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27화
127화
"계산이 다 끝났다니, 생산량을 다 따지고 그걸 명나라, 일본, 조선 내부에 여진족한테까지 어떻게 배분할지 계산이 다 끝났다는 말인가?"
"맞네. 그런데 왜 그러는가?"
오히려 왜 그러냐는 듯 묻는 정인지의 말에 최만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사람은 아니니 진짜로 다 계산이 끝난 것은 맞을 텐데……. 대체 무슨 계산법을 썼는가? 그리고 옮겨 적는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별로 대단한 계산법은 아니고, 그냥 머릿속에 산가지를 놓는 걸세. 종이를 한 장씩 보면서 방직감과 다른 고을에서 생산되는 면포 양을 생산지별로 줄을 달리해서 산가지를 놓고, 명나라가 요청한 양, 이전에 여진족들과 교역했던 양, 조선 백성들이 썼던 양, 오우치 가문에서 필요로 할 것 같은 양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로 쭉 정리하네. 그다음 한 번에 계산하면 돼. 그리고 계산 끝난 머릿속 산가지를 종이에 써서 옮기는 것이지. 결과만 옮겨도 되긴 하는데, 이전에 그랬더니 못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번에는 중간 과정도 어느 정도 옮겨 적을까 하네."
자랑하려는 것이 아닌, 정말로 차분하게 자신의 계산법을 설명해 주는 정인지를 귀가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보던 최만리가 이번에는 양녕을 보았다.
"성균관에서 같이 연구하던 저도 몰랐는데, 대체 이 친구가 산술에 재주가 있는지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다 아는 방법이 있지."
흥미로움과 여유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양녕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다가와서, 정인지가 다 마신 찻잔을 직접 옆으로 치워주고 말했다.
"면포는 방직감에 이미 생산 체계가 잘 잡혀있고, 워낙 급한 사안인 만큼 정리된 자료도 치밀한 편이어서 계산하기도 좋고 빨랐을 걸세. 하지만 풍흉이 하늘에 달린 미곡 농사나, 아직 목장도 다 지어지지 않은 곳이 많은 말 사육은 계산도 어렵고 중간에 상황이나 숫자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야. 하지만 자네가 이리 잘하는 것을 보니 그리되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아 안심이군."
양녕의 말에 정인지가 해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주상전하와 대군께서 나라를 위해 하시는 일을 돕기 위해 노력할 테니 맡겨만 주십시오."
"알겠네. 그럼 아직 다른 관원들이 등청하기 전이니, 그동안 선반에 있는 자료들을 다른 사람들도 보기 좋게 정리해 놓아만 주게. 자네야 읽으면서 순식간에 계산이 끝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는 양녕에게 최만리가 말했다.
"예, 대군. 정 직전이 계산하고 제가 정리하면 다른 사람들도 보기 좋겠지요. 그런데 어디 또 가십니까?"
"척박하고 위험한 곳에 가고 싶어 안달 난 백성들을 모집하러 가네."
* * *
성저십리 모처.
신백정촌.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백정이란 평민을 칭하는 말이었고, 도축이나 가죽일 등에 종사하던 천민층은 재인 또는 화척이라 불렀다.
이도 재위기에 들어 그들을 평민에 편입시키고자 새로 백정이 된 이들이라 하여 신백정이라 부르며 정착시키려 했으나, 농업보다 목축과 공업에 익숙한 이들인지라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한성부 안에서 대놓고 소를 잡아 고기를 팔다가 걸려 도성 밖으로 쫓겨났고, 그렇게 형성된 것이 이 신백정촌이었다.
쫓겨난 이들의 마을이니, 호위병인 반당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당당하게 들어서는 양녕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너희를 어떻게 하려고 온 관리가 아니라, 주상전하의 형제인 양녕대군이다. 너희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내게 겁을 먹을 것도 없다."
그 말에 다른 방향으로 어수선해진 마을 어귀에서, 말 위에 올라탄 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양녕이 이어서 말했다.
