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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33화 (13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33화

133화

"조금 전에는 명목상으로만 조선의 땅으로 만든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소?"

먼터무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양녕이 말했다.

"맞소. 아무래도 조선이 수령을 보내서 오돌리 부족을 천천히 잠식하려 한다 생각하고 긴장한 모양이군. 맞소?"

잠깐 머뭇거리던 먼터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비슷하오. 거기다가 여기에 요새라도 짓고 수령과 병사들이 주둔한다면, 내가 오돌리 부족을 다스리게 두면서도 점점 내 위신과 통제력이 무너질 테니 그걸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역시나 그랬군. 그런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이 일대가 요충지이니 요새를 두긴 하겠지만, 회령진에 바로 짓는 것은 아니고 적당히 떨어진 중요한 길목마다 관문처럼 몇 개 지을 것이오.

"수령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명목상으로나마 조선의 고을인데 다스리는 이의 직함이 부족장이어서는 안 되니 명목상으로 수령을 두는 것뿐이오. 오돌리 부족 유력자에게 회령진 지사 자리를 내릴 것이오."

"그러면 다행인데……. 괜찮겠소?"

먼터무가 슬그머니 말을 흐린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이 여진족 부족장들에게 천호라는 관직을 내려 간접적으로 봉신화하고 통제했던 사례는 흔하니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명나라의 건주좌위지휘사인 자신에게 조선이 관직을 내린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는 걱정이었다.

그런 숨은 뜻을 읽어낸 양녕이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고말고 애초에 문제가 있겠소? 회령진 지사로 임명되는 것은 그대가 아니오. 그대의 아들인 아구, 조선 이름 동권두요."

그 말에 놀란 먼터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오!"

휘장 안에 있던 호위병들이 칼을 뽑아들려는 것을 손짓으로 중단시키며 양녕이 말했다.

"앉으시오."

날카로운 양녕의 시선에서 이성계의 분위기를 느낀 먼터무가 머뭇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자, 양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리 놀라시오? 계승자인 장남을 조선에 보내어 충성을 맹세했으니, 우리도 그대를 도와주어야지. 그 장남에게 회령진 지사 자리를 맡기는 것이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 아니오? 오돌리 부족에 영향력도 미리 쌓을 수 있고, 조선의 관직도 지내고 있으니 위신도 올라갈 것 아니오."

양녕은 말없이 가만히 듣고 있는 먼터무를 향해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선이 오돌리 부족을 없애려고 한다면야 부족장 계승자를 여진족과 관련 없는 자리에만 임명하고 오돌리 부족과 거리를 두게 하여 후계 구도를 엉망으로 만드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 오돌리 부족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 데 그리해서는 도리가 아니고 말이오."

양녕의 말을 듣던 먼터무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제대로 당했다. 최소한 양녕대군, 어쩌면 조선 조정 전체가 우리의 계승법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내가 이미 충성의 표시로 계승자를 보내는 것처럼 굴어 신임을 얻었으니, 사실은 둘째 아들인 충샨이 부족장 계승자고 맏아들 아구는 어차피 분가할 것이라서 보낸 것이라고 이제 와서 말할 수도 없다. 이대로 오무호에 부족장 후계자인 충샨과 조선의 관리인 아구가 공존하게 된다면 오돌리 부족은 분열될 수밖에 없어.'

먼터무의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흐뭇하고 웃던 양녕이 말했다.

"그래도 맏아들 얼굴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애초에 맏아들을 볼모로 보낸 것 아니오? 그런데 아무리 충성을 맹세하고 신임을 얻었다고는 하나 다시 오돌리 부족 근처에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소. 어차피 명목상의 수령일 뿐이니, 그대의 아들이 회령진 지사가 되더라도 한성부에만 머물게 될 것이오."

그 말에 먼터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당장 오돌리 부족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어진 것이다.

"얼굴 보기 힘든 것이야 뭐 참을 수 있소. 어린애도 아니고, 그리될 것도 알고 보낸 것이니까."

안도감을 숨기며 애써 정말로 서운함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짓는 먼터무를 보고 양녕이 미소 지었다.

"그러면 다행이오. 그럼 난 아까 말했다시피 또 갈 곳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봐야겠소. 대신 가기 전에 선물이 하나 있소."

