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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46화 (14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46화

146화

양녕의 추리에 순간 당황했던 최만리였지만, 그럴싸하게 들리긴 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여진족들은 배를 타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하고 가축을 키우기도 하고 나무를 하기도 해서 먹고 살지요. 그런데 여기는 배 타기에는 물길이 엉망이고, 농사짓기에는 땅이 엉망이고, 나무는 자라지도 않고, 가축이 들어왔다가는 발이 빠져 못 나갈 곳입니다. 그들에겐 넓기만 하지 쓸모라고는 없으니 욕이 나올 만합니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웃겼는지 피식 웃은 최만리가 말을 이었다.

"그럼 여진족들이 '수빈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정말 뭐 같은 곳이다'라고 한 것이 이상하게 전해져서 조선의 기록에 수빈강 하구 이름이 '정말 뭐 같은 곳'이라고 쓰인 셈이 되는 군요."

"내 추측은 그렇네. 그러니 결국 아민이 어디인지 찾지 못한다면 아예 새로 이름을 짓는 게 옳을 것이야. 만에 하나라도 고을 이름이 너희 아버지 운운이 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녕과 최만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고 난 다음 눈가를 닦은 최만리가 말했다.

"그나저나 수빈강 하구에 항구를 만들어 수운을 잇고자 했던 것인데, 이렇게 진창만 이어진다면 정작 항구 만들 곳이 없겠습니다."

"괜찮네. 해안이 이리도 긴데 조금만 더 가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나."

그렇게 말한 양녕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기색으로 미소 지었다.

* * *

1426년 9월 초순 모일.

주루 호톤 남쪽. 반도 남단(현 블라디보스토크).

양녕과 최만리가 한참을 이동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원래 역사에서 후에 블라디보스토크라 불리게 되는 지역이었다.

그곳에 펼쳐진 광경을 둘러보며 최만리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군 말씀처럼 정말로 항구를 만들기 좋은 곳이 나왔습니다. 반도 끝에 꼭 사람이 파놓은 것처럼 꺾어 들어오는 만이 있다니, 항구를 만들기 좋은 정도가 아니라 꼭 누가 항구로 쓰라고 땅을 파서 만든 것만 같을 정도입니다."

"이 큰 땅을 깎는단 말인가?"

"대군께서는 산만 있던 대마도를 깎아서 평지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양녕이 껄껄 웃고 있는데, 마침 다가온 최윤덕이 양녕에게 말했다.

"대군. 병사들이 탐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벌써 말이오? 정말 빠르군. 그래서 뭔가 좀 중요한 걸 알아낸 것이 있소?"

"이 근처에 작은 어촌 마을을 꾸리고 사는 여진족들에게 물어봐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이 일대는 바다까지 전부 얼어붙어서 배를 타고 나갈 수도 없고, 땅에 올려놓지 않은 배는 바다와 같이 얼어서 상해버릴 정도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꺾어 들어오는 만 안쪽만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합니다. 또 여기서 바다를 건너면 반도 끝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큰 섬이 있는데, 그 큰 섬에는 이것보다 더 땅으로 길게 들어오는 만이 있다 합니다."

최윤덕의 설명을 들은 양녕은 자신이 맞게 찾아와서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최만리는 거듭 감탄하며 말했다.

"바닷물이 얼어 버릴 정도라도 정말 어지간히 추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또 그 와중에도 얼지 않는다 하니 진짜로 항구로 쓰라고 만든 땅 같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수빈강에서 멀어서 바로 수운으로 이을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어차피 수빈강 하구에 항구를 지을 곳이 없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네. 여기서 주루 호톤까지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청진포에서 회령진까지도 물자를 가지고 오가는데 여기서 주루 호톤까지라고 못 오갈 건 없겠지."

최윤덕도 무관으로서 마음에 드는 점을 말했다.

"그리고 반도 끝에 있는 조건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반도 동쪽은 전부 산이고, 서쪽에만 그나마 평지라 부를 만한 게 있지 않습니까. 여기로 올 수 있는 길목 자체가 한정되어 있으니, 육지 쪽에서 여진족들이 오더라도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동감이오. 그저 겨울에 이 일대가 얼어서 배가 오가기 어렵다는 게 유일한 단점일 뿐이오."