"이 마을에서 너희가 믿고 따르는 사람들하고 얘기할 게 있다. 그들을 데려오거라."
잠시 뒤, 신백정촌에서 가장 큰 집 마당의 평상 위에 양녕이 앉고, 마을 노인이나 유력자들은 바닥에 거적을 깔고 앉아있었다.
"다 왔나보군. 바닥이 불편하지는 않느냐."
양녕의 질문에 양녕만큼이나 체격이 큰 장년의 사내가 대답했다.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대군마님께서 이런 마을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다."
"무엇입니까?"
"나라에서 몇 년 전에 천민 취급 받던 너희를 정착시키려고 했다. 칭호도 다른 백성들과 같게 백정이라 하고, 버려지고 묵은 땅을 주어 농사도 지을 수 있게 했지. 말총이나 뿔, 버들고리로 만든 물건을 파는 것도 제한하지 않았고, 무재가 있으면 군인으로도 삼았다. 하지만 결국 적응 못 하고 사고를 치다가 여기까지 쫓겨난 것이 맞느냐?"
사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하하하,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니 위축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거라. 너희가 힘들어하는 점이 무엇인지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 말에 사내가 조심스럽게 양녕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가축은 목초지에 두면 풀을 뜯어먹고, 뿔은 깎으면 깎이고, 버드나무 가지는 휘면 휘어져서 바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농작물이라는 것들은 우는 소리도 안 내고, 움직이지도 않고, 땅에서 거름기를 빨아먹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자라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당최 눈으로 보아서는 별 티가 나지를 않으니, 저희 같은 놈들 성미에는 맞지가 않습니다."
"그야 그렇지. 작물이 그리 쑥쑥 자라면 흉년 걱정하는 농부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가축은 풀어놓고 키우다가 풀들이 말라 죽거나 초지가 척박해지면 다른 곳으로 옮겨서 키우면 그만이지만, 땅에 박혀서 자라는 농작물들은 비가 조금만 많거나 적게 오더라도 꼼짝없이 시들거나 썩어 버립니다. 일 년을 걸고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도박이지요."
사내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농사와는 거리가 멀고 잘 맞지도 않는 너희를 농민들과 섞여 살게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겠구나."
원래 역사에서도 평민들은 신백정들을 거부했다. 새롭게 같은 백정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거부했고, 나라에서 붙인 신백정이라는 이름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대신 자신들을 백정이라고 칭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백정이라는 말은 신백정들을 이전에 가리키던 재인, 화척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 채로 21세기까지 이어져 버렸다.
"너희가 그러면 가죽이나 버들공예에도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아무나 빨리 가져와서 보여 드려라!"
사내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사내아이 하나가 후다닥 달려가 큼직한 바구니를 가져와 양녕이 앉은 평상에 놓았다. 버드나무 가지를 짜서 만든 상자인 버들고리였다.
양녕이 버들고리 뚜껑을 열자 갖신이 몇 켤레 들어 있었다. 버들고리와 갖신을 가만히 살피던 양녕이 말했다.
"과연 정말로 잘 만드는구나."
양녕의 칭찬에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해진 사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저희가 사고를 치고 다녀서 그렇지, 농사짓는 이들도 수시로 와서 버들고리를 사 갑니다. 말에 싣고 다니기 좋은 거야 그 사람들한테 상관없는 장점이지만, 바람이 잘 통하니 옷이 쉽게 상하지 않고, 쌓아서 보관하기도 좋으니까요."
"그렇지. 아마 너희가 조선에 가장 크게 남길 것이 있다면 이 버들고리겠지."
양녕의 말은 그냥 하는 칭찬이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렇게 물건을 담아 쌓아 보관할 수 있는 버들고리는 이후로도 널리 쓰였다.
