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35화
135화
이도의 말이 끝나고 이어진 적막을 깬 것은 좌의정 황희였다.
"공험진의 위치라……. 생각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무작정 북쪽으로 진출했는데 만일 명나라에서 공험진 위치를 파악하고 있고, 우리가 그 북쪽으로 진출해 버린다면 선황제의 명을 어겼다고 책잡힐 수 있습니다."
뒤이어 허조도 입을 열었다.
"저는 여전히 명나라가 공험진 위치를 알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노아간도지휘사사를 세운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흑룡강 하구라는 것은, 육로도 제대로 몰라서 흑룡강만 따라가다가 도착한 끝에 세웠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룡강과 두만강이 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니, 그 사이를 어찌 다 탐사했을 것이며, 조선이 진출한다고 바로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허조의 말을 들은 이도가 말했다.
"그리 쉽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북방으로 진출할 때 모든 여진족들을 다 복속시키거나 흡수하면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들 중에는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부족도 있을 것이오. 전부 억지로 찍어 누르거나 모조리 없애 버릴 수 있다면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오. 그리고 전투에서 도망친 일부가 명나라 쪽으로 달아날 수 있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명나라에서도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들겠지요."
"그렇소. 그런데 만일 명나라가 공험진 위치를 알고 우리는 몰랐는데, 하필 그 부족이 공험진 이북에 살던 이들이라면 소식을 듣자마자 명나라가 바로 국경을 넘은 것을 따지려 들 것이오. 설령 명나라가 공험진 위치를 몰랐더라도, 달아난 여진족들이 위치를 알고 있었다면 명나라가 새로 알게 되겠지."
"흑룡강 근처에 사는 부족들이야 몰랐다고 해도, 흑룡강과 두만강 사이에 살던 부족들이라면 공험진 위치를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소. 그리고 최악의 경우 명나라가 어찌된 일인지 파악하자며 공험진에 가 보자고 할 수도 있소. 명나라는 위치를 아는데 우리가 못 데려갈 경우 선황제를 능멸했다는 문제까지 들고 나올 수 있소."
이도의 말에 허조가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황희가 말했다.
"그럼 우선 명나라가 위치를 아는지 먼저 슬쩍 확인한 다음 결정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명나라가 공험진 위치를 안다고 하면 슬쩍 지도나 가는 길에 관한 것을 빼내오면 되는 것이고, 모른다고 하면 우리에게 유리한 지역을 공험진이라고 정해서 우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슬쩍 알아낸다는 게 말은 쉽지만 실제로 가능하겠소? 그리고 우리가 우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명나라도 우길 수 있소. 국력으로 찍어 누르면서 우긴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없소."
"결국 공험진 위치를 정확히 알아두고 움직이는 게 뒤탈이 없겠군요."
"그렇소. 그런데 단서가 하나도 없으니 우선 길주목이 옛 길주성과 같은지 확인하고, 거기서 짚어나가려 했던 것이오."
그때 조용히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우의정 맹사성이 나섰다.
"길주목과 길주성이 같다고 밝혀져도, 다른 성이 길주성에서 어디로 얼마나 떨어져 있다 하는 자료가 없으니, 결국 공험진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차라리 공험진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다른 단서가 있다면 그걸로 바로 공험진을 찾아나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상의 말이 일리가 있긴 하오. 옛 기록에서 찾은 단서도 마침 몇 있소."
"무엇입니까?"
"수빈강이라는 강이 백두산 북쪽에서 발원해서 북쪽으로 흘러가며 공험진을 지난다 하오. 이어서 동쪽으로 흐르며 선춘령이라는 고개를 지나고, 공험진처럼 윤관이 쌓았다는 거양성이라는 곳을 지난다 하오. 그리고 계속 흘러서 아민이라는 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내용이오."
