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28화
128화
"그럼 다 못 가는 것입니까?"
사내의 반응과 웅성거림의 이유를 알아챈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다 못 가게 제한한다는 말이 아니라, 다 안 가도 된다는 말이다."
"안 가다니요?"
"신백정인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목축을 선호하니 수가 많지는 않겠지만 농사가 적성에 맞는 이들도 있겠지. 무재가 있어서 군인을 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고, 공부머리가 있어 과거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야. 이도저도 아니고 다른 신백정들처럼 말 타고 도축하고 공예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동북면으로 가는 건 싫은 이들도 있겠지. 그런 이들까지 다 끌고 갈 수는 없지 않느냐."
가만히 듣고 있던 사내가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말했다.
"그것은 그렇지요. 하기야 지금 나라님이 천민에서 풀어 주시고 군인 될 길을 열어 주신 뒤로, 집집마다 말 좀 타고 활 좀 쏜다 하는 애들은 다 군교로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니까요."
"그래.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남아야지. 사실 너희가 지금 숫자가 많으니 천대도 받는 것이지, 많이들 동북면으로 떠나고 나서 신백정 숫자가 줄어들면 고기건 가죽이건 버들고리건 구하기가 이전보다 조금씩은 더 어려워질 테니, 남은 사람들이 받는 대접도 좀 나아지리라 기대해도 좋을 것이야."
사내는 물론이고 다른 신백정들도 조금씩 설득되는 분위기인 것을 보고 양녕이 다음 회유책을 꺼냈다.
"그리고 너희에게는 동북면으로 가는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주고, 거기에 다른 특혜까지 얹어서 주마."
"무엇입니까?"
"얼마 전 제도가 달라져 군교가 되는 문턱이 약간이나마 낮아졌다. 그리고 동북면에는 여진족을 상대할 기병이 필요하지. 신백정으로 동북면에 가는 이들 중에서 말 타고 활 쏘는 재주가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이라면 간단한 시험 정도만 거치면 어렵지 않게 군교가 될 수 있을 것이야."
"정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동북면에 장인들이 적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너희가 거기서 만드는 갖신이나 버들고리처럼 군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은 나라에서 우선해서 사줄 것이다. 가죽으로 갑옷을 만든다면 두말할 것도 없지. 더해서 여기 남는 신백정이라도 가족이 동북면에 갔다면 같은 성씨를 받게 될 것이다. 한 식구이니 당연한 일이지. 만일 그렇게 남은 신백정이 공부에 뜻이 있다면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정 도움 받을 곳이 없다면 내가 지원해 주마."
가려운 곳을 긁듯 걱정은 덜어주고 원하는 것은 제공해 주는 양녕의 절묘한 제안에 사내의 눈이 빛났다.
"동북면에는 언제 갈 수 있습니까?"
기대감에 가득 찬 그 말에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지간히도 가고 싶은가 보구나. 나라에서 하는 준비가 끝나는 대로 갈 것이야. 그동안 신백정들 사이에서 가고자 하는 이들을 받아 명단도 작성하고, 너희가 해 두어야 할 다른 준비들도 마쳐 놓아야겠지. 이것은 나라에서 해 주거나 어찌하라고 지시를 할 것이니 안심하거라."
"감사합니다, 대군마님."
"대신 너희가 해 줘야 할 게 있다."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사내가 양녕의 그 말에 딱 멈추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소문을 내라. 나라에서 신백정들을 동북면에서 중히 쓰려고 데려간다는 것. 가는 신백정들은 여러 혜택을 받는다는 것. 이런 걸 사방에 자랑하고 다녀라. 다른 고을 사는 신백정들 귀에도 들어가고, 심지어 소문을 들은 농민들마저도 동북면에 가면 사는 게 더 나아지지 않을까 혹할 만큼."
* * *
1426년 3월 하순 모일.
길주부 경성군 북부. 청진포.
여진족들과 거래하는 교역소가 있던 작은 어촌은 거래 규모가 커지고 항구가 들어서면서 제법 큰 마을이 되었고, 청암산 아래 나루터라 해서 청진포라는 이름도 새롭게 붙었다. 아침 일찍 청진포에 도착한 양녕은 이전처럼 교역소에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돌리 부족이 사는 오무호로 이어지는 청진포 북쪽 산길로 가는 것도 아니고, 동북쪽으로 난 좁은 산길을 따라서 가고 있었다.
