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29화
129화
조금 전 무타우타와 맞닥뜨린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최만리의 말에 양녕도 동의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무타우타가 부족을 이끌고 정착한 옛 경원 땅에서나, 먼터무의 오돌리 부족이 있는 오무호에서나 경성군 방향으로 오다보면 청진포에서 길이 합쳐지니, 청진포에 교역소를 두어도 아무 문제없고 오히려 편하기까지 했지. 길 중간에 이 경원부가 있긴 했지만, 사실 구색만 갖추려고 지어 놓은 것이라 노출되어도 상관없는 시설이었고 말이야."
"하지만 이제는 경원부가 중요한 시설이 되었으니, 무타우타가 거래하러 오가며 계속 보는 건 좋지 않겠지요. 그래도 좀 전에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저 무타우타라는 자는 교화하고는 거리가 먼 아둔한 야인이라, 경원부에 읍성을 두르는 걸 보고도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나도 무타우타는 저번에 먼터무를 따라왔을 때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그때도 빈말로도 영리해 보인다고 할 놈은 아니었네. 하지만 오히려 짐승 같은 자여서 감이 날카로울 수도 있고, 아둔한 자라도 같은 것을 여러 번 보면 깨닫는 바가 있을 수 있네."
"둘 다 아니더라도 동행한 놈들 중에 똑똑한 놈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마저 아니더라도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자기 부족에 전달하거나, 그게 다른 부족이나 명나라에까지 퍼진다면 절대로 좋은 일은 아니겠습니다."
"그렇지. 자네 말대로 지금 한 번 본 것으로는 느낀 게 없어 보이니 일단 시간은 번 셈이지만, 대책을 빨리 마련해야겠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차피 가야 했을 곳이 있네. 거기 가서 하려던 일에 한 가지만 더 추가하면 될 게야."
* * *
1426년 3월 하순 모일.
조선 동북면. 오무호.
그길로 청진포를 거쳐 아예 길주목 관아까지 돌아간 양녕은 길주부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갑옷을 챙겨 입고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대로 청진포 근처로 돌아가 기다리던 양녕은, 무타우타가 다시 옛 경원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무호, 정확히는 먼터무에게로 향했다.
"사람을 엄청 많이도 데려오셨구려."
그렇게 말한 먼터무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양녕이 데려온 병사들은 오무호에 도착하자마자 공터에 휘장을 둘러 넓은 공간을 만들고, 양녕이 만나러 와서 기다린다며 먼터무를 불렀다. 먼터무가 들어왔을 때 휘장 안에서 기다리던 것은 이미 면식이 있는 양녕과 최만리, 그리고 호위병 몇뿐이었지만, 휘장 바깥에는 상당한 숫자의 조선군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외진 산길을 멀리 와야 하니 범이나 도적에 대비해서 많이 데리고 왔소. 대신 짐이 많아져서 천막 말고 휘장으로 가져왔소."
양녕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휘장의 양녕 쪽 입구 너머로 보이는 기병들의 무장 상태는 절대로 범이나 도적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없는 중무장이었다.
'병력 규모도 그렇고 일부러 자기 쪽 입구를 열어 기병들이 보이게 한 것도 그렇고, 누가 봐도 위압감을 주려고 데려온 것이겠지. 천막이 아니라 휘장을 두른 것도 어차하면 기병이 말을 탄 상태로 뛰어 들어오기 좋은 조건을 만들어 나를 압박하려는 것일 게고.'
어차피 반박하거나 대응하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었던지라, 먼터무는 작게 한숨을 쉬고 양녕에게 말했다.
"범이 아니라 산신이 덤벼도 못 이기겠소. 그래서 대군께서 여기는 어떤 일로 오셨소?"
"몇 가지 말할 게 있어서 왔소."
"무엇이오?"
"교역소를 좀 더 북쪽으로 옮기려고 하오."
"북쪽으로? 오무호에 가까워지면 나야 좋소만, 정확히 어디요?"
"청진포하고 여기 사이에 있는 석막이라는 지역이오. 석막 북부 산길 중간에 제법 넓은 평지가 있더군."
