걸 이전에 나에게 직접 말했으면서도 이리 또 사람을 보내는 걸 보니 조선의 왕자가 생긴 것과 다르게 마음 써 주는 게 세심하구나. 하긴, 내가 모셨던 그 어르신도 호탕하시면서도 정이 많고 소탈하셨지. 그 손자이니 당연히 닮은 것인가도 싶구나."
이성계를 떠올리며 그리운 듯 말하는 먼터무와 달리, 판차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심하게 마음을 써 준 게 아니라 오돌리 부족을, 정확히는 형님을 압박하려고 한 말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대답 없는 먼터무의 변발을 계속 땋아 가며 판차가 이어 말했다.
"여기 오무호에 직접 읍성을 짓지는 않고 대신 주변에 관문을 짓겠다고 했지만, 결국 그 관문들 하나하나가 작은 요새인 것 아닙니까. 심지어 잘 생각해보면 오무호에 읍성을 짓는 것보다도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읍성이라면 어떻게 점령해서 써먹어 보려고 해볼 수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 길목마다 막은 여러 관문을 어떻게 우리가 다 점령하겠습니까."
형제인 먼터무만 그 차이를 알아차릴 정도로 약간이긴 했지만, 평소보다 격앙된 목소리로 판차가 말을 이었다.
"설령 관문을 다 점령한다고 쳐도 우리는 조선인들보다 숫자가 적으니 한 관문 당 몇 사람 밖에 배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금방 쉽게 뚫려서 도로 빼앗기겠지요. 그런 관문을 오무호 주변 중요 길목마다 두면 우리는 포위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조선군이 오무호 남쪽만이 아니라 동쪽과 북쪽에도 진을 만들고 주둔했지요. 이미 큰 포위를 한 것이니 관문을 지어 작게 포위한 다음에는 오무호를 직접 목표로 삼을 겁니다."
판차의 말이 끝나고도 잠시 가만히 있던 먼터무가 조용히 말했다.
"어찌하겠느냐. 그렇다 해서 관문 대신 오무호에 읍성을 지어달라고 할 수도 없다. 알아서 점령해 달라고 하는 소리가 되니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짓지 말라고 거부할 수도 없지 않느냐. 조선이 이리 가깝고 강한데 명나라는 우리를 버렸으니, 우리는 조선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게야."
판차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 땋은 머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 했습니다."
손을 뒤통수로 가져가 변발을 만져 본 먼터무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고맙다. 역시 꼼꼼하게 잘 묶는구나."
"여진족이 변발 잘 땋는 것이 뭐 새삼스러울 거나 있습니까. 그럼 전 이만 교역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가려는 판차의 뒤에 대고 먼터무가 말했다.
"네가 내켜하지 않는 건 안다만, 그래도 교역할 때는 조선 옷을 입고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조선인이 아니라 다른 여진족들과 교역하러 가는 것입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 판차가 나가자 먼터무는 그대로 잠시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마 너도 언젠가는 내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혼잣말을 하고는 한참을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먼터무가 문득 방 한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녕이 주고 갔던 아르키 항아리와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역시 선물로 받은 자기 술병과 술잔을 넣어 놓은 버들고리를 가만히 보던 먼터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 * *
1426년 10월 중순 모일.
경원부 비우진. 양녕대군 집무실.
"대군.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한성부의 정착도감에서 정인지가 정리해서 보낸 각종 물자 현황을 살펴보던 양녕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군단장께서 오셨구려?"
양녕의 시선을 받은 회경군단장 김종서는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다. 정4품 의정부 사인으로 있다가 갑자기 종3품에 준하는 군급인 대장을 받은 것이 바로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양녕을 대하는 것이 어색했다. 게다가 군문에서 병사들을 통솔하는 이에게는 그만큼의 위엄이 있어야 한다면서 양녕이 장군이라면 품계를 불문하고 격식을 갖춰 말하는 것도 아직 다 적응되지 않기도 했다.
"예. 도원수께서는 오늘 공험진과 거양성을 확인하러 가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그런 것이었군. 이리 와서 앉으시오. 그래, 어떤 보고를 하러 오셨소?"
"올해 둔전을 만들어 본 결과에 대해 정리가 끝나서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확철이 지난 지도 좀 되었지. 어떻게 되었소? 시간이 촉박해서 비우진에 둔전을 많이 못 만들지 않았었소?"
"예. 시작했을 때 이미 여름이었던지라 밀과 보리는 재배 기간이 부족해서 콩하고 순무만 뿌려서 키웠습니다. 다행히 두 작물 다 성공적으로 수확까지 끝냈고, 품질도 괜찮았습니다."
"성공했다니 다행이오. 제대로 4윤작법을 실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콩하고 순무는 기간이 짧아도 재배하고 수확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는 건 증명된 셈이구려."
"예. 내년에는 한 해에 두 번 연달아 키우는 것도 실험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남쪽 청진포 일대에서도 둔전을 만들고 키워 본 것으로 아는데 그건 어찌 되었소? 북쪽인 여기 비우진에서 성공했으면 남쪽에서는 당연히 잘 되었을 것 같은데."
"역시 잘 되었습니다. 둔전은 물론이고, 병사들이 둔전에 콩하고 순무를 심는 걸 보고 따라한 백성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 백성들 역시 큰 문제없이 수확을 끝마쳤습니다."
"백성들이 처음 접하는 농법을, 그것도 하라고 시키거나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보고서 따라했단 말이오?"
일부라고는 하지만 농민들이 새 농법을 선뜻 받아들인 게 뜻밖이라는 양녕의 물음에 김종서가 대답했다.
