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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44화 (14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44화

144화

1426년 8월 하순 모일.

거양성. 임시 관아.

양녕과 요동도사가 거양성에 도착했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해가 지기 전이었다. 다음 날 바로 요동으로 떠나야 하는 요동도사를 위해서 군영이라 좋은 음식은 없지만 조촐하게나마 연회를 열기로 했고, 연회가 열리기 전 약간 남는 시간에 양녕을 찾아온 최만리는 양녕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듣고 있었다.

"그럼 제 예상보다도 엄청 순순히 세 지역이 각각 공험진, 선춘령, 거양성임을 인정해 준 것이군요. 명나라의 최선은 조선이 두만강 일대에서 북쪽으로 더 나오지 못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명나라의 최선은 그렇지. 하지만 요동도사에게는 조금 달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만리에게 어디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지 잠시 생각하던 양녕이 입을 열었다.

"자네 최근 몽골의 상황을 아는가? 오이라트 부족들의 추대로 칸의 자리에 올랐던 오이라다이 칸이 죽고, 그 혼란을 틈타 북원 부족들의 추대를 받은 아다이 칸이 새로 즉위했지."

"그건 들은 적 있습니다. 명나라의 지원을 받던 오이라트에서 명나라와 적대하던 북원으로 몽골 전체의 명분이 넘어가 버렸고, 그래서 북원 견제에 다급해진 명나라가 조선의 말과 면포를 반겼다는 얘기였지요."

"그렇네. 그리고 북원은 요동과 맞닿아 있어서 방어가 다급한데, 정작 요동도사의 관할에 있던 건주좌위의 오돌리 부족은 두만강 일대로 피신하고 건주위의 이만주 역시 훌리가이 부족을 이끌고 파저강 일대로 피신했지."

"이만주는 그래도 요동도사의 영향권에 있는 것 아닙니까?"

"형식상만 그러한 수준이야. 실제로 요동도사의 통제가 제대로 되는 범위는 잘 쳐줘야 조선의 삭주목에서 압록강을 건넌 지점 정도까지가 동쪽 끝인데, 이만주가 자리 잡은 파저강 일대는 그보다 더 동쪽 아닌가. 우연히 그리된 것이 아니라 이만주가 자기 권력에 도움이 되는 요동도사에게서 너무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요동도사가 자신에게 제대로 간섭할 수 없을 절묘한 위치를 골라 이주했다고 봐야겠지."

"그럼 요동도사가 골머리 좀 썩는 상황이겠군요."

"그렇지. 한때 요동을 위협하는 오랑캐였던 훌리가이와 오돌리 두 부족을 휘하의 병력으로 만들어 북원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두 여진 부족은 다시 이탈해서 위험요소가 되었고 대치 중이던 북원은 오히려 명분을 얻고 강해졌으니 말이야."

"요동도사는 여진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문책당할 것이고, 요동을 잃는다면 아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지요. 그런데 북원만이 아니라 여진족들이 뭉쳐서 요동을 위협할 가능성까지 생겼군요."

"그렇네. 그래서 차라리 요동에서 먼 여기 일대의 여진족들을 조선이 관리할 수 있도록 공험진의 위치를 바로 인정해 준 걸세. 조선도 여진족이 뭉치면 위험한 세력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관리할 테니 말이야."

양녕의 그 말에 최만리가 이해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명나라는 북원과 여진족,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무조건 요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조선은 동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요동이 필요합니다. 원래대로라면 둘 다 만족하는 결과는 없겠지요. 명나라가 요동을 뺏기거나, 조선이 요동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동을 지켜야만 하는 요동도사 입장에선 조선이 동북방을 차지하더라도 안정만 된다면 그것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도와줄 용의까지 있는 거지. 그리고 그것이 명과 우리, 모두에게 만족할 만한 상황일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명나라에 손해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요동도사는 요동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가 처벌받느니 이 방법을 택할 테니, 이것을 두고 명나라의 최선과 요동도사의 최선이 다르다 하신 거였군요."

