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26화
126화
1426년 2월 하순 모일.
한성부. 정착도감.
정착도감은 이전에 도성수축도감으로 쓰이다 도성 완공 이후 비어있던 건물에 들어섰다. 비어있는 동안 쌓였던 먼지가 말끔히 치워지고 집기까지 다 들여놓아진 정착도감 안을 둘러보던 최만리가 선반에 쌓여 있던 새 종이들을 들여다보다 양녕에게 말했다.
"이 종이들은 뭔가 좀 특이하군요. 종이 맞습니까?"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종이일세. 방직감에서 목화솜을 실로 만드는 동안 목화솜 부스러기가 어마어마하게 나오네. 실을 만들거나 누비에 쓰기에는 너무 짧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계륵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걸 종이 만드는 데에 섞어 넣은 것이야. 정신옹주의 발상이지."
"그래서 천 같기도 하고 종이 같기도 했군요. 그런데 이런 좋은 종이를 임시 관청인 정착도감에서 써도 됩니까?"
"임시 관청이니까 쓰는 걸세. 좋아 보이긴 하지만 이번에 막 새로 개발된 종이네. 중요한 문서에 썼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니, 임시 관청의 문서에 먼저 써보는 것이야."
"그런 것이었군요. 좋은 종이로 판명이 난다면 앞으로 중요한 문서에 쓰면 될 것이고, 적당한 품질만 되더라도 앞으로 목화솜 부스러기는 계속 나올 것이니 닥나무와 섞어서 쓰면 종이 생산이 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흥미롭게 다시 종이를 살펴보는 최만리에게 이번에는 양녕이 물었다.
"그나저나 내가 주상께 건의해서 데려와 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자네를 계속 이렇게 데려다 써도 괜찮겠는가? 이제 이전보다 더 승진해서 집현전 직전이 되지 않았는가. 다른 할 일이 있는 걸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군."
그 말에 최만리가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성균관은 천하의 온갖 것을 다 연구하고 학문을 밝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대군께서는 매번 새로운 것을 만들고 놀라운 것들을 시도하시니, 대군 가까이에 있으면 연구할 것이 끊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다들 반기며 가고자 하는 자리인데,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조금 심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차라리 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무슨 일 있는가?"
"조정의 오래된 악습으로 기존 관리들이 새로 들어온 관리들을 괴롭히는 것이 있습니다. 딴에는 막 관리가 되어 기고만장한 것을 눌러야 일을 잘한다는 이유를 대지만, 말만 번지르르한 악습인 것은 달라지지 않지요. 게다가 갈수록 그 도가 지나치다 싶었는데, 얼마 전 두 분 전하께서 시찰을 다니시다가 신입 관리 괴롭히는 장면을 딱 보시고 말았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양녕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짓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오랑캐나 할 법한 짓을 하는 놈들을 앉혀 둘 벼슬은 없다 하시면서 신입 관리 괴롭히던 이들을 전부 다 파면하셨습니다. 관직에 다시 출사하는 것도 금지해 버리셨지요."
"엄청 강경하게 대처하셨군."
"주상전하께서도 그런 풍조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은 있으셨나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듣는 것하고 직접 보는 것은 그 심각성이 다르니까요. 파면하고 나서 아예 모든 관청에 왕지까지 내리셨습니다."
"이거 원, 며칠 바빴더니 전부 다 금시초문이군. 어떤 내용인가?"
"과거를 치르거나 천거를 받아 조정에 출사한 인재들인데 되도 않는 악습을 당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나라의 큰 손해이고, 나라에 손해를 끼치는 놈은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예 한림별곡 같은 노래들마저 금지되었지요."
"마땅히 그리해야 할 일이었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한동안은 분위기가 살얼음판이겠구먼."
"예. 그래서 여기 온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합니다. 대군께서 도제조시고 인원도 적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런 일에 휘말릴 걱정이 없지요. 아마 다들 여기로 오고 싶어 하고, 대군께서 지목해서 부르신 이들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최만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그 친구를 쓰실 생각이십니까? 똑똑하긴 한데 사고를 한두 번 치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성격이 모나거나 나빠서가 아니라, 뭘 빼먹고 빠뜨리고 잊어버리고 하는 게 심해서 치는 사고들이지요."