"공험진과 선춘령, 거양성이 전부 강변에 있다면 강을 따라가면 찾기 쉬울 것인데, 이리 일이 어려워진 것을 보니 정확히 무슨 강 어느 줄기를 나타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맹사성의 말에 이도가 끄덕거리고 대답했다.
"맞소. 내 어제 동권두를 불러 물어보니 수빈이라는 강 이름은 여진말을 한자로 옮긴 것 같다며, 원 이름은 여진말 수이푼. 즉 송곳이라는 뜻인 것 같다 하였소. 그래서 한성부에 와 있던 우디거들을 불러모아놓고 수이푼이라는 강을 아냐고 물어보았지."
"어찌 되었습니까? 설마 아는 이가 없었습니까?"
"반대였소. 다들 자기네 출신지 근처를 흐르는 강이라 하더군. 문제는 그 우디거들 출신지가 다 달랐다는 것이오. 보아하니 그 수빈강이라는 강이 엄청 길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까지 하는 모양이오."
잔뜩 긴장하고 듣던 중신들은 이도의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무작정 강줄기를 다 따라가며 찾는 것도 힘들겠군요."
"다른 단서도 있긴 했소. 조금 전 말한 윤관이 쌓았다는 거양성에 높이가 3척이나 되는 종이 있었는데, 경원 사는 유성이라는 자가 그 종을 고철로 팔고자 욕심을 냈다 하오. 그래서 사람들을 데려가 종을 깬 다음 몇 조각을 말에 싣고 오다가 동티가 나서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요."
"그럴싸한 사실 같기도 하면서, 또 아이들 잠자리에서 들려주는 허황된 이야기 같기도 해서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리고 수빈강이 지나간다는 선춘령이라는 고개에 윤관이 고려 국경임을 나타내는 비석을 세웠다는 말도 있었소."
그 말에 황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강줄기는 길더라도 비석이 세워진 고개가 강변에 많지는 않을 것이니, 그걸 참고로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수빈강변 출신 우디거들 중에 강변 고개에 비석이 있는 것을 본 적 있다는 자가 하나도 없었소."
"결국 돌고 돌아 답이 나오지 않는군요. 그래서 아까 길주성 위치부터 바로 말씀을 꺼내셨던 것이었군요. 차라리 그럼 우선 경원부를 되돌린 다음 길게 내다보고 천천히 공험진을 찾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경원부를 되돌릴 위치는 원래 있던 근처이면서 북방으로 뻗어 나가기 좋은 조건이면 충분한 것이니, 굳이 공험진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황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도가 입을 열었다.
"좌상의 말이 옳으니, 그럼 우선 경원부부터 되돌리는 것이 좋겠소. 하지만 지금 우리는 원래 국경을 되돌리겠다는 명분을 명나라에게서 얻어낸 상황이지 않소. 공험진 위치를 찾아 거기까지 국경을 밀고 나가는 것이 늦어져 버린다면, 두만강에서 멈춘 것은 두만강이 원래 국경이라는 뜻 아니겠냐며 명나라가 견제해 들어올 수 있소. 경원부를 되돌리는 것과 별개로 공험진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소."
이도의 말에 다들 말없이 고민에 빠지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며 생각하고 있던 양녕이 드디어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제가 이번에 동북면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공험진의 위치나 그 찾는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양녕의 말에 이도가 기쁘게 대답했다.
"형님께서 그래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우선은 집현전에 시켜 최대한 자료들을 조사해 모아다 주십시오. 공험진과 선춘령, 거양성은 물론이고 수빈강이나 동북방 여진족들에 관한 자료들도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또 필요하신 것은 없습니까?"
"사람을 좀 쓰고 싶은데 구해 주십시오."
"기술자를 원하시나 보군요. 어떤 사람을 모집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양녕은 정신없이 사초를 적고 있는 사관을 슬쩍 보고 대답했다.
