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37화
137화
"수비병이 필요 없다니 대체 무슨……. 강을 끼고 방어할 수 없는 강 건너편의 진이니 오히려 더 많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당황한 최윤덕에게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공을 너무 정신없게 만들었나 보오. 조금 전에 경원부는 공께서 머무르는 곳이라 병사들이 충분히 있어 수비병을 두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 말하신 것을 기억하시오?"
"아! 경원부가 옮겨지면 회경군 도원수이자 경원부윤인 저는 당연히 거기로 옮겨가야 하고, 당연히 군사들도 다 따라가게 되는군요. 그냥 계속 여기에 남는 것처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드디어 상황을 파악하고 웃는 최윤덕에게 양녕이 설명했다.
"그렇소. 옮겨갈 경원부에 수비병을 두고, 강 건너에 설치할 마지막 진에 본대가 주둔하는 것이오. 어차피 북방으로 뻗어 나가려면 두만강을 건너야 하니 그리 배치하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수비병만 둔다고 계산했을 때에도 물자 보급이 어려워 보였는데, 본대가 주둔한다면 물자가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경흥진 항구에서 내린 물자를 옮길 길이 먼데 수요까지 늘어났으니, 길목 중간에 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새라도 작게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리 걱정할 것 없소. 어차피 진을 설치할 장소도 보셔야 할 것이니, 갈이 가서 시찰하면서 얘기하면 어떻겠소?"
* * *
1426년 6월 중순 모일.
조선 동북면. 옛 경원부 터 서쪽.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가 남북으로 나란히 둘 있고, 두 산줄기 사이에 만들어진 평지가 동쪽의 두만강과 맞닿은 곳. 정확히는 동쪽으로 두만강까지 채 1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 옛 경원부가 있던 자리였다.
양녕과 함께 옛 경원부 터로 향하던 최윤덕은 저 멀리에 허물어져가는 옛 경원부 토축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자 탄식하듯 말했다.
"정말 무타우타만 아니었으면 당장 진을 설치했을 좋은 위치입니다."
남북의 두 산줄기 모두 곧게 뻗은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했던 덕에 북방의 칼바람을 사방에서 막아 주고, 산줄기 사이의 거리도 적당히 멀어 평지가 넓으면서도 방어에도 좋았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동쪽은 두만강으로 바다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산길로 다른 고을들과 이어지니, 북방으로 뻗어 나가기 어렵다는 점만 빼면 고을을 두기에 이만한 곳도 없습니다."
최만리의 감탄을 들은 양녕이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저 앞에서 말을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누군가의 외침에 막혀 버렸다.
"양녕대군 왕자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무타우타로군."
심드렁한 양녕의 말에 최윤덕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멀리에서 대군을 알아보다니, 정말 어지간한 들짐승이 부럽지 않을 만큼 눈이 좋은가 봅니다."
이윽고 혼자 말을 타고 양녕 앞까지 온 무타우타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왕자님께서 여기까지 오신 것은 처음이지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후다닥 말을 돌려 되돌아가는 무타우타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는 최윤덕의 옆모습을 본 양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성격이나 하는 짓도 들짐승과 비슷하지. 공께서도 적응되시면 괜찮을 게요."
* * *
잠시 후.
조선 동북면. 옛 경원부 터.
회령진에 쳤던 것처럼 둘러친 휘장 안. 양녕과 최윤덕, 최만리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무타우타가 자리에 앉자마자 최윤덕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얼굴에 흉터 있으신 분은 처음 뵙는 분이시군요! 저는 양 무타우타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자기소개에 살짝 당황한 최윤덕이 대답했다.
"아, 회경군 도원수 겸 경원부윤인 최윤덕이라고 하오. 반갑소."
그 말을 듣자마자 무타우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경원은 여기 아닙니까?"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버린 최윤덕을 대신해서 양녕이 끼어들었다.
"남쪽으로 옮겨간 경원부의 부윤이오."
"아, 먼터무 형님이 약탈해서 새로 옮겨간 거기 얘기였군요. 전 또 여기를 말씀하시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뭡니까. 하하하! 그런데 그런 분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같이 오신 겁니까?"
