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41화
141화
1426년 7월 중순 모일.
경원부 비우진.
증거가 있게 될 것이라는 양녕의 말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비밀을 엄수해야 하는 일을 다루는 만큼, 중심 고을인 경원목보다도 경비가 삼엄한 회경군 본대 주둔지인 비우진으로 집무실을 옮긴 양녕은 최만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거양성의 무너져 가는 토축 성벽은 대군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벽에 나무가 자란 것을 다 뽑고 전체적으로 흙을 다시 다져서 보수하고 있습니다. 공험진도 마찬가지로 정비하고 있고, 선춘령에서 수빈강을 건넌 곳에 있는 성터는 나무는 베어 버리고 심하게 무너진 곳에만 흙을 채워 넣는 정도로만 보수하고 있습니다."
"잘 되고 있군. 거양성과 공험진의 수리가 끝나고 주둔하는 병사들도 얼추 자리를 잡은 다음에 명나라에 공험진까지 수복했다고 알릴 것이니, 너무 서두를 것은 없지만 최대한 속도를 내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런데 공험진이 아무리 선황제인 홍무제가 승인한 국경의 기준이라 하지만, 이전에는 조선이 두만강 일대까지만 관리했던 것을 명나라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이전 국경보다 북쪽에 있는 성을 보수하고 병사들을 주둔시키는 것은 명나라에게 조선이 공험진까지 완전히 확보하고 고을을 설치하겠다고 확인받은 다음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확인을 받으려고 들면 우리가 공험진 위치에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은가. 공험진 위치를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으며, 조선의 정당한 강역이니 당연히 되찾는다는 식으로 당당히 나가야 하네. 그리고 명나라에 공험진 진출을 알리면 반드시 사람을 보내서 확인하려고 들 걸세. 그런데 그때 공험진 일대가 성 꼴 비슷한 것도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조선이 여기를 국경으로 생각하고 관리했던 게 맞냐며 트집을 잡을 수도 있지."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납득한 듯 말했다.
"하긴 명나라도 흑룡강 하구에 설치한 노아간도지휘사사가 아무리 허울뿐이라고 하지만 가끔 관원을 보내서 관리한다고 하셨지요. 조선도 공험진에 병사나 일반 백성들이 살지는 않더라도 가끔 사람을 보내 관리한 것처럼 보여야 그런 트집을 못 잡겠습니다."
"그렇네. 가끔만 관리하니 영토가 아니라고 해 버리면 흑룡강 일대가 명나라에 속한다고 주장하던 명분도 같이 없어져 버리니 말이야. 또 만약 관리가 안 된 것으로 트집을 잡혔다가는, 국경이면 관리를 이렇게 안 할 수가 없는데 여기가 정말 공험진이 맞냐며 국경을 두만강으로 밀어 내리려 들 수도 있을 것이야. 명나라는 조선이 최대한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게 좋으니, 공험진의 진짜 위치를 명나라가 알건 모르건 간에 구실만 충분하면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아예 트집 잡지 못하게 성벽을 수리하시는 것이겠군요. 나무를 제거하고 어느 정도 수축만 해두고 나면, 이전에 얼마나 관리가 안 되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지요. 성벽이 허술해 보인다 한들 이게 관리를 안 해서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던 것을 급히 새로 만들어서 허술한 것인지, 가끔씩만 와서 관리하느라 허술한 것을 아직 덜 고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맞아. 병사들을 미리 주둔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일세. 한두 달 주둔하는 것으로는 병사들이 완벽하게 주둔지에 익숙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게 처음 와서 그런 것인지, 가끔씩만 왔어서 그런 것인지 모를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다음 보고로 넘어가려던 최만리가 조심스럽게 양녕에게 말했다.
"사실 약간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무언가?"
"만일 명나라가 공험진 위치를 알고 있고 그곳이 저희가 찾은 이곳이 아니라면, 조선이 공험진 위치도 제대로 모르면서 국경을 주장했다며 문제 삼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양녕은 최만리의 걱정을 듣자마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설령 명나라가 공험진 위치를 알고 그게 여기가 아니더라도 그 얘기는 꺼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틀린 것을 알면서도 명나라가 가만히 있는단 말입니까?"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측거의로 측량해 조금 더 정확해진 두만강 이북 지도에서 공험진을 가리키며 양녕이 대답했다.