"탁본에 능한 자. 돌을 잘 다듬는 자. 비석을 잘 새기는 자가 필요합니다. 윤관이 고려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비석을 찾으면 탁본을 떠오고, 새로 조선에서 확인하고 갔다는 비석을 옆에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녕의 말을 들은 이도도 사관을 슬쩍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국방에 관한 중요한 일이니, 재주가 뛰어나고 입이 무거운 이들로 바로 모집해 드리겠습니다."
양녕이 직접 나서겠다는 말에 다른 중신들이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양녕과 이도가 사관을 슬쩍 본 이유를 알아챈 황희만이 안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관이 세웠다는 그 비석,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 같군.'
* * *
1426년 5월 하순 모일 오후.
한성부. 수강궁.
의논을 마치고 조계청을 나온 양녕은 그길로 바로 이방원의 처소인 수강궁으로 향했다.
"소자, 문안드리고자 왔습니다."
양녕이 수강궁 안에 들어오자, 이방원이 누워 있던 침상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왔느냐. 가까이 와서 여기 의자에 앉거라."
양녕이 침상 가까이 놓인 의자에 와 앉자 이방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의논에 빠진 것이 걱정되어서 온 모양이구나."
"예. 평소에는 의논 때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더라도 주상 옆에 앉아계시기라도 하셨는데, 오늘은 수강궁에서 쉬고 계신다고 하셔서 와 보았습니다. 혹시 편찮으신 거라면 의원을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이방원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주상이 정무를 보는 옆에 내가 계속 앉아 끼어드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지금도 용안의 낯빛이 그리 좋지 않아 보입니다."
"아마 어제 저녁에 주상을 도와 이것저것 하느라 잠을 조금 못 자서 그럴 게야. 지금 충분히 자고 일어났으니 곧 나아질 것이다."
뜻밖의 말에 양녕이 물었다.
"어제 저녁이라니요? 주상께서 어제는 한성부의 여진족들을 모아 이것저것 물어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 뒤에 나에게 와서 조언을 구했다. 내일 바로 중신들을 모아 의논을 할 것인데, 자신이 미리 더 많이 알아두고 있어야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않겠냐며 말이다."
"그래서 오늘 주상께서 그리 정확하고 자세히 알고 계셨군요."
"그래. 정말로 국경을 회복하는 일에 온 관심이 가있는 모양이더구나. 내가 부덕한 탓에 주상이 신경을 쓰게 해 버렸어. 내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뒤로 물렸던 국경을 주상이 오히려 더 크게 뻗어서, 후대가 나를 두고 땅을 잃었다 흉볼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겠지."
"부덕하시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경을 견고히 지키고자 경원부를 잠시 뒤로 물리셨던 것이지 않습니까."
양녕의 말에 미소 지은 이방원은 이내 회한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국경을 그냥 물린 것도 아니고 선조의 능묘가 있는 고을이 약탈당한 다음 관리가 어려워 물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오래 그 자리에 있던 능묘도 이장할 수밖에 없었으니, 후대가 흉본다 한들 내 업보를 내가 받은 것이지."
그 말에 양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이방원은 바로 주제를 돌렸다.
"네가 오랜만에 동북면에서 돌아왔는데 너무 어두운 소리만 했구나. 그래, 의논해서 길주성이나 공험진성의 위치를 알아내거나, 경원부를 어디로 되돌릴지 결정은 났느냐?"
"우선 북방으로 뻗어 나가기 좋은 자리로 경원부를 먼저 되돌려 설치하자는 것은 주상께서도 승인하셨습니다. 그리고 길주성이나 공험진성의 위치는 의논해도 결국 명확하게 나오지가 않아서, 이번에 제가 동북면에 가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구나. 야인들의 땅을 다녀야 할 테니 항상 조심하거라.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네가 직접 다니지 말고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여전히 어린아이를 걱정하듯 말하는 이방원의 모습에 양녕도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예, 아바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양녕의 대답에 만족한 듯 끄덕이던 이방원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양녕에게 말했다.
"내 주상에게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다. 마침 너와 나만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상담을 좀 하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