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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38화 (13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38화

138화

"저 넓은 북방을 직접 헤집고 다닐 필요 없이, 이번 조사에서 가장 어렵고 오래 걸리는 부분을 그 지역을 잘 아는 이들이 대신 조사해오게 만드셨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무서운 분이시라는 이유는 뭡니까?"

최만리의 질문에 최윤덕이 대답했다.

"조선과 우디거 사이의 교역을 무타우타가 독점적으로 중계하게 되었으니, 장차 우디거 내에서 무타우타의 입지가 커질 것이야. 그런데 조선에서 파는 물건이 우디거들이 내놓을 수 있는 물건보다 가치가 압도적으로 크고, 무타우타가 교역을 독점하게 된 것도 본인의 수완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조선이 특혜를 준 것이지 않은가. 교역이 끊기더라도 조선은 크게 아쉬울 것이 없지만 무타우타는 그간 얻은 우디거 내 입지를 잃게 되네. 그리되기 싫으면 조선에게 잘 보여야만 하지."

"지금처럼 다른 우디거들하고 친하게만 지내고 가끔 필요한 걸 맞바꾸는 정도라면 오히려 조선에게 크게 매달릴 필요가 없을지 몰라도, 교역을 독점해서 우디거 사이에서 입지가 커지고 나면 그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조선에 매달려야만 하는군요."

"그렇네. 욕심을 채우려다가 자기 손으로 자기 목줄을 조선 손에 쥐어 주게 된 것이야. 그래서 무서운 분이시라 한 것이지. 제 생각이 맞습니까?"

양녕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공의 말이 맞소. 무타우타와 그 부족은 조선에 잘 보여야 하니 소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협조를 요청하면 어지간해서는 들어주게 될 것이오. 또 그들이 자리 잡은 옛 경원부 터는 경흥진 항구와 경원부를 되돌릴 자리 중간쯤에 있으니 되돌아갈 경원부를 뒤에서 받쳐 주는 구실을 하게 될 것이오. 수비병을 두지 않고도 진을 만든 셈이지."

"그렇지만 조선의 고을이 아닌데다가 북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벗어난 곳이니 제대로 받쳐 주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북쪽으로 가는 길목 동쪽에 있으니 오히려 더 동쪽에 사는 다른 여진족들에게서 길목을 지켜주는 요새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길목에서 벗어나 있으니 조선의 고을로 가기 위해 여진족 고을을 거쳐야만 하는 문제도 없소. 쓰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고, 무타우타의 부족은 그 정도만 해주면 충분하오."

"아무래도 무타우타를 이용하는 것 말고도 다른 방책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렇소. 아직 마지막 진을 설치할 자리에 가는 도중이지 않소? 거기 도착해서 설명할 테니 그 방책도 기대하시구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최만리가 말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대군께서 무서우신 점이 또 있는 듯합니다."

"무엇인가?"

최만리는 혹시라도 휘장 밖으로 들릴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조만간 무타우타가 다른 우디거들을 통해 성터 조사해 온 것을 가져오기 시작할 겁니다. 거기에는 원래 목적인 성터의 위치와 가는 길은 물론이고, 조사해온 부족이 사는 곳과 거기까지 가는 길도 나와 있겠지요. 부족 거주지와 그 부족이 조사해 온 성터의 거리를 따져보면 세력범위도 얼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귀 기울여 듣는 최윤덕에게 최만리가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성터를 조사해 왔다는 것은 곧 무타우타의 요청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니, 그 부족은 무타우타의 부족과 면식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적어도 적대적인 사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전부 담겨 있는 자료이니 조선이 무타우타를 통해 우디거들을 장악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자료를 도끼를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팔아 주는 조건만으로 무타우타가 자기 손으로 모아다 바치게 만드셨지요."