"그건 얼음이 단단히 얼었으면 그 위로 썰매를 끌어도 될 것이고, 아니면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하면 될 것입니다. 애초에 바다가 얼고 녹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얼지 않는 남쪽까지 내려가서 항구를 만들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최선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고맙네. 그럼 여기를 남쪽에서 이어져 올라온 해로를 잇는 항구로 삼아야겠네. 일단 이름이 있어야겠는데, 혹시 이 근처 여진족들이 이미 쓰던 이름이 있다 하오?"

양녕의 질문에 최윤덕이 답했다.

"안 그래도 병사들에게 그것도 물어보고 오라 시켰는데, 여기에 마을이 달랑 하나만 있어 구분할 필요가 없는 탓인지 따로 이름이 없다 합니다. 다른 여진족들도 그저 바닷가 작은 마을이라고만 부르는 모양입니다."

"장차 큰 항구가 될 것인데 계속 작은 마을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새로 짓는 게 낫겠구려."

그리고 짧게 생각한 양녕이 다시 말했다.

"장차 조선이 북방을 제패하는 근간이 될 항구이니 제북항이라 하면 어떻겠소?"

원래 역사에서 이 지역에 붙게 될 이름인 블라디보스토크가 동방의 정복자라는 의미인 것에서 착안해서, 지금의 조선 상황에 어울리게 바꾸어 본 것이었다.

"제북항이라. 호방한 기상이 느껴지는 좋은 이름입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고맙소. 그럼 여기가 이름값을 하게 하려면 준비할 게 참 많겠소."

양녕의 말에 주변을 쓱 둘러본 최윤덕이 말했다.

"우선 여기 있던 여진족 마을은 그대로 흡수해야겠지요. 이 일대 지리를 잘 아는 것은 물론이고, 어민들이라 뱃길이나 해류도 잘 알 테니 잘 대해 줘서 조선인으로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산길들도 알아내서 요충지마다 요새를 지어야 이 제북항을 지킬 수 있겠지요."

최만리도 의견을 내놓았다.

"동쪽 바다가 워낙 파도와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하니, 지금 최북단 항구인 경흥진에서 바로 여기까지 오려고 하다가는 사고가 나기 십상일 것입니다. 제북항에 항구 시설을 만들 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오는 해로 중간에도 곳곳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항구를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의견을 들은 양녕이 끄덕거리고 말했다.

"두 의견 다 일리가 있소. 다만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지금 바로 시작할 수는 없을 것이오. 내년 봄이 오더라도 우선 할 일이 많소. 경원부의 일곱 진을 완성해야 하고, 그 다음 공험진과 거양성을 완성하면서 경원부와 이어지는 역참을 만들어야 하오. 그 과정에서 점석회하고 인력이 엄청 들어갈 것이니, 여기 제북항과 작은 항구들을 만드는 것은 순위가 뒤로 밀릴 것이오."

"그렇겠지요. 사실 여기는 여진족을 상대하는 최전방도 아니니 크게 급할 것도 없습니다."

"예. 또 내륙에 있는 다른 진들은 점석회를 옮겨가는 과정이 힘들지만 항구라면 배에 싣고 와서 바로 내리면 그만이니 나중에 만들더라도 금방 될 것입니다."

"좋소. 그럼 그 많은 것들을 다 해결하고 이 제북항을 완성하고, 제북항의 이름대로 북방을 제패할 때까지 열심히 해 봅시다."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대군."

그렇게 말한 세 사람은 자신감과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 * *

며칠 뒤.

강계부. 여연군 인근 모처.

달빛만이 사방을 비추는 어둠 속. 말을 타고 소리 없이 서 있는 여진족들 사이에 훌리가이 부족 족장 이만주가 있었다.

