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43화 (14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43화

143화

1426년 8월 하순 모일.

거양성 서쪽. 선춘령(현 흑룡강성 도하진 인근).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선춘령 비탈을 올라가면서, 요동도사는 땅바닥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바닥에 가득히 자라 있던 풀들은 무거운 것을 끌고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으깨져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다. 요동도사가 비탈길을 따라 선춘령 위로 계속 이어지는 그 자국을 살피면서 올라가는 것을 슬쩍 본 양녕은 속으로 확신했다.

'역시 이것도 우디거들에게 들은 게 있는 모양이군. 우디거들을 비석 운반에 참여시키지는 않았지만, 조선 병사들이 무언가 돌덩어리를 끌고 선춘령으로 올라가는 것은 봤으니 그 정도 얘기는 퍼질 만했지.'

자국을 내려다보던 요동도사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 혼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양녕은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라고는 없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선이 내용을 위조한 비석을 올려놓았을 거라 추측하고 증거를 잡았다고 좋아하고 있겠지. 많이 좋아해 둬라. 올라간 다음 반응이 기대되니까.'

그리고 마침내 선춘령 위 비석 앞에 도착한 요동도사는 양녕의 기대 이상으로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비석을 들여다보았다. 땅바닥에 서 있는 비석은 오래된 것처럼 표면이 전체적으로 삭아 있을 뿐만 아니라, 사면에 새겨져 있었던 글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부 깨져 있었다.

"이 비석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당혹스럽다는 목소리로 요동도사가 묻자 양녕은 심란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여진족들이 글자를 깨 버린 것 같습니다. 여기에 무슨 영험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서 돌조각을 떼어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야인들이 흔히 그렇듯 수준 높고 잘 만들어진 것을 부수고 망치고 싶어 하는 추잡한 성정에서 훼손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것들을 두신 겁니까?"

요동도사가 가리킨 곳에는 큼직한 석조 불상 네 좌가 비석의 사면을 지키듯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 깨진 범종도 동티가 날까 봐 몇 백 년을 건드리지 않았던 여진족들입니다. 불상을 둘러두면 이 비석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더라도 영험한 것이라 여기건, 대단한 것에 대한 심술이 나건 간에 동티가 두려워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 이렇게 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양녕은 쓴웃음을 짓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뭐 이미 깨질 만큼 깨져서 글자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으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양녕은 속으로 여유롭게 웃었다. 저 비석은 이번에 설치한 것이 맞았다. 대신 선춘령에 가지고 올라올 때 장인들을 시켜 새롭게 만든 석조 불상들도 같이 가지고 올라왔다.

우디거들이 그 장면을 보더라도 몇 개나 가져왔는지, 무엇을 가져왔는지 가까이 와서 보지 않았기에 자세히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비석을 이번에 가지고 올라간 것인지 원래 있던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고, 석조 불상들을 옮겼으니 바닥에 끌린 자국이 생기는 것도 설명 가능했다.

'비석이 잘 손상되어야 불상을 가져와 두른 이유가 그럴싸하게 설명되는데, 생각대로 되어서 다행이다.'

비석과 불상을 설치한 다음에는 비석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병사들을 두어 우디거들이 살피러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목초액을 비석 사방에 바르고 모서리와 글자를 깨는 것을 수시로 반복해 비석을 훼손시켰다. 어차피 비석 새기는 장인이 의심하지 않도록 적당히 그럴싸한 내용을 새기게 했던 것이니 내용이 사라져도 괜찮고, 오히려 읽을 수 없게 훼손되면 좋은 일이었다.

'목초액은 숯 굽는 과정에서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강산성 물질이다. 하지만 산성 물질이 암석을 부식시킨다는 사실이나, 강산성과 약산성의 차이는 고사하고 산과 염기의 개념조차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시대다. 목초액으로 비석 표면을 부식시킨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할 테니 정말로 이 비석이 오랜 시간동안 풍화된 것이라 여기겠지. 거기다가 깨끗한 새 석불까지 둘러놓았으니 대조되어서 더 그리 보일 것이고 말이야.'