"아, 거기 말이오? 교역소가 들어설 만큼 공간도 넓고, 사방으로 길도 나서 오가기도 좋지."
양녕의 말에 대답하던 먼터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양녕이 말한 석막 북부 평지는 청진포와 오무호의 거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다. 그리고 여진족의 주 교역품은 말이고, 조선의 주 교역품은 소금과 미곡, 면포다.
말은 스스로 걸어 다니니 몰고만 가면 되는데도 교역하러 가는 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고, 사람이나 짐승이 옮겨야 하는 조선의 교역품은 없던 운반 거리가 생긴 것이다.
'청진포가 번성해지면서 우리 여진족이 고을에 드나드는 것이 꺼려지는 것이라면, 석막 북부까지 올 것 없이 그냥 석막이라고만 불리는 남부 지역으로 옮겼을 것이다. 거긴 청진포 바로 위에 붙어있을 뿐만 아니라, 평지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산이 좁아지니 방어에도 좋지. 하지만 거기를 두고 더 먼 거리를, 그것도 비탈길을 올라와야 하는 석막 북부로 교역소를 옮긴다면 우리만 유리해질 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이지?"
먼터무의 의심스러운 표정을 눈치 챈 양녕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좀 오가기 힘들어지기는 하지만 다 이유가 있소. 소식을 이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나라 황제폐하께서 두만강 일대 여진족들은 조선에서 관리하라는 이전 약조를 다시금 확인해주셨소. 조선의 국력도 회복되었으니 한때 뒤로 물렸던 국경을 다시 원래대로 북쪽으로 옮길 것이오."
그 말에 먼터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옛 경원부를 약탈한 게 조선이 국경을 물렸던 이유였으니 할 말이 없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명나라가 조선에게 두만강 일대 여진족들을 관리하라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양녕은 그런 먼터무의 표정 변화는 신경 쓰지도 않고 할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한 번에 되돌리기는 어려우니 여러 번에 걸쳐서 회복해 갈 것이오. 그렇게 처음으로 북쪽으로 밀어올린 국경이 바로 석막 북부요. 교역소란 본디 국경에 두는 것이니 당연히 거기 따라가는 것이고 말이오."
석막 북부로 교역소를 옮기면 무타우타가 교역하러 가면서 새로 읍성을 쌓는 중인 경원부를 지나가지 않게 된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말하면 괜한 경계를 살 수 있어서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알겠소. 그럼 난 뭘 하면 되겠소?"
"다음 교역부터 바로 석막 북부에서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오돌리 부족원들은 물론이고 무타우타에게도 알리시오. 교역소를 만들면서 바로 성벽까지 쌓을 여유가 없으니 우선 목책만 두를 것이고, 대신 병사들을 두어 지킬 것이니 교역하러 와서 놀라지 말라는 것도 전하시오. 나머지는 조선에서 알아서 할 것이니 신경쓰지 않아도 좋소."
통보를 넘어서 지시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먼터무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겠소. 그리하겠소."
"좋소. 뭐 더 궁금한 게 있소?"
"궁금한 것은 아니고, 부탁드릴 것이 있소이다."
"부탁? 무엇이오?"
"내 맏아들로 아구라는 아이가 있소. 그 아이를 한성부에 보내 주상전하를 위해 일하게 하고 싶소."
예상 밖의 부탁에 양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하는 것을 보니 지금 막 정한 것 같은데, 이리 갑자기 아들을 한성부에 보낸단 말이오?"
양녕의 물음에 먼터무는 덤덤한 표정으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내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차피 대군께서도 다 아실 테니 솔직히 말하리다. 내가 여기로 돌아왔던 것은 전 황제폐하의 도움이 컸소. 서신을 보내주신 덕분에 나뿐만 아니라 오돌리 부족 전체가 무사히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
묵묵히 듣는 양녕을 향해 먼터무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새 황제폐하께서 즉위하시고 나서도 내가 가진 건주좌위지휘사의 자리는 그대로였소. 그래서 나도 작으나마 언젠가 다시 요동으로 돌아갈 기대를 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 대군께서 말하시길 새 황제폐하께서 두만강 인근 여진족 모두를 조선이 관리하라 하셨다 하니, 그 기대도 더는 부질없는 것이 되었소."