그렇게 말한 양녕이 손짓하자 양녕 쪽 휘장 입구에서 병사 몇이 큼직한 항아리 하나와 비단 꾸러미 하나를 들고 와 먼터무 쪽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항아리 안에서 들리는 출렁이는 소리와 은은하게 퍼지는 냄새로 내용물을 짐작한 먼터무가 말했다.

"술이오?"

"맞소. 아르키라고 말해야 하려나?"

"소주라는 조선말로도 알고 있소. 그럼 이 꾸러미는 뭐요?"

"술이 있으면 술을 담을 병하고 잔도 있어야지 마시지 않겠소? 술은 동북면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만든 것이고, 병하고 잔은 광주부의 자기소에서 만든 것이오. 광주부 자기소에서 만들어진 자기는 조정에서 사들여 궁중에서 쓸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니 두고두고 쓰시기 좋을 것이오."

침울함이 깃든 표정으로 항아리와 꾸러미를 번갈아 바라보던 먼터무가 말했다.

"고맙소. 그럼 살펴 가시오."

* * *

1426년 5월 중순 모일 오후.

경원부. 관아 동헌.

먼터무에게 선물을 주고 바로 병사들을 데리고 회령진 북부를 탐색했던 양녕은 해가 지기 전에 경원부로 돌아왔다. 돌아온 양녕이 가져온 북부지역 지도를 보던 최윤덕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 짧은 시간에 지도까지 만들어서 오셨다니, 대단합니다."

"측거의로 대충 측량해가며 간략하게만 만들게 한 것이오. 정확하지는 않소."

"이 정도만 되더라도 큰 도움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걸 토대로 어디에 진과 요새를 설치할지 큰 계획만 먼저 세울 수 있어도 품이 많이 줄지요."

그렇게 말한 최윤덕이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오토모 저택 전투에서 입은 화상의 흉터가 왼쪽 이마와 뺨을 크게 덮은 탓에 인상이 무서워지기는 했지만, 지도를 살피며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는 그 총명한 눈빛은 양녕과 함께 칠주도를 정벌하던 몇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사실은 가서 살펴보면서 진을 설치할 만한 터를 몇 곳 보아 두긴 했소."

양녕의 말에 최윤덕이 지도에서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정말입니까? 대군께서 미리 그리 해주셨다면 더 큰 도움이 되지요. 어디입니까?"

양녕이 지도상으로 두만강이 가장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북쪽으로 흐르던 두만강이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북쪽으로 흐르지 않고 동쪽으로 흐르다가, 이 지역을 지난 다음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오. 즉 여기가 두만강을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는 최북단 지역인 셈이오."

"두만강을 경계로 삼는다면 여기가 여진족에게 둘러싸인 돌출부가 되는군요. 중요한 지역이니 여기에는 무조건 진을 설치해야겠습니다."

"그렇소. 마침 큰 평지도 있으니, 제법 큰 고을을 만들고 튼튼히 방비하면 될 것이오."

"혹시 이름도 생각해 두신 것이 있습니까?"

"이 평지를 여진인들은 다온이라 부른다 하오. 한자 표기 마지막 글자인 따뜻할 온을 취하되, 빈말로도 따뜻한 곳은 아니니 음이 닮은 평온할 온으로 바꾸어 온성이라 하면 어떻겠소?"

"온성진이라. 최북방을 평온케 하는 성이니 딱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양녕은 이번에는 온성진과 회령진 중간 지점을 가리켰다.

"그리고 한 곳 더 있소. 온성진과 회령진 중간, 두만강을 면한 이 지역이오. 그리 평지가 넓지는 않지만 대신 내륙으로 이어지는 큰 산길이 있소."

"온성진을 설치할 자리가 회령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두 진의 중간 지점을 보강할 진이 하나 더 있는 것이 좋지요. 마침 위치도 거의 딱 중간이고, 터는 좀 좁더라도 수운과 육로를 둘 다 활용할 수 있어 보이니 여기에도 진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혹시 여기도 이름을 생각해 두셨습니까?"

"이 지역은 딱히 여진인들이 부르는 이름은 없는 것 같소. 대신 지역 남쪽에 퉁건산이라는 산이 있었소. 퉁건이 여진말로 종을 뜻하는데, 산이 꼭 종을 떼어다 세워놓은 것처럼 생겨서 여진인들이 그리 부른다 하오. 그러니 그 뜻을 따서 종성이라 하면 어떻겠소?"