"조선에서 곧 경원부를 다시 북쪽으로 되돌리려고 하오. 그래서 그 자리를 같이 살펴보고자 동행했소."
그 말에 무타우타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다 조금 전 양녕을 따라왔던 수많은 기병들을 떠올렸는지 양녕 쪽 휘장 입구를 슬쩍 보더니 양녕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저희가 옮겨가야 됩니까?"
그 반응에 양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여기서 더 북쪽에 괜찮은 곳이 있어 거기로 옮길 것이오. 그 자리를 살펴보러 멀리까지 갔다 올 것이라 호위병이 숫자가 많고 다들 말을 탔을 뿐이고 말이오."
"그런 거였군요. 다행입니다. 전 또 쫓아내려고 사람을 잔뜩 데려오신 줄 알았습니다."
"잘못한 것 없는 이를 어찌 쫓아내겠소? 안심하시오."
양녕의 말에 안도하는 표정이 된 무타우타가 말했다.
"그런데 그러면 여기 오신 이유는 뭐인 겁니까? 여기는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 길로 빠져야 올 수 있는데다가, 여기서 북쪽으로 가는 마땅한 길도 없습니다. 혹시 길이 익숙하지 않으셔서 잘못 오신 거면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괜찮소. 길은 알고 있소. 여기 온 것은 그것과 별도로 그대에게 용무가 있어서요."
"무슨 용무입니까?"
무타우타는 물론이고, 아직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던 최윤덕과 최만리도 귀를 기울인 가운데 양녕이 입을 열었다.
"그대와 그대의 부족이 우디거에 속한다고 들었소. 그대가 오돌리 부족과 친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데, 혹시 다른 우디거들과도 잘 알고 지내거나 친하시오?"
용무에 대한 말은 아니었지만 무타우타는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예, 저희도 우디거지요. 다른 부족들하고도 전부 친한 건 아니지만 거의 다 알고지내면서 필요한 걸 서로 맞바꾸기도 합니다."
"필요한 걸 서로 맞바꾼다면 사는 방식들이 많이 다른가보오?"
양녕의 질문에 무타우타는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말도 마십시오. 숲에 산다고 해서 우디거라고 하는데 여기 북쪽으로 숲이 좀 넓습니까? 그 넓은 데에 부족마다 흩어져서 사니 별별 놈들이 다 있습니다. 나무껍질 벗겨서 먹는 놈들, 쇠 다룰 줄 몰라서 돌로 도구 만들어서 쓰는 놈들, 사냥으로 먹고사는 놈들, 자작나무 껍질 벗겨서 배 만들어다가 물고기 잡는 놈들, 심지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서 같은 우디거인데도 말이 잘 안 통하는 놈들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용무라는 게 이게 궁금하셔서 물어보러 오신 건가요?"
"그건 아니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확인하고자 했던 것일 뿐이오. 여하튼간 우디거들이 그리 널리 퍼져서 살고 있고, 또 그대가 그 다양한 우디거들을 두루 아는 모양이니 하나 요청할 것이 있소. 그게 바로 용무요."
사실대로 공험진 얘기를 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소문이 명나라에 들어가면 곤란했기에, 양녕은 본 목적을 숨기고 이어서 말했다.
"내 조상들께서는 조선이 세워지기 전까지 대대로 이 근처에 사셨소. 그래서 무덤도 몇 있었던 것이고 말이오. 그런데 지난날 국경을 뒤로 물리면서 무덤들은 이장해 갔는데, 그분들께서 사셨던 땅은 어떻게 옮겨갈 수가 없으니 그대로 두고 갔단 말이오. 그대로 시간이 지나다보니 이제는 위치가 어딘지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소. 후손이 되어 가지고 조상들의 고향을 잊다니. 참 체면이 서질 않는 일이지."
혈통을 중시하는 여진족이니 조상 얘기가 먹힐 것이라는 양녕의 예측이 적중했는지, 무타우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거 큰일입니다. 요청이라는 게 그 땅을 찾는 거에 관련된 모양이군요. 제가 뭘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수이푼 강 근처에 있는 성이라는 것뿐이오. 그러니 다른 우디거들에게 수소문해서 수이푼 강에 접한 성터를 최대한 찾아봐 줄 수 있겠소?"
