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25화
125화
이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대한 양녕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종친, 그것도 대군이 군대를 이끌게 되는 것은 군대 규모와 상관 없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정동군 때에 이미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한 번 일어났던 일은 오로지 한 번 있던 일로 끝낼 수 있습니다. 허나 두 번째부터는, 그것도 같은 사람이 두 번이나 맡아 버린다면 너무 큰 전례가 되어버립니다."
양녕의 말에 중신들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사실 지난 정동군 때에 양녕이 삼도 도통사가 되었던 것도 당시 폐세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해동의 오 태백으로 여겨지기도 전인 양녕을 보호하기 위해 이방원이 무리해서 추진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도원수를 맡긴다고 하면 반대하고 나설 신하들도 많았을 것이다.
"알겠소. 그 말이 지극히 타당하니 내 양녕대군을 회경군 도원수는 물론이고 다른 회경군 내 자리에 앉히지도 않겠소."
이도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녕이 반대했던 것처럼, 양녕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도 역시 시원하게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표정 변화도 없이 여유로운 두 사람의 표정을 본 황희가 주변을 둘러보다 허조와 눈이 마주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하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도와 양녕이 목적이 있어서 도원수 이야기를 직접 먼저 꺼내서 차단해 버린 것임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럼 대신 지난번 정동군에서 중군사단장을 맡아 공로가 컸던 의정부찬성 최윤덕을 회경군 도원수로 삼겠소. 당시 정동군에서 정동군단장을 맡아 양녕대군을 보좌했던 양후공(이종무)도 있으나, 이미 재작년에 고인이 되었으니 건너뛴 것이오."
"신 의정부찬성 최윤덕, 조종의 경사로운 땅을 반드시 되찾기 위해 분골쇄신의 각오로 임하겠습니다."
최윤덕의 말에 끄덕인 이도가 이번에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경들께서도 정동군의 다른 자리에 앉힐 적임자를 추천해 보시오."
"신 이조판서 맹사성 아뢰옵니다. 의정부 사인 김종서가 얼마 전 경차관 일을 맡아 북방에 관한 일을 함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문관으로서 무예가 뛰어난 것은 아니라 장수감은 아니지만, 군문의 여러 일을 관리하는 데에는 이만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신 병조판서 조말생 아뢰옵니다. 지난 정동군의 칠주도 원정에서 기병여단의 중기병연대장이었던 중군 동지총제 이징옥이 일신의 무예는 물론이고 기병을 통솔하는 데에도 출중합니다. 기마에 능한 여진족을 상대하려면 이런 이가 꼭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추천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의정 황희도 나섰다.
"지금은 잘못을 저질러 파면되어있으나, 황보인 역시 능력이 뛰어난 자입니다. 또한 갈 사람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겨두어 다른 일을 시킬 사람을 정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일례로 군기시정 최해산 같은 자는 군을 이끌게 하는 것보다 한성부에서 무기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데에 계속 쓰는 것이 더 이로울 것입니다."
중신들이 저마다 나서서 추천과 건의를 하려 드는 것을 잠시 멈추듯 손을 들어 올리며 이도가 말했다.
"자, 경들께서는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어차피 준비하고 정하고 할 것은 많이 남아있고, 시간도 많이 남아 있소. 천천히 따져서 다 하면 될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이도의 미소에서, 중신들은 오늘 일찍 퇴청하기는 글렀음을 직감했다.
* * *
한참 뒤.
해가 저물고 호롱불을 밝힌 조계청에서는 드디어 대략적인 내용이 정리된 종이가 이도 앞에 놓였다. 종이를 들어 올린 이도는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한 중신들을 향해 내용을 쭉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새로 회경군을 만듦에 있어, 지난 정동군의 사례를 참고해 바꾼 것이 있다. 저번 원정 때에는 각 부대마다 천자문에서 딴 이름과 숫자로 된 이름을 동시에 썼는데, 병사들이 한 번에 알아듣고 파악하기 좋았던 것은 숫자로 된 이름이었다. 군문에서는 명확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니 회경군을 이루는 부대들에는 숫자로 된 이름만 쓸 것이다."
