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31화
131화
"저자가 이만주라니, 예상 못했습니다. 좀 더 멧돼지처럼 생긴 놈일 줄 알았는데 길고 호리호리하니 꼭 장대 같습니다."
최만리의 작은 목소리에 양녕도 작게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저자가 정말로 이만주가 맞다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군.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해서 와 보니 부족장이 혼자 흙 둔덕 위에 올라가 있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일단 얘기는 해 보아야겠군."
그렇게 말한 양녕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조금 전 이만주에 못지않을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나는 대조선국 상왕 전하의 아들이자, 주상 전하의 형제인 양녕대군이오!"
"오! 조선의 왕자께서 직접 오시다니! 어쩐 일이오?"
대군까지는 아니더라도 못해도 부윤 이상은 되는 관리가 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부족 단위로 수상하게 움직여 놓고 어쩐 일이냐고 묻는 이만주에게 양녕이 대꾸했다.
"훌리가이 부족이 파저강은 내버려두고 압록강 근처에서 보인다길래, 내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왔소!"
"하하하하! 그것 때문에 대군께서 직접 오셨단 말이오? 이거 내가 괜한 걱정을 시켜드렸군."
이윽고 흙 둔덕에 가장 가까운 지점에 배가 멈춰 서고, 이만주와 양녕은 조금 전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볼 수 있었다. 마침 흙 둔덕의 높이와 판옥선 망루의 높이도 비슷했던 덕분에 마주보는 높이마저 비슷했다.
"조선 국경 근처에서 건주위지휘사가 이끄는 여진 부족이 돌아다닌다면 걱정을 안 하기도 어렵지 않겠소?"
양녕의 지적에도 이만주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훌리가이 부족은 원래 물하고 친하오. 배를 만드는 재주도 자신이 있지. 요동에서 지낼 때도 강을 끼고 살았고, 지금도 중간에 큰 호수가 있는 파저강을 끼고 살고 있소. 그런데 파저강에서만 고기를 잡아서는 부족하니 점점 나오게 되었다오. 파저강에서 나오면 압록강이지 않소? 내 부족원들이 조선 국경 근처라서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으러 다닌 압록강이 마침 조선 국경이었을 뿐이오."
훌리가이 부족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고, 지금 이만주가 서 있는 만포 건너편은 훌리가이 부족이 정착한 곳에서 물길로 오는 것보다 육로로 오는 것이 훨씬 가까운 곳이다.
당장 이만주부터가 배를 타고 온 것처럼 보일 생각은 조금도 없이 말만 타고 있으면서 어업 핑계를 대자 슬쩍 짜증이 난 양녕이 비꼬았다.
"그래서 지휘사께서는 배는 어디에 두고 말을 타고 여기로 오셨소? 압록강과 파저강이 만나는 곳에서 여기 만포까지 물길이 먼데, 그 물길을 말을 타고 오신 것을 보면 그 말이 물 위도 달리는 천하의 명마인가 보오."
그 비꼼에도 이만주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뭘 그리 빡빡하게 구시오. 훌리가이 부족이 물고기만 뜯어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농사도 지어서 먹고 살고 있소. 여기 만포 건너편도 터가 괜찮아서 농사를 지을만한지 부족원들이 살펴보러 다닌 것 같은데, 아직 마을을 차리기도 전에 몇 사람 돌아다닌 걸로 그리 걱정을 하시면 어찌하오?"
"굳이 걱정할 건 없긴 하지. 만포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강계부 중심고을인 강계목이 나오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홍수 위험이 있는 압록강변보다 파저강 근처가 훨씬 더 농사지을 땅이 많을 것이라는 점만 뺀다면 말이오."
이만주는 조선의 신경을 긁으려고 고의적으로 만포 건너편을 고른 것이 명확했다. 그러니 양녕이 사실을 지적해도 의도대로 된 것이 마음에 드는지 되도 않는 소리를 하며 양녕의 신경을 더 긁으려 들었다.
