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34화
134화
1426년 5월 하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양녕은 한성부에 돌아오자마자 이도에게 경원부를 되돌리는 일에 관해 중신들을 모아 의논할 것을 건의했다. 이도는 흔쾌히 승낙했고 바로 다음날 중신들을 모두 조계청으로 모았다.
"그렇게 해서 북쪽으로 올라간 끝에 온성진을, 그 중간 지점에 종성진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양녕의 설명을 쭉 들은 이도가 말했다.
"이제 두만강 이남에서 북쪽으로 갈 수 있는 끝까지 간 셈이로군요. 그럼 이제 경원부를 어디로 되돌릴 지가 문제인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이조판서 허조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디로 되돌리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양녕이 이도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지금 옛 경원부 터에는 무타우타가 자리 잡고 있지 않소. 그 터를 비우지 않고 오랑캐가 있는 상태로 경원부를 되돌릴 수도, 이유도 없이 무타우타를 쫓아낼 수도 없소."
"무작정 쫓아내는 게 아니라 그 근처 괜찮은 자리에 터를 잡아 주고 이주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설령 경원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왕실의 중요한 옛 터에 오랑캐들이 언제까지고 활보하게 두는 것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이번에는 좌의정 황희가 대답했다.
"맞는 말이오. 하지만 무타우타가 순순히 따르겠소? 옛 경원부가 그 자리에 설치되었고, 무타우타가 거기로 와서 자리 잡은 이유는 옛 경원부 터가 지세가 매우 좋은 땅이기 때문이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북방임에도 겨울에 칼바람이 덜하고, 동쪽에서 연료로 쓸 석탄이 나고, 가까운 하천을 따라가면 금방 두만강으로 나갈 수 있지. 아마 어지간히 괜찮은 자리로 옮겨 주지 않는 한 무타우타가 따르지 않을 것이오."
"무타우타가 말을 안 들으면 그땐 토벌해 버리면 그만이지 않소? 전조 고려 때부터 여진족들이 세를 키워 위험해지기 전에 미리미리 군대를 보내 짓밟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오. 먼저 말로 좋게 이주하라고 해 보고, 감히 어명을 거절한다면 그대로 쓸어버리고 땅을 비워 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소."
밑도 끝도 없이 강경한 허조의 말에 황희가 당황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잘못한 게 없는데 오랑캐들이라고 해서 몰살할 수는 없소. 적당한 명분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리고 무타우타가 아직 명나라의 천호 벼슬을 가지고 있으니, 냅다 죽였다가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소. 또 무타우타의 부족은 우디거이면서도 오돌리 부족과 말이 통하오. 조선에 오돌리 말을 잘하는 이는 많아도 우디거 말을 잘하는 이는 얼마 없으니, 그들을 잘 관리해 가며 통역으로 쓴다면 우디거를 통제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소?"
그렇게 말한 황희는 허조를 좀 말려달라는 듯 이도를 보았지만, 이도의 입에서 나온 것은 황희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꼭 그렇지만도 않소. 명나라의 천호라고는 하지만 요동의 개양성을 약탈하고 도망쳤다는 핑계로 옮겨오지 않았소.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도 없으니, 상국의 고을을 약탈한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무타우타를 잡아 죽인다 해도 명나라도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우디거 가운데 조선말이 되거나, 조선인으로 우디거 말이 되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들이 조금 어눌하거나 서툴지는 몰라도 굳이 무타우타에게만 의지할 필요는 없소."
이도의 말에 표정이 굳은 황희와 반대로 허조는 화색을 띠며 물었다.
"그럼 다 밀어버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또 아니오."
그 말에 황희처럼 표정이 굳은 허조를 향해 이도가 말을 이었다.
"오돌리 부족과 우디거는 원래 그리 사이가 좋지 않소. 그런데 무타우타는 우디거이면서도 먼터무와 친하게 지내고 있소. 그렇지 않습니까?"
갑작스러운 이도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했다.
"예, 주상. 무타우타가 먼터무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더군요. 먼터무 앞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저를 따로 만났을 때도 먼터무를 가리켜 형님이라 했습니다."
"그렇다 하오. 그리고 오돌리 부족의 먼터무가 조선에 충성을 맹세하고 복속될 정도인데, 정작 그보다 더 작은 부족의 무타우타는 그런 움직임이 없소. 똑같이 명나라에게서 버림받다시피 한 상황인데도 말이오."
이도가 말하려는 것을 파악한 황희가 말했다.
"오돌리 부족과 친하게 지내서 우디거들과 사이가 나빠졌거나, 혹은 반대로 우디거들과 사이가 나빠져서 오돌리 부족과 친했던 거라면 이번 일로 의지할 데가 없어졌을 테니 먼터무를 따라 조선에 줄을 서야겠지요."
"맞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오돌리 부족은 물론이고 우디거들하고도 두루 친한 자라 보는 것이 맞겠지. 같은 우디거끼리 의지할 구석이 있다면 굳이 조선 밑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오. 그러니 통제만 생각한다면 다른 선택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여진족들을 장차 조선이 흡수하려 한다면 무타우타를 잘 써야 하오."
"그럼 결국 무타우타는 그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허조의 말에 이도가 끄덕거리고 말했다.
"어차피 경원부는 그 일대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의미가 있는 것이오. 애초에 옛 경원부에 있던 두 왕릉도 함흥부로 옮긴 판에 위치에 집착할 건 없다 생각하오. 읍치라는 것이 원래도 옮겨지고 나뉘고 쪼개지고 하는 것 아니오."
약간 시무룩해진 허조와 달린 황희는 흡족한 듯 말했다.
"맞습니다. 기왕이면 더 좋은 자리로 옮겨야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경들 가운데 지금 길주의 위치가 옛날 길주와 같은지 어떤지 아는 이들이 있소?"