"그것과 아들을 보내는 게 관련이 있소?"
"이제 명나라가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 살길을 찾으려면 조선 편으로 확실히 들어가야 할 것이오. 그런데 나는 능묘가 있는 곳을 약탈해 국경도 뒤로 물리게 만들었고, 명나라의 관직을 받고 권세를 부리다가 종당에는 요동으로 떠나기까지 했소. 이런 놈을 조선에서 뭘 믿고 받아 주겠소? 그래서 맏아들을 볼모로 보내는 것이오."
숨기는 것이 없다는 듯 분위기를 잡고서 맏아들을 보내겠다고 비장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여진족들에게 장남은 상속 대상이 아니라 분가 대상이라는 것을 아는 양녕에게는 뻔히 보이는 수였다.
'장남은 분가해서 벼슬을 얻으러 조선에 갔고, 먼터무의 자리는 막내가 상속받을 것이라고 하면 여진족들 사이에서 아무런 위신 문제도 없겠지. 그러면서도 조선에는 상속자를 볼모로 보낸 것처럼 하고 믿어 달라 할 수 있으니 제법 괜찮은 수로군. 뻔히 아는 내 눈에는 가소롭지만 일단은 속아주도록 할까.'
"괜찮은 생각이오. 판단이 빠르시구려. 그럼 아들은 언제 보낼 것이오?"
"기왕이면 대군과 함께 가면 좋겠는데, 대군께서는 언제 한성부로 돌아가시오?"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금방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오."
"다행이오. 그러면 며칠 뒤에 내가 말을 팔러 교역소에 가면서 직접 데려가겠소. 그때 보내도 되겠소?"
"그리하시오. 어차피 한성부에 갈 사람이니 조선 땅에서 며칠 머무른다고 문제될 것도 없소."
"고맙소."
그렇게 말한 먼터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교역소에서 만난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군께서 멀리 오무호까지 손님으로 오셨는데 빈손으로 보내드리는 것도 좀 그렇소. 우리가 야인들이라 변변찮은 것은 없지만, 혹시 갖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면 뭐라도 드리겠소."
속이 뻔히 보이는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고 말했다.
"그저 앞으로도 좋은 호마 구해오는 것에나 집중해 주시고, 모피나 해동청 공급이 끊이지만 않게 해 주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오. 그리고 나에게 굳이 선물을 주지 않더라도, 그대 아들을 데려가서 조정에 잘 말해 볼 테니 걱정 마시오."
양녕의 말에 먼터무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소."
"그럼 정말로 용건은 다 끝났을 것이니, 오늘은 이만 가보겠소."
그렇게 말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양녕은 뒤로 돌아서 휘장 입구로 몇 걸음 가다 멈춰서더니, 다시 뒤를 돌아 먼터무를 보았다. 양녕이 휘장을 나간 다음 일어나려고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던 먼터무를 내려다보면서, 양녕은 어딘가 중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몰라서 말해 두고 가겠소. 내가 그대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려고 하는 것은, 한때 그대가 조선을 등지고 명나라로 갔었다고는 하나 다시 돌아와 조선의 방패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오."
갑옷 차림으로 내려다보는 양녕에게서 이성계의 모습을 겹쳐 본 것인지 눈빛이 떨리기 시작한 먼터무에게, 양녕은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목숨을 더 안전히 부지하겠다는 욕심에 두 밧줄을 잡으려고 한다면, 글자 하나를 더하려다 가장 귀한 것을 잃게 될 것이오. 이것만은 절대로 잊지 말고 명심해 두시오."
말을 마친 양녕은 다시 몸을 돌려 휘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조선과 명나라에 동시에 줄을 대려고 하지 마라, 만일 명나라에서 관직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하다가는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런 엄포로군. 나도 막연히만 생각하던 것을 어떻게 꿰뚫어 보았단 말인가. 저 양녕대군이라는 자가 실로 무서운 이로다.'
그런 생각을 한 먼터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을 하느라 한동안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