최만리가 설명을 마치자 양녕이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과연 축자국 승상으로 호족들을 다뤄 봤던 자네답게 예리하군. 바로 맞추었네. 하나 더 말하자면 만일 공험진을 찾고 보니 우디거들이 흩어져 사는 지역 중간에 위치해 있다면, 공험진 기준으로 확정된 국경 바깥쪽으로도 우디거들이 살게 되네. 만일 그 국경 밖 우디거들을 조선이 나서서 통제하려고 들면 명나라와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하지만 그들이 무타우타를 통해 조선과 거래를 하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조선에 종속되게 만든다면 아무 문제없지."

양녕의 그 말에 최윤덕이 감탄하며 말했다.

"허허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서우신 분이십니다."

"조선 백성에게만 무서운 존재가 아니면 괜찮소. 자, 그럼 오늘의 원래 목적지로 어서 가봅시다."

* * *

1426년 6월 중순 모일.

조선 동북면. 두만강 너머 평지(현 훈춘).

경원부를 되돌릴 예정지에 도착해 살펴보고, 이어서 두만강을 건너가 넓은 평지 가운데 세워진 낮은 토성을 살펴보던 최윤덕이 말했다.

"여기가 마지막 진을 설치하시려는 곳이군요. 실로 좋은 자리입니다. 터가 넓어 대부대가 주둔하기 좋고, 성 안에 우물도 제법 있고, 근처에 강도 두 개나 흐르는군요."

"그렇소. 서쪽을 흐르는 것은 아시다시피 두만강이고, 동쪽에 흐르는 저 강은 훈춘강이라 하오."

"훈춘강이라. 특이한 이름입니다."

"썰매를 여진말로 훈추라 하는데 거기서 나온 이름이오. 이 강이 북쪽 내륙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붙는다고 하오. 때문에 겨울이 되면 얼음 위로 썰매를 타고 내륙까지 오가는 데 써서 이런 이름이 붙은 듯하오."

"아예 강 이름이 썰매라고 붙을 정도면 겨울철에는 정말 많이들 썰매를 타고 다니나 보군요. 북쪽으로 이어진 데다가 평상시엔 배로 오가고, 얼면 썰매로 오가면 되니 북방으로 뻗어나가기에 정말 좋은 위치입니다."

"그렇소. 그리고 강이 둘이나 흐르고 땅도 넓고 비옥하지. 마지막 진에 주둔할 회경군 본대에게는 이 땅에 농사를 짓게 할 것이오. 그게 바로 내 마지막 방책이오."

이야기를 들은 최윤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둔전이로군요. 경흥진 항구와 여기 사이 거리가 먼 것은 무타우타의 부족을 이용해서 보강하고, 본대가 주둔해서 물자가 많이 필요해지는 것은 자급자족으로 해결하는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북방은 겨울이 길고 혹독한데 둔전이 잘 될지가 걱정입니다."

"농사 자체는 될 것이오. 지금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거의 안 남기는 했지만, 한때는 여기에 여진족들이 제법 많이 모여 살았소. 아마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많이들 살았겠지."

"그래도 지금은 떠나고 없는 것을 보면 농사가 잘 되지는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윤덕의 걱정에 양녕이 끄덕였다.

"공의 말이 맞소. 무언가 문제가 있으니 땅이 이리 비옥해질 정도로 오래 묵는 동안 아무도 농사를 짓지 않았겠지. 하지만 일단 농사를 짓기만 하면 수확이 많건 적건 자급자족 되는 만큼은 보급 부담이 줄어들게 되오. 게다가 국경이 정해지면 장차 북쪽으로 더 뻗어 올라가야 될 수도 있는데, 미리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 보고 어떤지 확인해 두어야 백성들을 어떻게 이주시킬지 정할 수 있지 않겠소."

정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최만리도 한마디 했다.

"계속 여진족들만 살게 두면서 조선의 영토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주한 조선인들에게 계속 식량을 공급해 줄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네. 그리고 농사가 잘 되지 않는 문제는 새 농법을 도입해서 해결하고자 하네. 여기가 마침 새 농법이 잘 되는지 실험해 보기 좋은 조건이기도 하고 말이야."