순간 주제에서 벗어난 듯한 이도의 말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중신들이 무슨 말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양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홉 성의 위치를 찾고자 하십니까?"
"맞습니다. 역시 형님께서는 바로 이해하시는군요."
환한 표정의 이도와는 반대로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중신들에게 양녕이 설명했다.
"전조 고려의 장수 윤관이 여진족을 소탕하고 동북방에 아홉 성을 쌓았고, 그것으로 여진족을 굴복시킨 다음에는 유지가 어려워 땅을 다시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는 것은 다들 아실 것이오. 주상께서는 그 아홉 성을 말씀하신 것이오."
양녕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황희가 이도에게 질문했다.
"그 아홉 성을 말씀하시는 것이었군요. 그런데 왜 아홉 성 중에 하필 길주입니까?"
"지금에 이르러 아홉 성들의 위치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가 않소. 그런데 아홉 성의 이름 가운데 지금까지도 쓰이고, 위치가 알려져 있으면서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이 길주목이오. 조선의 길주목이 윤관이 설치했던 길주성과 같은 것이라면 그걸 토대로 다른 성들의 제대로 된 위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오."
"위치를 찾는다 하시면……."
"길주성 이남의 성들 위치는 사실 큰 상관이 없소.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윤관의 아홉 성 중 가장 북쪽에 있었다는 공험진성이오. 명나라의 홍무제가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영토고 이북은 요동에 속한다고 했던 바로 그 공험진의 위치 말이오."
이도의 말에 예조판서 신상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상왕전하께서 재위 중이실 때 명나라에 상주문과 지도를 가져가서 공험진 이남이 조선의 땅임을 확인받지 않았습니까? 그 지도를 보면 공험진성 위치가 나와 있을 것인데 어째서 길주성이 위치가 알려진 가운데 가장 북쪽입니까?"
신상의 질문에 이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 지도는 개략적으로만 나온 것이었소. 정확한 위치는 조선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공험진이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지도에 없는 것도 이상하고, 반대로 지도에 이미 있다면 우리의 영토라고 하는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겠소. 그래서 기존의 동북면 지도에 그럴싸하게 추가해서 만든 지도를 들려 보냈던 것이오. 그런데 명나라가 공험진 위치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조선이 보낸 지도만 가지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명나라 자체적으로 제대로 된 지도가 있어서 그것을 참고했는지 알 수가 없소."
이도의 설명을 가만히 들은 허조가 말했다.
"조선의 동북방이니 조선보다 명나라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조선에 정확한 지도가 없다면 명나라에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없소. 영락제 때 흑룡강을 따라 쭉 가서 창해에 이른 다음, 흑룡강 하구에 노아간도지휘사사라는 관청을 세워 흑룡강 일대를 관할하게 했소."
"명나라가 흑룡강 일대를 통치중이란 말입니까?"
놀라는 허조에게 이도가 말했다.
"실제론 이름만 있는 관청이나 다름없소. 요동 평야 밖으로는 제대로 관리도 못하는 명나라가 어떻게 흑룡강 일대를 통치하겠소. 대신 수시로 관원을 보내 살펴보고 오게 한다 하더이다. 근처에 영녕사라는 절을 지어놓고 노아간도지휘사사를 설립한 내력을 새긴 비석도 세웠다 하오."
"영녕사라. 영원토록 안녕하기를 바라는 이름이군요. 거기다 절 안에 비석을 세웠다면 불교를 숭상하는 여진족들이 함부로 훼손하지도 않을 테니 제법 머리를 썼군요. 아무래도 관리할 마음은 충분히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소. 그런 상황에서 관원을 수시로 보내 살펴보게 한다면 공험진 위치를 알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내가 이런 생각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오. 명나라에서 흑룡강을 따라가 노아간도지휘사사를 설치한 것이 아바마마께서 영락제에게 지도와 상주문을 보내 공험진 이남이 조선 땅임을 확인받은 이후요."
"그 전까지는 공험진 위치를 몰랐던 것이 맞더라도, 일단 승인해 준 다음 공험진이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인가 확인할 겸 보내서 정말로 알아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갑자기 공험진 위치는 왜 찾으십니까? 경원부를 어디로 되돌릴지 의논하시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잠시 잊고 있던 궁금한 점을 허조가 물어보자 다른 중신들도 기억났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이도의 대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홀로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은 양녕과 잠시 눈을 마주친 뒤, 이도가 이내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경원부를 되돌리는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이오. 기왕에 동북방으로 뻗어나간다면 이전 국경으로 되돌리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땅을 넓힐 수 있는 국경을 새로이 굳히는 것이 옳지 않겠소? 홍무제가 승인했던 공험진 이남이라면 우리가 모조리 영토로 집어넣어도 명나라가 무어라 할 명분이 없으니, 공험진을 찾아 새 국경으로 삼으려는 것이오."
선포와도 같은 그 말에 허조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험진 이남을 전부 말씀입니까? 공험진이 이전 국경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이도는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 좋소. 아니, 그렇기를 바라기 때문에 경원부를 되돌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공험진 이야기를 꺼낸 것이오. 옛 경원부 터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머무르기에만 좋은 자리가 아니라, 북방으로 뻗어나갈 발판이 되기에 적합한 곳으로 경원부를 옮겨 설치하려고 말이오."
더러는 눈을 빛내고, 더러는 당황스러워하는 중신들의 반응을 보며 씨익 웃은 이도가 말을 이었다.
"옮겨 설치될 땅에 조종의 능묘가 없고 그 옛 묫자리가 없다 하더라도 경원부라는 이름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오. 새로운 경사의 근원이 될 것이니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