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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32화 (132/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32화

132화

그때 무언가를 떠올린 듯 최윤덕이 다시 양녕에게 물었다.

"그런데 압록강변의 중요한 보를 증축한다고 하면, 그 숫자가 많지는 않겠지만 규모는 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력이나 석재 수급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점석회를 쓰기로 했소. 삼척부 주민들을 일부 데려다가 근처에서 석회석과 점토를 찾아 구워 보게 할 것이오."

"하긴 요새를 만드는 데에 점석회만 한 것이 없지만 결국 무거운 돌가루인지라, 삼척부에서 아무리 많이 생산된다고 하더라도 육로로나 해로로 서북면까지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재료인 석회석이나 점토야 전국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니 서북면에서 바로 생산하는 게 제일이겠습니다."

"그렇소. 대신 너무 가까운 곳에서 생산하다가 기술이 유출되면 큰일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구워 낸 다음 증축하는 곳까지 운반하긴 해야 할 것이오. 짓는 동안에도 훌리가이 부족 눈에 띄지 않게 가려야 할 것이고, 짓고 난 다음에도 그냥 석성처럼 보이게 할 궁리도 해야겠지."

"쉽지 않겠군요."

"명나라나 여진족에게 기술이 넘어가는 것보다야 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참, 점석회로 성 쌓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새 교역소는 어떻게 되었소?"

"임시로 쓸 목책은 이미 다 만들었고, 바로 점석회로 읍성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말이오? 삼척부에서 점석회 생산량을 계획보다 늘려야 할 것이고, 늘린 다음에도 옮겨오는 시간과 거리가 있지 않소?"

그 말에 최윤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서북면에서 바로 점석회를 생산할 것이라고 조금 전에 대군께서 알려 주셨지만, 사실 비슷한 일이 얼마 전에 이미 동북면에서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고 오가던 삼척부 주민들이 함흥부 근처에서 좋은 석회석 산지를 찾았지요. 수운을 맡아서 하던 대마군 주민들이 돈을 보태고, 삼척부 주민들이 가마를 세워서 점석회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근처에서 무연탄이 땅 밖으로 드러난 곳도 찾아서 연료 걱정도 덜었지요. 먹골이라는 동네 이름을 듣자마자 가 보자고 하더니 찾아낸 것은 조금 놀라웠습니다."

함흥 남부에는 원래 역사에서 고원탄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무연탄 매장지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양녕에게는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삼척부에서 먹돌배기라는 이름이 붙은 지역에서 무연탄을 찾아낸 적이 있소. 그걸 떠올린 것이겠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삼척부 주민들이 점석회나 석탄에 관한 재주가 뛰어난 것 같으니, 굳이 삼척부에서 만든 점석회를 내다 팔지 않더라도 그 재주로 충분히 돈을 벌 수 있겠습니다. 소금 생산에 어려움이 많다고 대군께서 도우려 내려가셨을 때하고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로군요."

"그러게 말이오. 그나저나 벌써 읍성까지 점석회로 짓고 있을 정도면 언제까지 이름도 없이 교역소라고 부를 수는 없겠소. 혹시 도원수께서 좋은 이름 생각해 두신 게 있소?"

"딱히 없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짓는 것보다도 대군께서 지으시는 게 이름에 더 권위가 실릴 테니, 대군께서 지으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최윤덕의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하던 양녕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북방을 안녕케 하는 고을이니, 영북진이라 하는 게 어떻겠소?"

"영북진이라.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면 한동안은 영북진과 경원부가 조선의 동북방 국경이겠군요."

"한동안이라니?"

"착실하게 기반을 잡으면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채워 가면서 올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여진족 코앞인데다가 춥고 농사도 힘든 동북면에 자발적으로 오려는 백성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중죄인을 형벌 대신 가족째로 이주시키자는 얘기도 나왔다 들었습니다."

"전가입거 말이로군. 그것도 실행할 것이오. 대신 그게 주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오."