이도는 바로 이어서 다음 변경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또한 지난번에 양녕대군이 건의하고 정동군에서 시험 삼아 사용해 본, 맨 위로 대장이 있고 맨 밑으로 참교까지 내려가는 품계가 있었다. 당초에는 이것으로 무관 품계를 대체할까도 했으나, 그 구분이 너무 간략한 탓에 장군과 군관은 품계에 따라오는 상하의 구분이 사라지고, 군교는 정과 종의 구분이 사라져 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무관 품계를 보조하는 용도로 쓰기로 하였다. 이는 대사마가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여라."
이도가 종이를 내려놓고 눈을 감고 쉬는 동안 병조판서 조말생이 자신 앞에 있는 종이를 펼쳐들었다.
"추가로 쓰이게 될 품계의 이름은 군에서만 쓰이는 계급이니 군급이라 하였습니다. 무관 품계와 하나씩 대응되는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무관이 자신의 원래 품계보다 몇 개 높거나 낮은 군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문관이 군무를 맡아서 할 경우에는 그동안 임시로 군급을 부여할 것입니다. 문무관을 따지지 않고 군문 안에서는 이 군급만을 따져 쓰게 될 것입니다."
잠시 숨을 돌린 조말생이 설명을 이어갔다.
"이렇게 군급을 쓰게 되면 세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로 문관이 군문의 일을 맡아서 하거나, 무관 품계와 맡는 부대의 급이 일치하지 않을 때 위아래의 혼란이 오던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병사들 가운데서 군교를 뽑아 쓸 때에도 장수가 군급만을 주고 바로 쓸 수 있으니, 주상전하께 상신하고 무관 품계를 받아야만 비로소 군교로 쓸 수 있던 이전에 비하면 전장에서 장군과 군관들이 더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조말생이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우선 군교로 뽑아 일을 시켜보고 능력이 있다면 건의해서 무관 품계를 내릴 수도 있으니 인재 발탁이라는 측면에서도 개선된 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전에는 무기를 개발하거나 말을 관리하는 등 군과 관련된 일을 한다면 무관 품계를 받기도 하고, 기술로서 품계를 받는 이들이라도 무관 품계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위아래의 혼란이 있었는데, 군급의 유무로 군인인지 기술자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조말생의 설명이 끝나자 다시 이도가 종이를 들었다.
"그럼 이제 편제를 발표하겠소. 회경군 도원수에 최윤덕. 군급은 원수. 회경군단장에 김종서. 군급은 대장. 중군사단장 겸 1보병여단장에 황보인. 군급은 부장. 중군사단의 1기병여단장에 이징옥. 군급은 참장. 또한……."
그렇게 쭉 읽어 내려간 회경군 편제에 양녕의 이름은 없었다.
다 읽은 이도가 종이를 내려놓고, 중신들이 드디어 퇴청할 수 있겠다 생각하는 그 순간, 이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에 추가로 명할 것이 있소. 칠주도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종친 가운데서 가고자 하는 이들을 뽑아 보낼 것이오. 동북면은 흥왕의 땅이니, 그 자리에 왕실의 핏줄인 종친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오."
칠주도처럼 종친들까지 보내서 동화시킬 대상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분상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백성들을 정착시키기 전에 모범을 보인다는 측면에서도 타당한 말이었기에 중신들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또 이번에도 역시 백성들을 뽑아 보내어 정착시킬 것이오. 동북면 고을들이 비워진 곳이 많으니 다 채우려면 전국에서 뽑아 보내야겠지. 경사로운 땅을 되찾는 것은 큰 공이라 할 수 있으니, 칠주도 때와 마찬가지로 서얼로서 동북면에 정착하는 자는 적자로 간주될 것이고, 정착하러 가는 백성들 역시 성씨를 받게 될 것이오. 그리고 정착하러 가는 종친들을 대표하며 또 관리하는 것은 이미 칠주도에서 해 본 적 있는 양녕대군에게 맡길 것이오."
