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39화
139화
"4년에 걸쳐 4회 경작이라면 돌려짓기가 아니라 그냥 일반 농사지 않습니까?"
최만리의 질문에 양녕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돌려짓기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농법이라 생각하는가? 그리고 왜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최만리가 입을 열었다.
"막상 물어보시니 저도 정확히 돌려짓기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각지 농법을 조사하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농사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돌아가니 돌려짓기라고 한 것 같습니다. 대신 하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지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력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꼭 성균관 직전으로서 이도의 질문에 대답할 때처럼, 바로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 연달아서 찔러오자 최만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작물을 잘 자라게 하는 힘이지요. 거름을 주면 회복이 되고, 묵혀 두어도 회복이 됩니다. 그런데 묵혀 둔 땅은 들짐승과 날짐승들이 오가며 대소변을 보았을 것이니, 결국 지력이란 거름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만리의 긴장 섞인 대답에 양녕이 끄덕였다.
"맞네. 세세하게는 조금 다르지만 지력은 거의 거름기를 말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지. 그리고 작물마다 빨아들이는 거름기가 조금씩 다르네."
"작물마다 주어야 되는 거름이 다 다른 거였습니까?"
다르게 이해했는지 깜짝 놀라는 최만리에게 양녕이 풀어서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거름 종류는 다 같네. 하지만 저마다 더 필요로 하는 것이나 흡수하는 방법이 다 다른 것이지. 큰 저수지에 살면서 똑같이 다른 생물을 잡아먹고 사는 물고기들을 생각해 보게나. 잉어는 물풀 속 지렁이를 먹고, 버들붕어는 수면에 떨어진 벌레를 먹고, 미꾸라지는 진흙 속 벌레를 먹고, 가물치는 다른 물고기들을 잡아먹지 않는가."
양녕의 말이 나중에 성균관에 돌아가서 농업에 관한 일을 할 때 유용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유심히 듣는 최만리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것과 비슷하네. 밀이 거름기를 많이 빨아들이고 나면 전체적인 거름기가 부족해져서 바로 밀을 또 키울 수는 없네. 그때 각각 다른 거름기를 선호하는 순무, 보리, 콩을 번갈아 가며 3년간 키우는 것이지. 그럼 순무가 좋아하는 거름기가 한 해는 줄어들지만 두 해는 쌓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세 작물을 키우고 나면 모든 거름기가 두 배씩 쌓이니 다시 밀을 키울 수 있어지는 것이지. 실제로는 좀 다르지만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네."
"그래서 돌려짓기를 하는 것이었군요. 생각보다 지력이라는 게 심오합니다."
"그렇네. 2년간 3회 경작하는 것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세 작물을 번갈아 키우면서 다른 작물이 필요로 하는 거름기가 땅에 쌓일 시간을 주는 것이지. 겨울을 나는 작물을 중간에 심어 재배 간격을 좁히고, 대신 지력을 회복시켜 주는 콩을 작물에 포함시킨 것이네. 겨울 한 번은 땅을 묵혀 지력을 회복시키게 한 것은 한 해마다의 소출을 늘리기 위한 것이지 필수적인 것은 아닐세."
"연달아서 짓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물을 돌아가며 키우는 데에 의미가 있었군요. 그래서 돌려짓기라고 하는가봅니다."
최만리가 다 이해하자 이번에는 최윤덕이 질문했다.
"그런데 돌려짓기할 작물이 밀, 순무, 보리, 콩인 이유가 있습니까? 세상에 다른 작물들도 많은데 굳이 저 네 작물을 지목하신 것을 보면 순서나 종류에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순서는 우선 그리 키워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오. 물론 현장에서 더 좋게 바꿀 수도 있겠지. 작물 종류도 마찬가지로 바뀔 수 있지만 우선 그리 정한 이유가 있소. 우선 밀은 주식으로 삼을 작물이고, 순무는 둔전에 심기에 가장 적합한 작물이오."
양녕의 말에 무관인 최윤덕은 바로 떠올리는 것이 있었다.