"그렇네. 그래서 오늘도 증거를 조작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다가 금방 포기한 것이지. 두만강 일대로 조선 국경을 못 박는 명나라의 최선을 달성할 수 없어졌으면, 자신의 최선이라도 달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요동도사 한 사람을 이익과 안위로 쥐고 흔들어서 명나라 전체의 이익과 땅을 마음대로 하시니, 꼭 코뚜레를 잡아당겨서 커다란 황소를 다루시는 것 같습니다."

양녕은 최만리의 그 비유를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서 누가 들을 수도 있어서 차마 크게 웃지는 못하고 끅끅거리며 한참을 웃은 양녕이 최만리에게 말했다.

"역시 자네는 나하고 통하는 곳이 있어."

영문도 모르고 양녕이 웃는 것을 보고만 있던 최만리가 물었다.

"코뚜레에 뭔가 있습니까?"

"그런 게 있었네. 나중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해주겠네."

최만리가 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양녕이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아마 요동도사가 증거 찾기를 금방 포기한 건 이 일대를 정확히 몰라서 그런 것도 있을 걸세."

양녕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오늘 요동도사를 안내할 때 들고 갔던 지도를 짚었다. 측량으로 얻어낸 자세한 지리를 고의적으로 몇몇 누락시킨 지도였다.

"여기서 살던 우디거들도 지리를 제대로 몰라서 무타우타가 모아온 자료가 제멋대로였지. 우리도 이렇게 와서 자리를 잡고 꾸준히 측량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 말이야. 그런데 저 멀리에 있는 명나라는 오죽하겠는가. 여기가 두만강에서 별로 안 떨어진 것처럼 그려 놓은 이 지도를 오늘 수시로 보고서도 눈치 못 챈 걸 보면 이 일대 크기를 정확히 모르는 게 분명해."

"확실히 이 지도상으로는 공험진이 두만강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이번에 정확히 어느 정도 넓이의 땅을 얻은 것인지 혹시 아십니까?"

"요동도사가 말한 기준인 백두산 동쪽이자 선춘령 남쪽에 해당하는 전 지역을 얻는다고 치면…… 얼추 삼남을 다 합친 넓이쯤 나오지 싶군."

양녕의 그 말에 최만리가 기겁하며 말했다.

"그만큼이나 됩니까?"

"그렇네. 우리가 지금 확보하고 측량한 지역은 극히 일부야. 남쪽으로 두만강, 서쪽과 북쪽으로 수빈강으로 둘러싸인 안쪽 범위일 뿐이고, 그나마도 동쪽으로는 거양성에서 멈추지 않았는가."

"아무래도 거양성 동쪽으로 엄청 넓게 있는 모양이군요. 요동도사가 그걸 알았다면 당연히 동쪽으로도 진출 제한을 걸었을 테니, 정말 어지간히 이 근처 지리를 모르나 봅니다."

"어쩌면 얼추 알지도 모르네. 하지만 척박한 땅이니 얻어 봤자 별 쓸모없겠거니 했을 수도 있고 말이야. 장성 이북이 넓다고는 하나 농사가 안 되는 척박한 지역인지라, 명나라도 몽골을 견제하러 원정을 가면 갔지 아예 정복해 편입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야."

"하기야 새로 얻은 땅 넓이가 아무리 삼남만 하다고 해도, 조선 본토에서 제일 따뜻하고 농사가 잘 되어 인구가 많은 삼남하고, 춥고 산만 많고 농사도 힘든 이 일대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최만리가 약간 이상하다는 듯 덧붙였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 보면 사실 조선이 이번에 넓은 땅을 얻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것 아닙니까? 조선이 얻었다고 이 일대가 갑자기 따뜻해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따뜻해지지는 않겠지만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네. 자, 시간도 제법 지났으니 오늘은 이만 얘기하고 연회에 갑세. 자세한 건 조만간 말해줄 날이 올 걸세."

그렇게 말한 양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만리도 잠시 궁금증은 접어 두고 따라서 일어났다.

* * *

1426년 9월 초순 모일.

거양성 동쪽. 수빈강 강변 모처.

요동도사가 요동으로 돌아가고 며칠 뒤. 양녕과 최만리, 최윤덕은 병사를 이끌고 거양성을 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주루 호톤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수빈강이 바다로 들어간다는 아민이라는 지역이 어디인지 확실히 파악해 해운으로 잇기 위한 첫 거양성 동쪽 탐사였다.