"그래.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가장 먼저 나오는, 국경으로 삼을 만한 지역이 여기야. 만약 여기가 공험진이 아니라 윤관이 쌓은 다른 성이라면 여기 북쪽에 진짜 공험진이 있을 수도 있네. 반대로 여기가 공험진이 아니고 그 북쪽에 있는, 윤관과 관련 없는 성이라면 공험진이 될 수 있는 후보지는 두만강 일대로 단숨에 밀려나버려. 그런데 두만강 일대에는 공험진의 증거가 없던 게 확실하지 않은가."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깨달은 듯 말했다.
"그렇군요. 여기가 공험진이 될 수 있는 가장 남쪽 후보지이니, 만일 명나라가 진짜 공험진 위치를 안다고 해도 여기보다 북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상황은 조선에서 공험진 위치를 잘못 알고 국경을 스스로 뒤로 물려서 굳히는 중이니, 명나라도 여기가 공험진이 맞다 하겠지요. 물론 국경을 더 뒤로 물려서 두만강까지 밀어내는 것이 명나라에게는 최선이겠지만, 그건 지금 이곳에 성벽을 수리하고 병사들을 주둔시켜 명분을 없앴지요."
"맞네. 사실 나도 여기가 공험진이 맞다고 생각하고, 명나라는 공험진의 진짜 위치를 모른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일을 확률만 믿고 움직여서는 안 되니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지."
"제가 봤을 때도 명나라의 견제나 여진족들의 위협, 조선의 개척 여건이나 확보했을 때 이익이 되는지 등등을 전부 고려했을 때, 조선의 동북방 국경으로 삼는 것은 여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명나라가 공험진 위치를 모르더라도 여기가 공험진이라 인식하게 해 국경으로 굳히는 것은 장차 조선에 두고두고 이로운 일일 것이니, 만반의 준비를 해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녕은 최만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런 만큼 일이 틀어져서는 절대로 안 되네. 증거를 확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렇게 대답한 최만리에게 양녕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럼 증거를 만드는 얘기가 나온 김에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가지. 종을 구해 오는 것은 어떻게 되었나?"
최만리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석주목 성복사에서 이미 구했습니다. 다행히 아직도 칠주도 정벌 당시의 주지인 양예가 계속 주지로 있어서 금방 말이 통했습니다. 대군께서 하시는 일이라 했더니 더 묻지도 않고 알겠다고 하면서 종을 내놓아서, 지금 배에 싣고 가져오는 중이라 합니다."
"벌써? 엄청 빨리도 구했군. 성복사에 바로 내놓을 수 있는 종이 있었단 말인가?"
"칠주도 사당들을 조사해 괴력난신을 섬기는 곳은 철폐하고 나머지는 사찰로 바꾸거나 사찰에 합쳤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조사하면서 사당 재산 중에서 고려에서 약탈해 간 것으로 밝혀진 물건들은 몰수했고, 철폐되는 사당은 아예 전 재산을 몰수했지요."
"그랬었지. 그런데 그때 약탈해간 것으로 밝혀진 불상이나 범종, 법구들은 원래 절로 돌려보냈고, 구리로 된 것은 녹여서 화포를 만들게 조정에 보내고, 사치품은 포섭이나 회유용으로 내려주어서 다 썼던 것 아니었나?"
"거기서 약간 붕 뜬 게 있었습니다. 약탈해 간 것으로 밝혀진 불상이나 범종, 법구이긴 하지만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낼 수 없거나, 알아냈더라도 지금은 사찰이 없어져 폐사지만 남은 경우는 돌려보내지 못했지요. 그렇다고 고려에서 만들어진 것이 확실한 물건을 녹여서 화포로 만들게 보낼 수도 없고, 포섭이나 회유용으로 내려줄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성복사에서 맡아서 관리하게 한 물건이 제법 있고, 그중 범종도 몇 개나 됩니다."
"그때 몰수한 기물을 분류하는 일을 했던 자네가 없었더라면 엄청 오래 걸릴 뻔했군. 그럼 그 범종 중에서 골라서 보내는 겐가?"