"괜찮군요. 그럼 종성진이라 하면 되겠습니다. 또 있습니까?"

신이 나서 물어보는 최윤덕에게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더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한 번에 다 설치할 수는 없지 않겠소? 혹시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우선 온성진과 종성진을 설치하면서 천천히 다음 계획을 잡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하기야, 확실한 요충지인 두 진과 달리 다른 지역은 여진족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중요도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경원부가 다시 돌아가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오. 옛 경원 터에는 무타우타와 그 부족이 살고 있으니, 왕실의 중요한 상징이기도 한 경원부를 회령진처럼 오랑캐 마을에 그냥 설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타우타를 명분도 없이 쫓아낼 수도 없소."

"그렇지요. 기왕이면 이참에 그 근처에 더 좋은 터를 정해서 그곳으로 경원부를 되돌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윤덕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그럼 내가 이번에 한성부에 돌아가서 주상과 중신들과 얘기를 해 보겠소."

* * *

같은 날 초저녁.

회령진.

먼터무의 동복아우 판차는 먼터무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미간을 찡그리고 입으로 숨을 쉬며 말했다.

"조선 왕자가 왔다간 뒤로 집 밖으로 나오지를 않으신다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와 봤더니만,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얼마나 진탕 마셨으면 집 안에 이리도 술 냄새가 진동을 합니까? 형님이 이렇게 많이 취한 건 오랜만에 봅니다."

먼터무는 이미 눈이 풀린 채로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조선에 완전히 당해 버렸다."

"예?"

"내가 젊을 때는 이성계 어르신을 따라다녔고, 나이 들어서는 그분 아들에게 쫓기다시피 달아났고, 지금은 그분 손자에게 이렇게 당하고 있구나. 그나마 지사 자리를 다른 놈에게 준 게 아니라 내 아들인 아구한테 준다고 하니,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대가 끊어지지는 않겠구나."

횡설수설하며 말하는 먼터무를 한심한 듯 보며 판차가 말했다.

"조선 왕자가 통보하고 간 그것 때문입니까? 당장 문제도 없는데 벌써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중에 상황이 달라질지 어찌 압니까?"

먼터무는 대답 대신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잔을 상 위에 턱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손끝으로 술상과 항아리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들이 다 조선의 왕자가 오늘 선물로 주고 간 거다. 술병하고 술잔은 조선의 광주부라는 곳에서 만든 것이고, 저 아르키는 이 근처 조선인 마을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취해서 동문서답이라도 하나 보다 생각하고 가만히 보는 판차의 시선을 받으며 먼터무가 말을 이었다.

"그냥 받으라고 주는 선물이 아니야. 술병과 술잔은 이런 좋은 자기를 나에게 선물로 줘도 될 만큼 조선의 국력이 강해졌고, 또 궁중에서나 쓰일 고급품을 보낼 정도로 조선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얘기다. 아르키도 마찬가지다. 농사가 힘든 이 지역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증류주를 한 항아리나 만들어서 줄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인들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지."

"그리 생각하게 하려고 자기와 아르키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야 안목 없는 제가 봐도 고급품이 확실하지만, 아르키는 다른 풍년 든 지방 곡식을 가져다가 만들어놓고 이 지역에서 만든 것이라 거짓말을 하는지 어찌 압니까?"

이미 침상에 앉은 상태로 비틀거리던 먼터무는 판차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대자로 드러누워서는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너도 지금은 아들 하나지만 아들이 하나 더 태어나면 첫째는 조선에 보내 벼슬을 시키는 게 어떻겠느냐? 훗날 여기가 조선의 회령진으로만 남을지 오돌리 부족의 오무호로도 남을지는 모르지만, 어찌되건 그때에도 우리 기오로 가문이 한자리 하고 있으려면 너하고 나하고 같이 준비를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판차는 대답 대신 침상에 다가가 술상을 치우고, 먼터무가 술김에 덥다고 벗어던졌는지 엉뚱한 곳에 떨어져 있던 겉옷을 가져다 덮어 주며 말했다.

"봄이 됐다고는 하지만 해가 지면 춥습니다. 잘 덮고 자십시오."

먼터무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코를 골며 잠들어버렸다.

그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던 판차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조용히 먼터무의 집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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