만드는 이들이 신백정에서 목수로 바뀌고, 재료가 버드나무 가지에서 나무판으로 바뀐 뒤에도 그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흔히들 장롱이라 묶어 부르는 가구에서 옆판이 통짜로 된 장과 달리, 농은 단층으로 된 것을 쌓아서 쓸 수 있는 가구인 점, 그리고 애초에 농이라는 말이 바구니라는 뜻의 한자인 것이 그 흔적이었다.
신백정들이 남긴 영향력이 21세기까지도 나무 가구를 바구니라고 부르게 만든 것이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 몽골말이나 여진말에 능한 이가 있느냐?"
그 말에 사내가 뒤를 둘러보았다. 거적 위에 앉은 다른 유력자들은 물론이고, 싸리문과 담벼락 너머로 구경하던 이들도 사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다시 양녕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내가 말했다.
"없습니다. 사실 제가 이리 확인할 것도 없이, 신백정들 중에서 다른 나라 말 하는 사람은 원래 없었습죠. 대대로 조선 땅에서 살아온 이들입니다. 할아버지나 그 윗대에 땅 잃고 떠돌면서 몽골인들이나 여진족들과 어울려 지내다보니 쟁기보다 말과 친해지고 가죽이나 버드나무 다루는 게 익숙해졌을 뿐, 조선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쓰는 말이 다른 백성들과 다르다는 이들도 있던데?"
당황한 사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가죽이나 말에 관해서 쓰는 용어들은 몽골인들이나 여진족들에게 배워 온 말을 그대로 대를 이어 가며 부모한테 배워서 쓰고, 생업이다 보니 그 용어들을 쓸 일이 많아 그리 들리는 것입니다. 지금만 해도 대군 마님께 조선말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족스러운 대답인 듯 끄덕인 양녕이 말했다.
"그러면 충분하겠군."
"충분하다니요?"
"장차 나라에서 동북면을 되찾으러 갈 것이다."
"동북면이면 여진족들 사는 추운 동네 아닙니까?"
"맞아. 그곳에 농민들을 많이 보내 봤자 농사지을 땅도 얼마 없고, 추운 곳이니 농사가 잘 지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목초지에서 풀은 자라겠지. 당장 여진족들만 해도 농사와 목축을 같이 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설마……."
침을 꿀꺽 삼키는 사내에게 양녕이 말했다.
"맞다. 너희는 말을 다루는 데에도 능하고, 가볍고 운반하기 쉬운 버들고리도 만들 수 있고, 가죽으로 신발이나 다른 물건들을 만들 수도 있지. 또한 목축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니, 동북면을 되찾는 군대를 도운 다음 그곳에 자리 잡고 살기에는 너희만 한 이들이 없다."
사내의 눈빛에 걱정한 기색이 도는 것을 보고 양녕이 피식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너희를 거기로 쫓아 보내거나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대지. 너희를 진짜 조선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기회를 주는 것인데, 너희가 조선에서 쫓겨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북면을 조선이 지배하고 안정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조선에 복속한 여진족들을 잘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여진의 말을 쓰고 여진의 옷을 입고 스스로를 여진족이라 여기는 이방인들일 뿐이야. 동북면을 진정한 조선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선 백성들이 그곳에 살아야 한다."
이어서 양녕은 거적 위에 앉은 이들은 물론, 담벼락 너머로 들여다보는 신백정들까지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동북면을 되찾으러 가는 데에 참여한 양반가의 서얼은 적자로 인정해 주고, 백성들에게는 성씨를 내려주고 있다. 너희도 마찬가지로 동북면에 간다면 성씨를 받아 그 누구도 천민이라 여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농사짓는 이들이 더 많은 여기에서 너희는 천덕꾸러기일 뿐이지만, 농사짓기 어려운 동북면에서는 오히려 너희가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적성에 안 맞는 농사를 강제로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해오던 일을 그대로 하면서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그 말에 사내의 눈이 빛났다.
"그럼 저희 마을이 다 옮겨가게 됩니까?"
"아니. 그건 아니다."
단호한 양녕의 말에 사내의 눈이 커지고, 담장 밖에서 웅성거림이 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