"우리가 어업이나 농업으로는 먹고 살기 부족해서 사냥도 많이 하고 다니오. 어차피 압록강 너머에 조선인이 안 사는 빈 땅도 많으니, 우리가 압록강변에 마을 하나 차려두고 농사를 짓다가 가끔 건너가서 사냥을 해도 괜찮지 않겠소? 모피를 구해서 조선에 팔면 조선도 이득이지 않소. 대신 강계목은 안 건드리겠소. 내 제안이 어떻소?"
그 말이 가소로웠는지 양녕이 비웃으며 말했다.
"거 괜찮군. 마침 압록강 이쪽에 병사들은 많이 주둔하고 있지만 놀 거리가 부족하오. 어차피 사내들이 고기 잡고 사냥하러 가면 훌리가이 부족 마을에 여인들만 남을 테니, 우리 병사들이 수자리 서다가 가끔 건너가서 여인들을 꼬셔서 같이 놀아도 괜찮지 않겠소? 여인들이 애를 많이 배서 부족원이 늘면 훌리가이 부족도 이득이지 않소. 대신 지휘사 부인은 안 건드리겠소. 내 제안은 어떻소?"
말이 끝나자마자 망루 아래 병사들 몇이 소리를 죽여 끅끅거리고 웃기 시작했고, 최만리마저 얼굴에 힘을 잔뜩 주어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양녕의 말을 듣고 멍하니 있던 이만주는 이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으하하하하! 조선의 대군께서 언변이 대단하시구려! 안심하시오! 나는 요동에 속한 사람이니 어찌 국경인 압록강을 내 마음대로 넘어 조선 땅으로 들어가려 하겠소? 내 부족 역시 함부로 압록강을 넘지 못할 것이고, 다만 강에서 물고기를 잡게만 할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이오. 조선인들 역시 함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오. 조선 쪽 땅에 내리지만 않으면 훌리가이 부족이 압록강에서 어업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고 괜히 접촉하지도 않을 것이니, 지휘사 역시 안심하시오"
그 말을 들은 이만주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소! 아, 여기는 며칠 전에도 강물이 넘쳤던 곳이라 농사짓기에는 부적합하고, 사냥감도 파저강 호수 근방이 더 많으니 여기에 마을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오. 부족원들도 괜히 이 근처에 돌아다니지 않게 할 테니 그 점은 마음 놓으셔도 좋을 것이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 대군께서도 살펴 가시오!"
그렇게 말한 이만주는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돌려 흙 둔덕을 뛰어 내려갔다. 그대로 산길을 따라 말을 달린 이만주의 모습이 사라지자, 양녕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최만리에게 말했다.
"다행히 기습은 없었군. 혼자서만 나와 있던 건 조선이 군사를 움직일 빌미를 주지 않으려던 것이겠고, 이만주라고 밝히면 조선에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도 있었던 것뿐인 듯하네."
"예. 그런데 결국 여기에 마을을 만들 생각도 없고, 압록강을 건널 생각도 없었다면 대체 왜 부족 단위로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던 걸까요?"
"대충 짐작 가는 것은 있네. 저자가 맨 처음 자신을 소개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 누구의 아들이다 하는 것 말입니까?"
"그렇네. 저자의 아비는 시기야누고, 할아비는 아하추일세. 그런데 꼭 유목민들처럼 아비와 할아비의 이름으로 자기를 소개하면서도 여진족 이름 대신 각각 이현충과 이사성이라는 명나라 이름을 댔어."
"파저강 일대로 피신하긴 했지만 여전히 명나라와 연줄이 있다는 걸 과시하는 것이겠군요. 아니면 이번 일 자체가 명나라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 생각을 했네. 먼터무와 오돌리 부족은 조선 손에 넘겨줬지만, 이만주와 훌리가이 부족은 여전히 명나라에 속해 있다. 약조를 다시 확인해 준 대로 두만강 일대는 조선이 관리하지만, 혹시라도 압록강 일대까지 영향력을 끼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을 조선에 은근히 전달해라. 뭐 그런 지시가 명나라 조정에서 요동도사를 거쳐서 이만주에게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야."
"이만주는 고모가 황후고 고모부가 영락제일 정도로 명나라와 연이 깊으니까요.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반대로, 이번 일이 명나라나 요동도사의 의중하고 상관없이 이만주가 멋대로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
그때 다시 압록강 하류의 의주목으로 돌아가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바닥에 앉으며 최만리가 물었다.