"알고 있네."
"알고 계신데도 지목해서 부르셨단 말씀입니까? 정착도감이 할 일이 매우 중요함은 천하가 아는 것이니, 굳이 바쁘지 않은 관원을 지목해서 부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만리의 걱정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이유로 지목한 게 아니야. 아마 바쁘다고 했어도 정착도감에 필요하니 먼저 쓰겠다고 주상께 건의했을 걸세. 그나저나 자네가 그 친구를 두고 말하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신입에게 모질게 대하거나 하는 인품은 아닌 것 같군."
"그럴 친구는 아닙니다. 하지만 얼굴도 본 적 없으신 것 아닙니까? 지목까지 하셔서 뽑으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 말에 양녕이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둘러보는 양녕에게 최만리가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왔나 봅니다."
"왔다니? 대체 무슨……."
그렇게 말하며 양녕과 최만리가 정착도감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보인 것은, 이마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아있는 관리와 바닥을 굴러다니는 관모였다.
"괜찮은가? 대체 무슨 일인가?"
아픔을 참는 목소리로 관리가 대답했다.
"딴생각하면서 걷다가 그만 기둥에 들이받아 버렸습니다."
그 말에 양녕 옆에 서 있던 최만리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 또 시작부터 이렇게 하면 어찌하는가."
상황을 파악한 양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런, 바로 자네였군. 첫 등청을 화려하게 하는 것은 좋으나,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 다치지만 말게."
"예, 대군."
대답하면서 관모를 주섬주섬 쓰고 비틀거리고 일어난 관리가 의관을 정제한 다음 양녕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해동의 오 태백으로 이름 높으신 양녕대군을 처음으로 뵙고 인사드립니다. 집현전 직전 정인지라 합니다."
* * *
잠시 후.
정착도감에 들어와 얌전히 의자에 앉아있는 정인지에게 양녕이 물었다.
"부딪힌 곳은 이제 괜찮나?"
"예. 아직 좀 아프긴 하지만, 이럴 때 괜히 문지르면 멍이 들어서 가만히 두고 있습니다. 경험상 조금 더 있으면 아프지도 않을 겁니다."
익숙해질 정도로 들이받고 다닌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자기 입으로 하는 모습을 보고 최만리가 작게 한숨을 쉬고, 양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주위를 잘 살피고 다니게.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 머리를 소중히 여겨야지."
"알겠습니다, 대군. 그런데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정인지의 말에 양녕이 탁자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 장차 동북면의 옛 땅을 되찾으러 갈 것이네. 한때 조선의 강역이었던 그곳에 지금은 여진족만이 활개치고, 그 탓에 방향만을 가리켜 동북방이라고 하는 지경이 되었지. 그 땅을 다시 조선의 땅으로 만드는 첫 단계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네."
"어떤 것입니까?"
"지금이 동북면을 수복하기에 적기지만, 문제는 다른 상황들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따져야 할 것이 많네. 첫째는 면포일세. 봄이 되었으니 백성들 입을 것으로는 필요 없지만, 여진족과 교역해 말이나 모피를 사려면 동북면으로 면포를 보내야하네. 그런데 지금 명나라에도 보내야하고 오우치 가문에도 팔아야 해서 어디를 우선해서 얼마씩 보낼 것인지 수량을 잘 조절해야 해. 이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이네. 둘째로 식량이네. 군량은 물론이고 개척하러 가는 이들이 농사에 성공하기 전까지 먹을 미곡도 필요한데, 너무 적게 보내면 먹을 것이 없고, 너무 많이 보내면 국고에 무리가 가네."