이만주는 초조함을 가라앉히려는 듯 표범가죽 모자를 만져 보고, 온갖 모피로 만든 겉옷을 쓰다듬고, 목에 두른 여우 꼬리를 만지작거리더니, 자신이 앉아 있는 멧돼지 가죽 안장을 손끝으로 작게 툭툭 치기 시작했다.

"족장님. 돌아온 모양입니다."

누군가 꺼낸 그 말에 이만주가 그 쪽을 보았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한 무리의 사내가 말을 타고 이만주에게 다가왔다. 모든 말발굽에 두툼한 짚신을 신긴 덕분에 소리만으로는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어찌 되었느냐?"

이만주가 호리호리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묵직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묻자, 다가온 사내들이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털러 들어갈 구석이 보이질 않습니다."

좌절감 섞인 그 목소리에 이만주 옆에서 기다리던 사내가 물었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자네가 그리 말하는가?"

"말에서 내려 산길을 따라 몰래 읍성까지 가 보았습니다. 분명히 몇 달 전에 보았을 때는 거의 다 토축성이고 가파른 곳에만 돌로 쌓은 정도였는데, 지금은 모든 읍성이 다 돌로 높게 쌓여 있습니다."

"몇 달 만에 이 산속에 돌로 성을 쌓았다고?"

"예. 그것도 돌을 얼마나 치밀하게 다듬어서 쌓았는지, 손으로 잡고 기어 올라갈 틈새도 없을 정도입니다."

"독한 놈들. 아주 작정을 했군."

두 사내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이만주가 다시 질문했다.

"설마 성벽 밖에 민가가 하나도 없었던 게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민가를 털더라도 물건을 가지고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겁니다."

"또 뭔가 있느냐?"

이만주의 질문에 사내는 조금 전 본 것을 떠올리며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예. 중요한 길목마다 요새와 관문이 있었는데, 그것들도 전부 다 치밀하게 다듬은 돌로 쌓은 성벽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다른 사내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조선인들이 정말 독하고도 대단한 놈들입니다. 대체 얼마나 사람을 데려다가 부려먹었으면 이 짧은 시간에 전부 돌로 성벽을 두른단 말입니까."

점석회로 성벽을 그냥 만들면 한 덩어리 돌로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여진족이나 명나라가 특이하게 여기고 비밀을 캐내려 들 수 있었다. 그래서 점석회 성벽 표면이 잘 다듬은 돌로 쌓은 것처럼 보이게끔 거푸집에 손을 쓴 것이었지만, 여진족들이 그런 비밀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족장님. 곧 겨울이 오는데 이래서는 큰일입니다."

그 말에 이만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훌리가이 부족이 어업도 하고 사냥도 하고 농사도 짓는다고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까지 온갖 노력을 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에는 하필 가장 많은 식량을 얻는 수단이었던 농사가 망해 버렸다.

"읍성은 건드릴 수도 없을 것이고, 읍성 밖 민가를 털더라도 식량을 가지고 관문이나 요새를 뚫고 나올 수 없겠지. 그렇다고 산 속으로 운반하다가는 속도를 낼 수 없어 금방 추격당할 것이다. 습격은 취소다."

조선 땅을 약탈해 식량을 충당하려던 계획이 실패했다고 이만주가 직접 말하자, 그 자리에 모인 사내들의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그 모습을 쓱 둘러본 이만주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들 낙담하지 마라. 조선을 털려던 계획이 실패한 것이지, 아직 털 곳은 많아. 자, 괜히 여기서 어물거리다가 조선에 들키면 더 귀찮아. 어서 여기를 뜨자. 오늘은 일단 가서 푹 자고, 내일 다른 부족이건 요동의 마을이건 털어서 식량을 충당하면 그만이지 않느냐."

그 위로에 사내들이 조금 기운이 난 듯 고개를 들자 이만주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조선이 그리 성벽을 철저히 쌓았다면 앞으로 조선 땅을 약탈하는 건 어렵겠지. 아무래도 안정적으로 식량을 얻을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다. 그러니 다들 아무런 걱정 하지 말고 나를 따르거라."

그렇게 말한 이만주가 자신감과 오만함이 섞인 얼굴로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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