최만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여진족들도 농사를 포기한 곳인데도 말입니까?"

"그렇네. 첫째로 여기서 여진족들이 지었던 농법은 문제가 있어 버려졌을 테니 그걸 그대로 쓸 수는 없네. 그렇다고 여기보다 남쪽인 기존 조선의 농법도 기후가 달라 맞지 않겠지. 결국 북방의 농법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북방에서 실험해야만 하네."

"거친 환경이기에 오히려 거친 환경에 적용할 농법을 실험하기 좋은 조건이라는 말씀이군요. 둘째는 무엇입니까?"

"병사들이 둔전을 경작하니 수확에 부담감도 없고 지시에도 잘 따를 것이기 때문이네. 거름을 만들어 밭에 주는 방법을 나라에서 정리해서 전국에 보급하려 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지?"

"예. 성균관에서 기껏 책으로 정리해서 각지에 보냈는데 생각만큼 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농부들은 쉽게 이전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야. 당연한 일이지. 괜히 검증 안 된 농법을 시도했다가 한 해 농사를 망쳐 버리면 그대로 온 가족이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하지만 병사들은 아니야. 기본적으로 군량이 보급되는 상황에서 둔전을 지어 보조하려 하는 것이니 새 농법이 실패해도 밥 못 먹을 걱정은 없네."

"새 농법대로 경작하게 지시해도 부담 없이 시도해 보겠군요. 애초에 병사들이니 지시도 잘 따를 것이고 말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로 실험에 좋은 조건입니다. 그러면 어떤 작물을 키우실지도 이미 생각해두셨습니까? 일단 여기는 기후가 추우니 벼농사는 못 지을 것 같습니다."

"밀농사를 지으려고 하네."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밀 말씀입니까? 확실히 이렇게 겨울이 길고 추운 지역이라도 봄에 밀을 키우면 날이 추워지기 전에 수확할 수 있고 주식으로 삼기에도 좋습니다. 하지만 밀은 지력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어서 금방 땅이 척박해집니다. 어쩌면 여진족들도 밀을 키우다가 땅이 너무 척박해져서 여기를 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괜찮네. 새 농법이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도입하려는 것이야."

"밀을 키워서 땅이 척박해지는 걸 해결할 수 있다면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도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어떤 농법입니까?"

"돌려짓기일세."

최만리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양녕에게 물었다.

"성균관에서도 농법을 다루었었고, 이번에 정착도감 일을 하면서도 여러 책을 찾아보아서 돌려짓기가 땅이 척박해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려짓기는 보통 봄에 작물을 심어 가을에 거두고, 가을에 다른 작물을 심어 봄에 거두고, 다시 다른 작물을 심어 가을에 거둔 다음 이듬해 봄까지는 땅을 묵히는 것 아닙니까?"

"맞네. 2년에 걸쳐 작물을 바꿔가며 3회 경작하는 것이지."

"그러려면 가을에 심는 작물로 이 지역의 혹한을 견딜 수 있는 품종을 고르는 게 가장 중요하겠군요. 가을 농사가 실패해 버리면 결국 1년에 한 번 농사를 짓는 것과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기존의 돌려짓기는 2년에 걸쳐 3회 경작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걸 그대로 쓰는 거면 내가 새 농법이라고 하질 않았겠지?"

"아! 기존의 방법을 개량하신 모양이군요."

"그렇네. 기존의 돌려짓기는 2년에 걸쳐 3회 경작하는 게 한 바퀴였으니 당연히 겨울을 나야 했네. 하지만 새로 도입하려는 돌려짓기는 겨울에는 땅을 묵히기 때문에 혹한을 견디는 품종을 찾을 필요가 없네."

"겨울에 땅을 묵히는데 돌려짓기가 됩니까?"

"4년에 걸쳐 4회 경작하는 게 한 바퀴인 방식이야. 밀, 순무, 보리, 콩을 한 번씩 경작하는 것이지. 이름을 붙인다면 4윤작법이라 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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