"독단적으로 이렇게 명나라의 권세를 업고 조선의 심기를 건드려서 이득이 있습니까?"
기본적으로는 이만주가 파저강 이주 이후 조선과 명나라 어느 쪽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않으면서 양쪽을 다 들쑤시고 다녔던 원래 역사에서의 행적에 기초한 추측이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무호로 돌아온 오돌리 부족은 세력이 크게 강하지 않고, 가까운 곳에 조선의 군사가 있네. 명나라의 눈에서 멀어지면 의지할 곳이 마땅히 없어.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하거나, 아예 조선 밑으로 들어오는 게 살아남는 방법이지."
"예. 그래서 대군께서 엄포를 놓아 후자를 선택하게끔 압박하셨지요."
"그런데 파저강으로 온 훌리가이 부족은 달라. 규모 자체가 오돌리 부족의 두 배에 가깝고, 여진족들 사이에서 위신도 대단하지. 명나라에서 멀어지더라도 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어."
약간 감이 잡혔는지 최만리가 말했다.
"게다가 조선의 군사를 두려워할 일도 없지요."
"그렇지. 파저강은 오무호와 달리 조선에서는 강을 건너가야 닿을 수 있어서 군사를 보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애초에 명나라가 압록강 일대 여진족을 관리하겠다고 한 상황에 압록강 근처에서 군사행동 자체를 할 수가 없어."
양녕은 난간 밖으로 고개를 돌려, 요동 쪽 시야를 가득 채운 숲과 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만주가 말했듯 훌리가이 부족은 농업, 어업, 수렵, 기마에 두루 능하네. 지금 자리를 잡은 파저강 일대는 그 모든 것에 다 적합한 땅이지. 이미 명나라의 관심이 멀어진 상태에서, 명나라가 뒤에 있는 것처럼 굴어서 조선도 압록강 너머를 잘 건드리지 않게 만들면, 명나라와 조선, 어느 쪽의 눈치도 보지 않고 훌리가이 부족의 세력을 키울 수 있네."
여진족이 세력을 키울 수 있다는 그 말에 최만리가 몸서리쳤다.
"무시무시한 일이로군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야. 괜한 짓을 하다가 명나라에 들킨다면 기껏 대를 이어 쌓아온 연줄이 날아가는 건 물론이고, 명나라나 조선이 보낸 군사에게 토벌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걸세. 알아서 몸을 사리겠지."
잠시 말을 멈추었던 양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벌 당할 걱정이 있는 동안에는 말이야."
* * *
1426년 5월 초순 모일.
경원부 관아.
경원부가 구색만 갖추기 위한 군현이 아니라 실제로 국경을 회복하기 위한 최전방이 되면서, 한때는 길주부윤이 겸직하던 경원부윤을 회경군 도원수인 최윤덕이 겸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압록강 일대도 안심할 수 없겠군요.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만포 일대에서 이만주와 있던 일을 듣던 최윤덕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했다.
"당장은 이만주가 별다른 돌발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으니 병력은 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소. 애초에 명나라 눈치가 보이는 지역이라 병력을 많이 보내기 힘든 지역이기도 하고 말이오. 대신 우선 인력을 대대적으로 보내서 압록강에 면한 중요한 보(군사 주둔지)를 읍성으로 증축하고 군을 설치한 다음, 많지는 않더라도 병사들을 주둔시키기로 했소."
"병사들이 주둔하는데 진이 아니고 군이 설치된단 말입니까?"
"군사 목적 군현인 진을 설치하면 명나라가 의심할 수 있지 않겠소. 그러니 일반 군현인 군으로 설치해 놓되 병사들을 주둔시키는 것이오."
"아, 실제로는 진이지만 명나라가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을 막고자 이름만 군으로 한 것이군요."
"그런 셈이오. 아바마마께서 재위 중이실 때 여연촌을 여연진이 아니라 여연군으로 승격시키신 것도 그 때문이었소."
"서북면에는 군, 동북면에는 진이 설치되어 가면서 국경을 회복하겠군요. 이제 정말로 북방개척의 시작이라는 실감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