요동도사는 심란한 표정으로 불상을 노려보듯 가만히 보고 있었다.

석불을 끌어올려 설치해서 우디거들의 증언을 쓸모없게 만들고, 바닥의 풀이 짓눌린 것도 증거가 될 수 없게 했을 가능성은 요동도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명나라부터가 노아간도지휘사사를 새로 세웠다는 내용을 새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아예 영녕사라고 절을 새로 만들어서 그 경내에 비석을 두었을 정도이니, 비석 보호를 위해 석불을 두른 것 자체를 이상하다고 지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래쪽을 좀 파 보고 싶습니다."

그러던 요동도사가 비석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갑자기 툭 던진 그 한마디에 주변이 소리 없이 술렁였다.

"아래쪽을 파시다니요?"

"비석 비율이 뭔가 이상합니다. 꼭…… 뭐라 짚어 말할 수는 없으나 한번 뿌리 쪽을 파서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을 시키겠습니다."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양녕은 속으로 요동도사를 비웃었다.

'비석 비율이 꼭 급하게 만든 것처럼 이상하다는 말을 하려다 만 것이겠지. 아마 어떻게 비석을 빠르게 삭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니, 다른 곳에서 이 비석이 위조된 것이라는 증거를 찾고 싶은 모양인데, 그 시점에서 넌 이미 걸려든 거다.'

준비를 마친 병사들은 양녕의 지시대로 비석 주변 불상들을 옆으로 치워두고, 아래를 팠을 때 비석이 넘어지지 않도록 사방에 지지대를 설치한 다음 비석이 혹시라도 상하지 않도록 나무 삽을 들고 비석 밑동을 조심스럽게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요동도사와 양녕은 물론이고 명나라 관리들과 최윤덕을 비롯한 조선 군인들 모두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데, 문득 땅을 파고 들어가던 나무 삽 하나에서 턱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비석을 만들어서 세웠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병사들만 골라 땅을 파게 시켰던 덕분에, 정말로 당황해서 삽을 든 상태로 굳어 버린 조선 병사가 양녕의 물음에 답했다.

"돌……에 닿은 것 같습니다. 그것도 좀 큰 돌입니다."

양녕이 요동도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돌 때문에 더 안 파지면 옆으로 옮겨가면서 파지는 곳을 파면 되지 않겠습니까?"

비석 뿌리가 다 드러나도록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아 초조해진 요동도사의 그 말에 다시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작업이 진행될수록 요동도사의 표정은 오히려 굳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큰 돌이 막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돌 위를 덮은 흙을 치우자, 사람이 다듬은 것처럼 반듯하게 네모진 돌 윗면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신석(비석 본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래에 비대석(비석 받침돌)도 있었나 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양녕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한 요동도사가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비대석도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이어서 비대석 옆면 아래를 조금 더 파본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이 큰 돌 아래에는 그냥 다 흙입니다. 비석은 이게 전부인가 봅니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요동도사가 갑자기 비석으로 다가가 비대석 앞에 쪼그려 앉았다. 비대석 앞면에는 아직 젖은 흙이 많이 묻어있었다.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심호흡을 한 요동도사가 침묵 속의 시선을 받으며 그 흙을 맨손으로 털기 시작했다.

"어?"

한참 흙을 털던 요동도사가 무심코 얼빠진 소리를 내고, 무슨 일인가 비대석을 들여다본 수많은 사람들도 저마다 눈을 크게 뜨거나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저 글자는……."

비대석 앞면에는 큼직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새겨진 부분에 젖은 흙이 박히듯 들어차 있어 오히려 읽기 쉬운 그 글자는 '고려지경'이라는 네 글자였다.

"고개 위라 돌을 옮기기 힘들어 그냥 비신석만 세운 줄 알았는데 제대로 된 비대석도 있었고, 그것도 고려의 국경이라고 새겨진 비대석이었군요."