"청진포에서 50리는 족히 온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가야 됩니까?"
말을 타고 가면서도 이동거리에 지친 최만리의 질문에 군교 하나가 대신 대답했다.
"조금 전에 오른편에 바다가 한 번 보였다가 다시 산길로 들어왔으니 절반쯤 온 것입니다."
최만리에게 대답한 군교는 다시 다른 호위 병력처럼 말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진족들과 가까운 땅일 뿐만 아니라, 날이 밝고 사람이 많이 몰려다닌다고는 하지만 범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탓이었다.
"반은 왔다니 다행입니다."
"그렇네. 나도 육로로는 처음 가보는 것인데, 조금 전 청진포에서 해로로 가면 목적지까지 조금 더 빨리 갈 수는 있네."
그 말에 설마 자기가 멀미해서 육로로 가는 것인가 하는 표정을 짓는 최만리에게 양녕이 이어서 말했다.
"자네가 여기 도착한 첫 날부터 뻗어 버리면 안 될뿐더러, 나도 육로로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파악해 두어야 계획을 짤 수 있네. 말이며 군대며 백성이며 모든 것을 배로만 실어다 나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말에 최만리가 안심했다.
다시 말 없이 일행이 산길을 한참 나아가자 산길이 끝나고 평지가 나타났다.
그 평지를 또 잠시 나아가자, 저 앞에 병사들이 점석회로 성벽을 쌓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보이는군. 저게 우리 목적지일세."
"작은 요새 같군요. 저기가 어디입니까?"
"경원부일세."
양녕의 대답에 최만리가 놀라서 물었다.
"저 작은 읍성이 경원부란 말입니까?"
"그렇네. 예전에 경원부를 비롯해서 동북면에 있던 고을들을 뒤로 물린 건 알고 있나?"
"얼추 알긴 하지만 자세히는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을 따라서 더 쭉 가면 산으로 둘러싸인 두만강변의 요충지가 있네. 거기가 원래 경원부가 있던 자리지. 그런데 먼터무가 경원부를 약탈하고 방어가 어려워졌을 때 아바마마께서 경원부와 주변 마을 백성들을 모두 경성군으로 이주하게 하고, 경원부도 경성군에 합치면서 잠시 사라졌었네."
"경원부가 없어졌던 적이 있군요."
"그래. 그런데 아무래도 조선 최북단에 있던 고을이자, 왕실의 발상지라는 상징적이고 중요한 곳이 경원일세. 그런 만큼 그렇게 있을 수는 없지. 그래서 경성군 북부를 조금 떼어서 경원부를 다시 설치했네."
"그래서 저 작은 읍성이 경원부가 된 것이로군요."
"그렇네. 사실 제대로 된 읍성도 아니야. 여기가 옛 경원부로 가는 길목이라고 했지? 원래 그 길목에 있던 부가참이라는 역참이었네."
"역참을 읍성으로 삼아야 할 정도였단 말입니까?"
"경원부라는 고을을 이름만이라도 유지하는 게 목적이었고, 새로 뭘 거창하게 쌓고 만들 여유도 없던 때였네. 그래서 급한 대로 목책만 둘러서 방어했던 것을 지금 제대로 성을 쌓고 있는 것이지."
양녕의 설명에 끄덕이던 최만리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옛 역참이 있던 자리라고는 하지만 지세가 너무 좁은 곳에 있지 않습니까?"
"소수 병력으로 방어하기에는 차라리 이게 낫네. 칠주도에서도 이런 곳을 요충지 삼아 왜인들이 요새를 짓고 버티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은 길 따라 바로 와서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 동남쪽에 넓은 모래벌이 있고 그 앞바다는 만일세."
"항구로 쓰기 좋은 지형이로군요."
"그렇네. 옛 경원부처럼 이 경원부 역시 최전방에 만들어져 있네. 그리고 이 작은 역참 하나만을 가지고도 부라고 칭하고, 새롭게 바뀐 군현의 제도도 적용되지 않았지. 이것은 경원부가 계속 여기 머무를 것이 아니라,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아바마마의 의지였네."