"그렇지요. 태조대왕께서 왕업을 일으키신 땅이 유배지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뭐 어느 정도 이주는 괜찮긴 할 것이오. 전가입거 된 자가 몇 있더라도 지역의 인식이 나빠지지 않게 하려고 내가 정착도감 도제조를 맡아 종친들을 이주시키는 것이고 말이오. 그리고 백성들을 채우는 것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번에 내가 데려온 이들이 아주 믿음직스러우니 말이오."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는 양녕을 본 최윤덕의 얼굴에 궁금함이 가득 찼다.

* * *

1426년 5월 중순 모일.

경원부. 영북진 교역소.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말을 살피던 신백정 사내 하나가 말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봐, 편자를 제때 안 갈아서 발굽이 상했잖수. 이런 걸 제값에 팔려고 한단 말이오?"

그 말에 말을 팔러 왔던 여진족 사내가 슬쩍 말을 살피는 척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내가 관리를 제대로 안 했거나, 병이 들어서 발굽이 약한 말이라서 그런 건 아니오. 편자를 쉽게 못 구하니까 제때 갈아 주고 싶어도 못 갈아 줘서 그런 걸 어찌하오. 아, 제법 괜찮은 말인 건 보면 알지 않소."

"편자를 구하기가 힘들면 상한 편자를 빼고 풀 엮은 신을 신겼어야지. 그게 핑계가 된다 생각하슈?"

추궁에 점점 몰린 여진족 사내가 자기도 모르게 신백정 사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요즘 농사가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었소. 발굽이 심하게 상한 건 아니라서 잘 먹이면 나을 건데 좀 봐주면 안 되겠소? 이놈 팔아서 면포까지는 못 사더라도 종자하고 농기구는 사서 가야 이번 여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단 말이오. 보시오. 이놈이 털에 금색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아무래도 호마가 섞인 것 같지 않소?"

그렇게 신백정 사내가 여진족 사내를 쩔쩔매게 만드는 광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던 양녕이 최윤덕에게 말했다.

"여진족들이 편자를 쉽게 못 구하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아바마마께서 재위하실 때 여진족들에게는 철물은 무쇠로 된 것만 팔게 하셨던 영향인가 보오."

"예. 무쇠는 달궈서 두들겨도 펴지거나 휘어지는 대신 깨져버리니, 아무리 많이 사 가더라도 무기를 만들기 어렵도록 그리하셨지요. 그런데 무쇠로 편자를 만들 수 없다고 해서 편자를 아예 안 쓰는 것도 아닌 듯하니,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편자를 구해 와서 쓰는 것 같습니다."

"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양녕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주상께 건의해서 편자는 팔 수 있게 해야겠소. 조선을 통해서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어야 다른 데서 구하려 들지 않겠지. 그러면 조선에 더 의존하게 만들 수도 있고, 다른 데서 편자를 구하다가 아예 철 수급처를 확보해 버리는 위험도 줄어들 것이오."

"예. 그리고 저들이 편자를 제때 갈아줄 수 있어야 조선에 파는 말들도 상태가 양호해지겠지요."

"그렇소. 대신 편자를 잔뜩 사 가서 다른 철물을 만들지 못하도록 파는 수량은 잘 조절해야 할 것이오."

"미곡이나 면포에 이어서 편자까지 팔게 되니, 교역 이득이 더 커지겠군요. 그나저나 정말 말 다루는 데에 뛰어난 이들입니다. 저들이 와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 며칠 사이에 목장의 말들도 관리가 훨씬 잘 되고 있고, 교역소에서도 속거나 당하는 사례가 거의 없어진 게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백성들 채우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한 것이오. 농사짓는 백성들이 많이 오지 않더라도, 신백정들이 살면서 말이나 다른 가축을 많이 키우고 가죽으로 된 물건이나 버들고리를 많이 만들어서 팔면 고을이 쇠퇴할 일은 없으니 말이오. 그리고 그렇게 고을이 번성하고 여진족들 위험이 줄어들면 이주해 오고자 하는 농민들도 늘어날 것이오."