양녕은 집중해서 듣고 있는 정인지에게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셋째는 말 사육이네. 지금 전국 각지에 목장을 만들고 키우는 중인데, 목장에서 키워내는 말과 명나라에 보낼 말, 우리가 쓸 말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야 원활하게 번식시킬 수 있지. 넷째로 목장을 짓고 항구를 만들 뿐만 아니라, 여진족을 대비해 요새를 만드는 데에도 점석회가 들어가네. 그 필요량을 정확히 파악해 너무 많이 생산되지 않게 하고, 남은 인력과 재료들로는 소금을 생산하고자 하네. 마지막으로 이런 물자들을 동북면으로 나르기 위해 어느 정도 배가 필요할지도 계산해야 하네. 이상일세."
양녕의 설명을 다 들은 정인지가 입을 열었다.
"할 일이 엄청 많군요. 서둘러서 다 해야 하는 일입니까?"
"재촉할 정도는 아니지만 빨리 될수록 좋은 일이네. 일단 저 옆 선반에 모아놓은 것이 자료들일세. 한성부, 삼척부, 나주부, 길주부, 포전부 등 이번 일에 관련한 고을에서 올라온 장계나 조정에서 작성된 문서들을 모아 놓은 것이지."
양녕을 따라 선반을 본 정인지가 눈을 크게 떴다.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나마 얼추 분류는 해 놓아서 저 정도일세. 각 종이 더미가 저마다 미곡, 면포, 말, 점석회, 선박에 관란 자료들일세."
"아, 그렇다면 좀 낫겠습니다."
정인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에서 미곡에 관한 종이 더미를 가져와 탁자에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아 살펴보기 시작했다.
"좀 낫다니?"
양녕의 말에도 정인지는 잔뜩 집중해서 들리지 않는지 대답이 없었다.
다모가 들어와서 양녕과 최만리 앞에 찻잔을 놓고, 정인지 앞에도 내려놓으면서 뜨거우니 조심하라고 하고는 다시 나가는 동안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면서 꼼꼼히 읽을 뿐이었다.
"정 직전 저 친구는 저렇게 한 번 집중하면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릅니다. 걸으면서도 생각에 잠기면 저러니, 항상 어디 들이받거나 걸려 넘어지는 것이지요."
최만리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정인지가 종이를 넘기다가 뜨거운 찻잔을 건드리지 않게 슬쩍 옆으로 치워놔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양녕이 자기 찻잔을 들고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 * *
양녕과 최만리가 차를 다 마시고서도 한참 뒤, 드디어 마지막 종이까지 읽고 옆으로 치운 정인지가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다 보았나 보군. 차가 다 식었을 텐데 괜찮은가?"
"예. 식은 차 마시는 건 익숙합니다. 그나저나 자료는 다 보았고, 이제 종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인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최만리가 선반에서 목화솜이 들어간 새 종이를 꺼내 탁자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벼루함도 가져와 탁자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벼루함 안에는 연적과 깃털 붓, 벼루가 있었고, 최만리가 벼루 뚜껑을 열자 안에는 이미 갈아놓은 먹물이 찰랑였다.
"먹물이 이미 들어있는데?"
"자네가 종이 들여다보는 동안 내가 갈고 있었네."
"고맙네, 최 직전. 그나저나 자네 재주도 좋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리 먹을 많이도 갈았는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는 그 말에 양녕은 웃음을 참고,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된 최만리가 말했다.
"자네는 절대 모를 비결이 있지. 자, 먹물 마르기 전에 어서 쓰기나 하게."
"알겠네."
정인지가 종이를 펼쳐 문진으로 눌러놓고, 깃털 붓을 하나 들어 먹물을 찍는데 최만리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자네야말로 이 짧은 시간에 면포 관련 자료를 어떻게 정리할지 벌써 가닥이 잡힌 겐가?"
"정리라니?"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정인지의 말에 최만리도 덩달아 의아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각 고을에서 올라온 저 많은 자료들을 계산하기 좋게 정리하려고 종이를 달라고 한 것 아니었나?"
"아니……. 이미 계산까지 다 끝났고 결과를 옮겨 적으려고 종이가 필요하다 한 거였는데?"
무슨 소리냐는 듯 한 얼굴로 정인지가 그렇게 말하자 최만리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