"한나라 승상 제갈무후가 대군을 이끌고 가는 곳마다 순무를 심었다고 하지요. 척지에서도 빠르게 잘 자라고, 잎부터 뿌리까지 다 먹을 수 있고, 덜 자란 것과 날것도 다 먹을 수 있고, 말리거나 절이면 보존식이 되니까요. 그래서 제갈채라고도 불릴 정도니, 순무가 포함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습니다."
"그렇소. 그리고 보리는 역시 밀처럼 주식이 될 수 있는 물건이고, 콩은 영양을 보충해 줄 뿐만 아니라 지력을 회복시키는 작물이오. 이렇게 병사들을 먹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다른 쓰임도 있소."
그렇게 말하고 양녕이 씨익 웃자 최윤덕도 깨달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북방이기에 필요한 작물들이로군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최만리가 조심스럽게 양녕에게 물었다.
"북방이라서 필요한 작물이라니요?"
"네 작물 다 사람의 식량이 되는 작물이지만, 가축에게 유용한 것이기도 하네. 밀짚은 여물을 만들 수 있고, 순무는 짐승도 먹을 수 있지. 콩하고 보리는 군마에게 먹일 사료가 되네. 콩대와 줄기는 연료로 쓸 수 있지만 역시 여물로 쓸 수도 있지."
"기병이 중심인 회경군이니, 사람이 먹을 것과 말에게 먹일 것을 동시에 보급할 수 있게 둔전을 만들 수 있는 작물들이로군요."
"그렇네. 그리고 회경군이 국경을 되돌리고 나서 해산하고, 여기에 본격적으로 백성들이 정착하더라도 여전히 수비를 위해서는 군대가 머물러야 하네. 여진족을 대비할 것이니 그 군대도 기병이 중심이 될 것이고, 여기 정착할 백성들도 말을 키워야 다니기 좋겠지. 그때의 농사도 염두에 둔 것이야."
"어디서 산짐승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길고 험한 산길들로 이어져 있으니, 말을 안 타면 다니기가 위험하고 어렵지요. 아마 국경이 더 북쪽으로 올라가게 된다면 더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을 키우기 위한 작물들이니 신백정들도 필요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이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될 수도 있겠지. 반대로 다른 백성들 역시 돌아다니려면 말이 필요하니 키우게 될 것이야."
최만리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신백정과 다른 백성들 사이에 농사와 말 사육으로 접점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섞이겠군요."
"그렇네. 가축 먹일 작물 농토 따로, 사람 먹을 미곡 농토 따로 둔다면 얻을 수 없는 이점이지."
옆에서 최윤덕도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대군이십니다.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군요. 그러면 진을 어떻게 설치할지만 정해 주시면 세부적인 것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양녕은 머릿속으로 동북면 지도를 쭉 떠올린 다음 입을 열었다.
"우선 조금 전 살펴보았던 예정지로 경원부를 되돌리겠소. 그리고 경원부가 임시로 있던 곳은 다시 부가참으로 되돌릴 것이오. 아무리 북방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고 한때나마 경원부였다고는 하나 그 자체로 한 고을이 될 크기는 아니니 말이오. 그러나 중요한 역참인 것은 맞고, 부로 기능하면서 여러 시설이 생겼으니 역참으로만 내버려둘 수도 없소. 따라서 서쪽의 영북진과 합칠 것이오. 부가참과 영북진을 합치는 것이니 이름은 부령진이라 하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럼 더 규모가 크고 시설이 많은 옛 영북진 자리를 부령진의 읍치로 삼고 부가참은 병사들을 두어 관리하게 하겠습니다."
최윤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양녕이 말을 이었다.
"이어서 경흥진도 원래 예정지인, 섬이 입구를 막고 있는 좁은 만에 설치할 것이오. 다만 그 부지가 좁은 것은 방어가 중요한 지금은 장점이지만 정착이 끝나고 안정적인 조선의 땅이 되면 단점이 되니, 거기서 동북쪽으로 읍치를 옮겨야 할 수도 있음을 미리 생각해 두시기 바라오."
양녕이 말한 경흥진의 동북부는 원래 역사에서 후에 경흥군 웅기읍이 되는 지역이었다.