"여진족 위험을 줄이는 것 역시 기병으로 군에 들어온 신백정 청년들이 한몫 하겠지요. 사실 신백정이라고 하면 농사지을 생각은 없이 사고만 치고 다니는 자들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봤습니다. 역시 사람은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것이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대군의 안목도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시오. 그럼 난 이만 다음 일을 하러 가봐야겠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병사들은 이미 다 준비시켜 두었습니다. 하지만 호위하는 병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놈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고맙소. 내 도원수께서 걱정하지 않게 갑옷도 철저하게 입고 다녀오겠소이다."

* * *

한참 뒤.

조선 동북면. 오무호.

저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휘장을 치고 기다리던 양녕과 마주 앉자마자 먼터무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저번보다도 사람을 더 많이 데려오셨구려. 누가 진짜로 범한테 당하기라도 했소?"

둘러친 휘장의 넓이는 저번과 비슷했지만, 먼터무의 말대로 이번에는 휘장 바깥에서 대기하는 병사들의 숫자가 더 많았고 거의 다 기병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오늘은 여기 왔다가 다시 또 갈 곳이 있어서 그렇소. 멀리 가야 하는데 병사들을 계속 걷게 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래,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오? 설마 기껏 지어놓은 교역소를 또 옮기는 것이오?"

"그건 아니오. 대신 조선 국경이 북쪽으로 옮겨지긴 할 것이오."

"빨리도 옮기시는구려. 그래, 새 국경은 어디요?"

"바로 여기, 오무호요."

태연한 양녕의 말에 먼터무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여기로 국경을 옮긴다니. 설마 오돌리 부족을 다 쫓아내기라도 하신단 말이오?"

"설마. 조선의 방패가 되어 충성을 다하고자 하고, 그 부족장의 아들이 조선의 무관으로 일하고 있는데 무슨 잘못이 있다고 오돌리 부족을 쫓아내겠소?"

"그럼 여기가 국경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요. 여기를 조선의 고을로 편입할 것이오. 실제로 조선인들이 와서 살지는 않더라도 명목상으로나마 조선의 땅이어야 오무호 북쪽으로도 국경을 더 밀어 올릴 수 있지 않겠소?"

먼터무는 여전히 긴장이 섞인 목소리로 또 질문했다.

"여기가 명목상 조선의 고을이 된다면, 오돌리 부족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어떻게도 되지 않소. 강제로 조선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조선 백성으로 받아들였다가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말이오. 그대는 그저 이전처럼 오돌리 부족을 잘 다스리면 되오."

오돌리 부족의 통제권을 조선이 가져가지 않고 여전히 부족장인 자신이 관리하게 된다는 말에 먼터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대신 두 가지만 알아두시오. 우선 이 고을의 이름이오. 조선의 고을이 되었으니 이름도 그에 어울리게 바꿔야겠지. 앞으로 부족 안에서는 몰라도 조선과 통교할 때는 그 이름을 써야 할 것이오."

"알겠소. 그래서 새 이름은 무엇이오?"

"오무호의 한자 표기(오음회)에서 마지막 글자를 따고, 가장 가까운 조선 고을인 영북진의 첫 글자를 따서 회령이라 할 것이오."

"회령이라. 발음이 쉽지 않으니 부족원들에게는 가르쳐줘도 못 쓰겠군. 알겠소. 기억해두겠소이다."

"다음은 회령진에 둘 수령에 관한 것이오."

그 말에 먼터무가 다시 당황했다.

"수령이라니? 조금 전에는 이전처럼 내가 다스리라고 하지 않았소?"

"오돌리 부족은 오돌리 부족장인 그대가 다스리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조선의 군현인 회령진은 조선의 벼슬아치가 다스리는 것이 맞지 않겠소?"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양녕의 말투에 먼터무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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