"거양성 근처는 사방이 산이었는데, 거기서 조금 동쪽으로 나오니 이리도 넓은 평야가 있다니 참 신기합니다. 아마도 이 평야에서 밀고 들어오는 여진족들을 막기 위해서 산이 많아지는 초입에 거양성을 세운 것이겠지요."

양녕 바로 옆에서 말을 타고 가던 최만리가 사방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흥미로움으로 가득한 표정을 본 양녕이 북쪽으로 길게 뻗은 평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넓은 평야 한참 너머에 큰 호수가 있네. 미타호라는 이름이지."

양녕이 가리킨 손끝을 따라 미타호, 즉 원래 역사에서 후에 한카 호로 불리게 될 호수가 있을 평야 저 멀리를 보던 최만리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미타호라면 신당서에 나와 있는 발해국의 호수인 미타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서쪽에 타주가 있고 동쪽에 미주가 있는 바로 그 미타호지."

"책에서만 보던 것을 이리 가까이에서 느끼다니, 기분이 새롭습니다."

"아직 새로워하기는 이르네. 더 재밌는 사실이 있으니 말이야."

"무엇입니까?"

"미타호는 경원부 전체하고 넓이가 비슷하네."

그 말에 놀란 최만리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경원목도 아니고 경원부 전체 만하다니, 거의 바다나 다름이 없군요. 저는 호수라고 해서 얼마 안 크겠거니 했습니다."

"그랬을 것 같았네. 그런 큰 호수가 천하에 드무니 당연한 일이지."

혹시라도 미타호가 보일까 눈을 가늘게 뜨고 평야 저 멀리를 한참 보던 최만리가 다시 앞을 보고 양녕에게 말했다.

"그런 커다란 호수가 여기서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 평야도 엄청 큰가 봅니다. 지금이야 여진족들이 다니고 저희가 지금 가는 이 강변 길 빼면 전부 풀밭에 진창인 것 같지만, 잘만 개간하면 농사짓기 좋겠군요."

"쉽지는 않을 걸세. 여기는 지금 4윤작법을 실험 중인 비우진보다도 한참 북쪽이지 않은가. 비우진에서 농사가 되더라도 여기서 농사를 지으려면 또 농사법을 실험해야 하고, 실험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

"그건 그렇겠군요. 이리도 넓은 땅이 있는데 아쉽습니다. 하긴 어차피 이 평야도 대부분 선춘령보다 북쪽이고 미타호는 그보다도 더 북쪽일 테니 엄밀히 따지면 조선 영토가 아니긴 하지요. 대군께서도 그래서 딱히 쓸모가 없는 땅이라 국경에 굳이 넣지 않으신 겁니까?"

양녕은 작게 고개를 젓고는 최만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건 아닐세. 어차피 명나라는 거양성 동쪽으로 산지를 빠져나오면 이런 거대한 평야가 있는 것도 모를 것이야. 미타호에 대한 것도 어렴풋하게만 알겠지. 무엇보다 국경을 넘어간다 한들 요동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면 크게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네. 공험진 일대에 완벽하게 터를 잡고 나면, 다음에는 미타호를 확보하러 북진할 것이야."

국경을 넘을 것이라는 양녕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킨 최만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농사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도 미타호까지 진출하시려는 것을 보면 무언가 이유가 있나봅니다."

"그렇네. 미타호는 호수지만 그 크기가 크다보니 미타호에서 발원하는 강이 있네. 여진족들이 숭가차 강이라 하는 그 짧은 강은 곧 우수리 강에 합류하고, 우수리 강은 계속 흘러가서 사할리얀 강. 즉 흑룡강에 합류해서 바다까지 가네."

"미타호가 흑룡강까지 이어진다니 신기합……."

무언가 눈치챈 최만리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양녕에게 미타호까지 진출하려는 이유를 물었더니, 미타호가 흑룡강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라 대답한 것이다.

그 의미를 파악한 최만리는 등 뒤를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장차 흑룡강까지 가실 계획이신 겁니까?"

"그렇네."

짧고 단호하게 대답한 양녕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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