짧은 침묵을 깬 최윤덕의 말에 양녕도 한마디 했다.

"그러게 말이오. 비문이 다 깎이고 삭아 없어져 있어서 사실 의심도 되긴 했었는데, 이걸 보니 이게 윤관의 비가 맞는 것 같소. 땅 속에 있으니 여진족들도 존재를 몰라 부수지 못한 것이겠지."

요동도사는 애써 당혹감을 숨기며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이 비석을 위조했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비석 아래를 판 것인데, 정작 수많은 증인이 보는 가운데서 자기 손으로 조선에 유리한 증거를 찾아줘 버린 것이다. 그런 요동도사에게 양녕이 모르는 척 짐짓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 덕분에 이게 그냥 훼손된 돌덩어리가 아니라 귀중한 비석임이 밝혀졌습니다. 주변 땅도 비대석 근처까지 낮춰 깎아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석불도 거기 맞춰서 다시 배치하고, 비석을 보호할 누각도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비대석을 발견하기까지의 내력을 알리는 비석도 옆에 하나 새로 세워야겠습니다. 거기에 공께서 비대석을 찾아주셨음을 기리는 내용을 넣어도 되겠습니까?"

"예. 그리해 주시면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힘없이 대답하는 요동도사를 보며 양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요동도사가 직접 비대석을 발견하게 만들었으니 완벽한 성공이다. 거기다 이게 정말 고려 때 비석인지 확인하려고 해 봤자 결국 비문에서 깎이고 남은 부분의 필체를 어떻게든 이 일대의 고려 때 비석들과 대조해 보는 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데, 그 비석들의 탁본을 종합해서 나온 필체로 비신석을 새긴 것이니 아무리 대조하더라도 당연히 이게 고려 때 비석이라는 결론만 나오겠지. 혹시라도 비석을 옮겨와 설치하는 과정에서 생겼을지 모르는 자잘한 증거들도 재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이 주변을 싹 다듬으면 사라질 것이고 말이야.'

비대석 작전은 양녕의 완승이었다.

* * *

한참 뒤.

공험진(현 길림성 나자구진).

양녕은 선춘령까지 온 김에 공험진까지 보자며 요동도사를 공험진까지 데려왔다.

공험진에는 거양성이나 선춘령과 다르게 자체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어차피 거양성과 선춘령 위치가 정해지면 여기가 공험진일 수밖에 없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아는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주변을 둘러만 보던 요동도사가 양녕에게 말했다.

"오늘 직접 확인해 본 세 곳. 거양성, 선춘령, 공험진이 전부 제 위치가 맞음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두만강이 아니라 여기까지 조선의 국경을 넓혀 확고히 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주기적으로나마 관리했다고 하니 조선의 능력도 되는 것 같고, 무엇보다 선황제께서 공험진을 조선의 국경으로 인정하셨으니 제가 감히 바꿀 수 없는 것이지요."

양녕이 기대하며 가만히 듣고 있는데, 잠시 말을 멈추었던 요동도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공험진 이남이 조선의 땅인 것은 선황제의 약조입니다. 그러나 두만강 일대 여진족만이 조선의 관할이라 하신 것 또한 선황제의 뜻이지요. 그리고 백두산에서 솟아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두만강입니다. 따라서 두만강의 영역인 백두산 동쪽이면서, 고려지경 비석이 서 있는 선춘령의 남쪽. 여기에 해당하는 범위만이 조선의 새 영토인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조선 백성은 물론이고 그 영토 안에 사는 여진족들까지도 그 누구라도 몰라서거나 고의로나 그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그럼 폐하께도 그리 보고 올리겠습니다. 자, 지금쯤 출발해야 해 지기 전에 거양성에 도착할 것 같으니 슬슬 출발하시지요."

그렇게 대답한 요동도사는 자기가 지금 양녕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말을 매어 둔 곳으로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