"우선 성터들을 다 알아놓고 하나씩 다니시면서 여기가 맞는지 확인하시려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다른 우디거들한테 말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제대로 찾아 줄까 모르겠네요."
"아마 그냥 찾아 달라고만 하면 열심히 하지 않을 거요. 그건 우리가 해결해 주겠소."
양녕의 말에 먼터무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 그러면 좋지요. 뭡니까?"
"도끼를 팔아 주겠소."
양녕의 말이 끝났지만 다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 짧은 침묵 끝에 무타우타가 궁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하필 도끼입니까?"
"우디거는 부족마다 다 다르게 산다고 했으니, 지금 교역소에서 조선이 파는 면포나 소금, 편자 같은 것은 필요 없어 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오. 그렇다고 각 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각각 팔기에는 너무 종류가 많아지고 말이오."
"그렇겠지요?"
"하지만 도끼는 다르오. 숲에 사는 사람이라는 이름답게 우디거들은 모두 나무를 다루며 살지 않소? 껍질을 먹으려는 것이건, 배를 만들려는 것이건, 사냥할 도구를 만들려는 것이건 도끼가 있으면 쓸모가 매우 좋을 것이오."
"듣고 보니 맞습니다. 안 그래도 조선에서 나는 그냥 쇠붙이도 구하기가 어려운데, 잘 만들어진 도끼면 진짜 귀한 물건입니다. 성터를 잘 찾아오면 팔아 주겠다고 하면 말을 잘 듣겠네요."
"그렇소. 그리고 도끼는 그대에게만 독점적으로 팔 것이오. 물론 쇠붙이를 여진족에게 함부로 파는 것을 나라에서 금하고 있으니, 한 번에 많이 팔 수는 없을 것이오."
"그건 괜찮습니다. 오히려 조금씩 천천히 팔아야 더 귀해져서 비싸게 팔리니까요."
"좋소이다.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하겠소. 조정에 보고를 올리고 나중에 찾아가기도 하려면, 성터가 어디쯤에 있다더라 하는 대략적인 내용만으로는 안 되고 자세한 위치와 가는 길도 알아야 하오. 거기에 더해서 어디 사는 어느 부족이 찾아서 알려 주었다 하는 내용도 있어야 우리가 성터를 못 찾을 때 그 부족을 찾아가 길 안내를 부탁할 수도 있을 것이오."
"예. 나중에 찾아가시려면 당연히 그것도 아셔야지요. 그럼 알아내는 대로 모아 두었다가 교역소에 갈 때마다 거기 관리에게 맡기겠습니다."
"고맙소. 참, 성터를 찾고 나서도 도끼는 계속 팔겠소. 만일 우디거 집집마다 도끼가 한 자루씩은 있게 되어 잘 팔리지 않게 되면, 그때는 또 팔기 좋은 다른 물건을 팔아 줄 것이니 안심하시오."
양녕의 말에 무타우타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입니까, 왕자님? 감사합니다! 이제 먼터무 형님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겠네요. 사실 도끼를 팔아 준다고 해도 우디거들 사이에서나 필요한 물건들을 받고 팔 거라 조선에서는 가치 없는 물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좋거나 귀한 물건이 들어오면 왕자님께 꼭 먼저 드리고 남으면 교역소에 팔기도 하겠습니다."
"하하하. 나는 안 줘도 괜찮소. 그 마음만 받겠소. 그럼 우리는 경원부 되돌릴 자리를 살펴보러 이만 가 봐야겠소."
"정말 감사합니다, 왕자님. 저한테 자꾸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게 문수보살의 가피가 아니라 아예 왕자님께서 문수보살이신가 싶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쇼. 다음에 꼭 선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무타우타가 양녕에게 넙죽 인사하고는 휘장 밖으로 나갔다.
무타우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양녕에게 최윤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역시 대군께서는 대단하시고도 또 무서운 분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