"예. 종에 명문으로 기록된 제작 시기가 고려가 공험진을 가지고 있던 기간에 포함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만일 해당하는 것이 여럿 있으면 그중에서 고려 범종의 특색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것을 골라 보내게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양녕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배에 싣고 오는 중이라 했으니 해당하는 범종이 있었나보군."
"그렇습니다. 대신 그 범종에 어느 호족 누가 몇 년도에 어느 사당에 바쳤다 하는 것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약탈의 흔적인가 보군. 그건 걱정 말게. 종을 그대로 써야 한다면야 새겨진 걸 그냥 두자니 출처가 들켜 문제고, 깎아내자니 자국이 남아 문제겠지. 하지만 거양성 종은 깨져 버린 종이지 않은가. 가져온 종을 깬 다음 그 새겨진 부분만 없애 버리면 그만이야."
"아, 그러면 되는군요. 하긴 풀숲에 흩어진 종 조각을 모아온 것이라 할 것이니, 오히려 온전하게 갖추어진 게 이상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머쓱한지 살짝 웃은 최만리가 다시 보고를 이었다.
"비석 만드는 것도 천천히 진행 중입니다. 탁본 뜨는 이에게는 경원부와 길주부 일대의 고려 때 비석들을 찾아다니며 탁본을 떠오게 했습니다. 그 탁본들을 종합해보면 고려 때 동북면에서 가장 널리 쓰인 필체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요. 돌 다듬는 이에게는 이 근처에서 나는 석재로 빈 비석을 만들라 했습니다. 마침 거양성 근처에서 비석으로 쓰기 좋은 석재가 나서 그걸 캐다가 다듬는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비석 새기는 이에게는 빈 비석이 완성되는 대로 비문을 새기게 할 것이니 미리 연장들을 손질해 두라 해놓았습니다."
"잘하고 있군. 자네가 고생이 많네."
"탁본, 석재, 비석에 능한 이들이 이미 갖추어진 덕분입니다. 대군께서 한성부에 가셨을 때 데려온 그 세 사람이 절묘하게도 지금 상황에 정확히 필요한 사람인 것이 우연일 리는 없으니, 이렇게 증거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까지 미리 염두에 두셨던 것이지요?"
최만리의 말에 양녕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말했지 않은가. 중요한 일에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일세. 다행히 잘 풀리고 있다니 당장 걱정할 것은 없겠지만, 이 일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데에는 절대로 주의를 놓아서는 아니 되네. 특히나 외부자인 성복사 주지 양예나, 비석을 만드는 데에 관여할 장인들은 최대한 이번 일을 깊게 알 수 없게 해야 해."
"물론입니다. 특히나 양예는 자기 안위를 우선으로 여기는 자인데다가 잔머리까지 제법 쓰는지라 서신을 보내면 만약을 대비해 보관해두려 할 것이고, 읽은 다음 없애라고 하면 의심해서 더 보관하려 하겠지요. 그런데 범종을 요청한 기록이 외부자의 손에 남아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신을 보내는 대신 군관을 보내서 구두로 요청하고 가져오게 했습니다."
"잘했네. 양예에게 직접 지시를 내린 게 아니라 그 군관에게 지시를 내렸던 것이군. 뭐라 지시했는가?"
"갑자기 고려 때 만들어진 종을 구하러 왔다고 하면 양예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그런 말은 하지 말고, 그저 대군께서 여기서 관리하게 했던 종 중에서 하나를 가져다 새로 짓는 절에 시주하고자 하신다고만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범종을 고르는 기준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말고 직접 명문과 양식을 살펴서 제일 적합한 것을 고른 다음, 대군께서는 이 종을 좋아하실 것 같으니 이걸로 하겠다는 이유만 대고 가져오라 했습니다."
"뭐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군. 그나저나 내가 일전에 장차 동북면을 도모할 때 불교의 쓰임이 클 것이라 했는데, 그걸 나보다도 자네가 먼저 실천하고 있구먼 그래."
"아직 미흡합니다. 대군께 더 배울 것이 많지요."
그렇게 말한 양녕과 최만리가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