그 이후 북한 지배하에서 라선특별시를 이루게 될 정도였던 중요성을 미리 염두에 둔 이야기였다.
"회령진과 종성진, 온성진은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고칠 것은 없소. 그럼 지금 우리가 있는 두만강 동쪽 이곳만 남았군. 이름을 새로 지어야겠는데 여기를 이미 부르는 말이 있는가?"
양녕의 질문에 최만리가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여진족들은 보통 고려성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고려성이라.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흥미롭군. 어쩌면 고구려 때 만들어진 성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여기가 윤관이 설치했던 성 가운데 하나라서 고려성이라고 불리는 것일 수도 있겠어."
거기까지 말한 양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짦게 생각한 다음 다시 말했다.
"이걸 고려성이라고 하면 고려의 장군 윤관이 확보했던 국경을 되찾는다는 명분이 되긴 좋겠지만, 아무래도 망해 버린 전조의 이름으로 성을 짓기는 좀 그렇군. 다른 이름은 없나?"
"있습니다. 여진말로는 피오 호톤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호톤은 성이라는 뜻이니 빼어도 될 것이고. 피오를 그대로 한자로 옮겨서 비우진이라 하면 어떻겠는가?"
"아름다울 비에 넉넉할 우를 쓰면 되겠군요. 북방으로 뻗어나갈 중요한 지역이자 둔전을 일궈 풍요롭게 만들 지역이니까요."
최만리의 제안에 양녕이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리하지. 그러면 가장 남쪽 부령진에서 서쪽으로 올라가며 회령진, 종성진에 이어 최북단의 온성진, 동쪽으로는 경흥진과 경흥부를 거쳐 여기 비우진까지가 공험진 위치 확인 전까지 설치할 진으로 결정된 걸세."
"드디어 국초의 국경까지는 되돌아왔군요."
"그리된 셈이지."
최만리의 말에 대답한 양녕은 이번에는 경원부윤 최윤덕에게 말했다.
"그리고 경원부가 되돌아왔으니, 이제 명분을 위해 남겨두었던 옛 제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따라서 새 군현의 제도를 적용하겠소. 우선 경원부는 경원목이 될 것이오. 실제로는 진이라 해야겠지만 중심 고을이니 목이라 해 두는 것이오. 그리고 새로 설치될 다른 진들은 경원목을 중심으로 하는 경원부에 속하게 될 것이오."
양녕의 말에 최윤덕이 감격한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경원목, 부령진, 회령진, 종성진, 온성진, 경흥진, 비우진. 총 일곱 진이 설치되었군요. 이것이 다 제 관할이라니 책임이 막중합니다."
"공께서는 잘하실 수 있을 것이오. 그나저나 이번에 한성부에 갔을 때 마침 서북면에도 훌리가이 부족을 방어하기 위해 강계목 이북 세 군에 읍성 건설과 백성 정착이 시작되었다고 들었소. 이곳과 합치면 딱 열 곳이로군."
처음 듣는 얘기에 최윤덕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훌리가이 부족을 방어하는 목적인데 군을 세 곳만 만듭니까? 저는 넷은 있어야할 것 같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방어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오. 하지만 서북면 최북단에 이미 아바마마께서 만드신 여연군이 있었지 않소. 그 서쪽으로 자작리라는 곳에 성을 쌓아 자성군을 삼고, 동쪽에 있던 요새인 상무로보를 승격해 무창군을 삼았소. 동서로 군을 하나씩 두었고 강변의 중요한 길목에는 모두 보를 두어 방어했는데, 그 전부가 점석회로 튼튼히 쌓은 것이니 굳이 고을을 더 늘릴 필요는 없게 된 것이오."
설명을 마친 양녕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조선의 국력이 원래 역사보다 강해진 덕분에 수비를 위한 서북면 군은 적어지게 되고, 진출을 위한 동북면 진은 늘어나게 된 상황인 것이다.
"그렇군요. 서북면의 3군. 동북면의 7진. 묶어서 부른다면 3군7진이로군요. 어쩐지 어감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