"이제 알겠습니다. 여기를 기점으로 삼으시려는 것이었군요. 작은 역참이지만 요새 역할을 할 수 있고, 육로를 거치지 않아도 배로 물자를 옮겨올 수 있습니다. 이제 읍성과 항구를 고쳐 짓고 준비를 해서 다시 옛 땅으로 밀고 올라갈 좋은 기점이 되었으니, 상왕 전하의 앞날을 대비하시는 안목이 실로 탁월하십니다."
"대단하신 분이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경원부 읍성에 거의 다 도착해 가는데, 읍성을 기준으로 양녕이 온 길과 반대쪽으로 이어진 산길에서 사내 몇이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양녕이 말없이 전진 속도를 줄였다. 이윽고 읍성을 지나쳐서 바로 앞까지 온 사내들 중 가장 앞에 있던 사내에게 양녕이 말했다.
"오랜만이오, 무타우타."
그제야 양녕을 알아본 무타우타가 말에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반가운 얼굴로 양녕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양녕대군 왕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그대가 여기는 어쩐 일이오?"
양녕의 물음에 무타우타가 자기 일행을 따라오던, 사람이 타지 않은 말들을 가리키며 해맑게 말했다.
"말을 팔러 가고 있었지요. 교역소 가는 길이 여기니까요. 근데 왕자님이야말로 어쩐 일이십니까? 먼터무 형님 보러 가시는 거면 오무호 쪽 산길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쪽에 좀 살펴볼 것이 있어서 왔소."
"아! 성 쌓는 걸 보러 오셨나봅니다! 저도 지금 보고 엄청 신기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책만 둘러져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벌써 저만큼 성벽이 생겼지 뭡니까? 교역소 만드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저리 금방금방 돌을 구해다가 성을 쌓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인들 재주가 정말 대단합니다. 으허허허!"
실없이 웃는 무타우타에게 양녕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대들 말 타는 재주만큼 대단하겠소. 그래서, 팔러 가는 말들은 좀 어떻소?"
"그리 좋은 말은 아닙니다. 두만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오건, 땅으로 말을 달려서 오건 간에 다른 여진족들이 두만강 하류로 오면 가장 먼저 닿는 동네가 먼터무 형님 사는 오무호입니다, 형님이 유명하시기도 하고 오무호가 규모도 더 크니 보통 거기서들 교역을 하고 돌아가지, 굳이 창해쪽으로 더 들어와서 저희 사는 경원까지 오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그러니 좋은 말이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소금이랑 면포가 필요해져서 좀 괜찮다 싶은 말들 몇 마리를 추려서 가는 중이었지요."
"이런,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데 내가 방해했나 보군."
"하하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번에 먼터무 형님이랑 같이 한 번 뵌 게 전부였는데 저를 기억해 주셔서 기쁘고, 보통은 가셔도 오무호로만 가실 텐데 오늘따라 마침 이쪽으로 오시고, 저도 마침 말 팔러 가는 길이라 왕자님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더 기쁩니다. 이런 기회 아니면 제가 언제 왕자님을 뵙겠습니까. 요즘 사고 안 치고 살았더니 문수보살께서 가피를 내리시나봅니다. 하하하하하!"
계속 말을 시키면 대화가 끝나지 않겠다 생각한 양녕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소. 난 그럼 이만 성벽을 살펴보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먼저 가 보겠소. 그대도 살펴가고 거래 잘하길 바라오."
"예! 감사합니다, 왕자님!"
그렇게 말한 무타우타는 다시 타고 왔던 말에 훌쩍 올라탄 다음 일행과 말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굽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경원부 읍성으로 이동하면서 최만리가 조용히 말했다.
"저자가 옛 경원 땅에 자리 잡은 무타우타로군요. 듣기만 했지 본 것은 처음입니다. 전 맨 처음에 대군께서 왜 속도를 줄이시나 했습니다."
"그 속도 그래도 갔으면 읍성 앞에서 마주치게 될 판이었으니까. 여진족 눈에 점석회로 성벽 쌓는 모습이 가까이서 보이는 상황도 좋지 않고, 앞에는 우리가, 뒤에는 읍성이 있는 상황을 만들면 혹시라도 돌발행동 할 가능성도 줄어들지 않겠나."
"그렇지요. 그나저나 진출할 준비를 하는 것은 좋은데 제법 큰 문제가 있군요. 모를 뻔했는데 오늘 무타우타가 갑자기 나타나준 것이 차라리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