"화전민이었던 이들이 대마군에서 해운에 종사하며 부유하게 살고 있습니다. 소금 진상으로 고생하던 삼척부 주민들은 지금은 사방에서 소금은 물론이고 석탄이며 점석회에 관한 일을 하며 돈을 많이 벌고 있지요. 어느 곳에서나 구박만 받던 신백정들도 이번에 정착도감을 따라와 군인이 되기도 하고 교역소에서 활약하기도 하면서 살림이 어지간한 농부보다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리고 그 세 사례 전부 대군께서 주도하셨고, 세상에서 처음으로 있던 일들이었습니다."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양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콩과 순무를 심는 게 내가 지시한 일이란 걸 듣고서는, 자신들도 그들처럼 잘 살 수 있을까 싶어서 전례가 없는 일인 걸 두려워하지 않고 새 농법을 따라서 시도했단 말이로군. 이거 백성들 기대에 어깨가 무거워서라도 4윤작법을 성공시켜야겠소."
양녕이 웃자 약간 긴장이 풀린 듯한 김종서가 다음 설명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번 청진포 농사와 수확에는 신백정들도 조금 참여시켜 봤습니다."
"벌써 말이오? 신백정들이 농사에 순순히 참여했소?"
"예. 마침 이번에 키운 게 순무와 콩이지 않았습니까? 순무는 크는 게 하루마다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자란다고 해서 성격 급한 신백정들의 흥미를 끌었습니다. 또 콩은 말에게 먹이는 사료가 되며 그 줄기와 깍지는 말의 사료가 되는 건 물론이고 연료로도 쓸모가 있다며 그 유용함을 들어 설득했더니 의외로 참여한 신백정이 많았습니다."
양녕이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반응은 어땠소?"
"순무는 자라는 게 빨라서 좋다는 예상대로의 반응 말고도, 잎과 줄기, 뿌리까지 버리는 부분 없이 다 쓸 수 있는 게 꼭 소나 돼지를 잡아서 머리에서 꼬리까지, 가죽에서 골수까지 다 쓰는 기분이라며 좋아했습니다."
"하하하! 신백정들다운 반응이구려."
"그리고 흥미를 끈 김에 콩으로는 두부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재료가 되는지 살펴 보니 여진족들과 교역하기 위해 쌓아 둔 소금이 매우 많았고, 그 대부분은 가축에게 먹일 용도로 만든 것이라 습기와 흙이 많이 섞인 품질 낮은 소금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간수가 많아서 그걸 쓰고 있습니다. 다행히 잘들 배우고 있습니다."
"재료가 되는지 살피러 갔다면 간수가 있어서 두부를 떠올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두부를 만들고자 한 다음 응고시킬 물질을 찾은 것이겠군. 두부를 고른 이유가 있소?"
흥미로 가득 빛나는 양녕의 시선을 받은 김종서가 다시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유치, 그러니까 조선에 귀화한지 오래된 몽골인들 가운데 수유(치즈)만드는 걸 업으로 삼은 이들을 아십니까?"
"기억하오. 수유를 만들어 공납으로 바치는 대신 군역을 면제받았는데, 나중에는 제대로 수유를 만들어 바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군역 면제를 노리고 몽골인인 척 거기 끼어드는 조선인까지 생겨나 엉망이 되었지. 그래서 아바마마께서 아예 수유 공납을 폐지해버리고 전부 군역 대상자로 만드셨고 말이오. 그런데 이번 일이 수유치들과 관련이 있소?"
"아무래도 사는 방식이 비슷해서 그런지, 수유치들과 어울리면서 수유 만드는 법을 배운 신백정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여기 와서도 가축 젖을 짜서 만드는 이들이 제법 있지요. 그런데 수유 만드는 것을 보니 두부 만드는 것과 비슷하기에, 두부 만드는 걸 가르치면 금방 배우지 않을까 싶어서 시켜 본 것입니다."
대답하고서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김종서에게 양녕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어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부를 고른 것이 좋은 선택이라 하려는 것이니 긴장할 것 없소. 역시 공께서는 대단하시구려."
"예?"
뜻밖의 칭찬에 약간 당황한 김종서에게 양녕이 말했다.
"두부라는 것이 콩으로 두유를 만들고 응고시킬 물질을 넣어 굳혀 만드는 것이니, 가축의 젖에 응고시킬 물질을 넣어 굳혀 만드는 수유와 비슷한 것은 맞소.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부의 재료인 콩은 유목민들 사는 북방이 원산지지."
"설마 우연히 비슷한 게 아니라 정말로 두부가 유락을 본따서 만든 것이라 닮은 것입니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두부의 기원에 관한 여러 설 가운데 하나일 뿐이오."
"설이라고는 하지만 충분히 근거가 있고 이치에 닿는 말입니다. 저도 그 기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오. 여하간 공께서 그 설을 접한 적 없으신 데도 두부와 수유가 닮았음을 통찰로 알아내신 게 대단하다 한 것이오. 신백정들은 유목민처럼 살 뿐인 조선인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유목민처럼 사는 여진족들을 어떻게 조선인으로 만들지를 연구할 좋은 대상이기도 하오. 그런데 공께서 유목민들의 특성을 잘 꿰뚫어 보시니, 장차 북방에 큰 기여를 하실 수 있을 게요."
양녕의 칭찬에 김종서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군. 대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면 내가 더 고맙소. 그나저나 일이 잘 풀리니 이거 잘 하면 내년은 무리더라도 후년에는 충분히 이 일대를 조선의 땅으로 확고히 할 수 있을 것 같소."
싱긋 웃는 양녕의 기대 가득한 시선에 다시 김종서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