심상찮음을 느낀 중신들이 소리 없이 술렁이기 시작했지만 이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또한 정착하러 가는 백성들을 선발하고 관리하는 것, 정착에 필요한 물자를 관리하는 것 역시 비슷한 일을 해본 적 있는 양녕대군이 맡아서 하게 될 것이오. 중요한 일이니 이번 정착을 맡아서 할 임시기구인 정착도감을 만들고, 그 도제조로 양녕대군을 앉히고자 하오."
갑작스러운 전개에 원칙주의자인 허조가 나섰다.
"하오나 전하, 조금 전에는 전례가 생기면 안 된다는 이유로 양녕대군에게 도원수를 맡기지 않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도원수에 관한 것이지 않소. 도원수는 군대를 이끄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오. 도제조도 맡기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제철감과 방직감의 도제조를 각각 종친인 경녕군과 정신옹주가 맡은 전례가 있소. 심지어 이 두 관청은 임시기구도 아니지."
말문이 막힌 허조 옆에서 황희가 따라 나섰다.
"전하. 동북면은 태조대왕께서 병사를 단련하고 여진족들을 이끄시며 왕업을 일으키신 흥왕의 땅입니다. 양녕대군이 덕이 있고 군대를 이끌지 않는다고 하나, 상왕 전하의 장자이신 양녕대군께서 중책을 맡아 동북방으로 가신다면 아둔한 여진족들이 그릇된 생각를 할까 염려되옵니다."
양녕은 장남이자 폐세자라는, 왕권에 대한 강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 양녕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여진족들이 한때 이성계에게 그랬던 것처럼 양녕의 밑에 모여들게 된다면 온갖 오해와 문제가 터질 수 있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괜찮소. 설령 여진족들이 양녕대군 아래로 모여들고 우두머리로 떠받든다 하더라도, 내가 앉은 이 옥좌가 위험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소."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도의 말에 잠시 당황했던 신하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해동의 오 태백인 양녕대군에게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오. 양녕대군이 나의 형님이시고 아바마마의 장자이시기에 여진족들도 그럴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있기 때문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희의 질문에 이도가 대답했다.
"유목민들은 가축을 먹일 목초지가 밥줄이오. 그런데 한데 모여서 가축을 키우면 금방 풀이 바닥나버리지. 그래서 자식들이 하나둘 장성할 때마다 각자 따르는 이들과 가축을 이끌고 독립해서 나가게 되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막내가 부모를 가까이서 봉양하다가, 부모가 죽고 나면 그 남은 재산을 상속받소."
"몽골인들이 그리한다는 것은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이번 일이 관련이 있습니까?"
"여진족들은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소. 그래서 지금은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숲에서 사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풍습은 유목민들의 것과 매우 흡사하오. 그래서 막내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지. 한성부에 와서 일하고자 한다는 여진족들이 거의 다 장남이나 차남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소?"
황희의 눈이 커졌다.
"장자를 볼모로 보낸다는 것이 강한 복종의 의미만이 아니라, 어차피 떠나갈 사람이라 보낸다는 것도 있었던 것입니까?"
"그렇소. 그리고 나는 막내이고, 양녕대군은 장남이지. 내가 조선의 임금이 되었고 양녕대군이 한성부에서 먼 동북면으로 왔다는 것은, 여진족 눈에는 장남은 분가하러 떠나왔고 막내가 왕위를 이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일 것이오. 여진족이 설령 양녕대군을 우두머리로 떠받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가한 장남의 세력에 들어간다는 것일 뿐이지, 그걸로 조선의 왕위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그들도 법도에 어긋나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설령 경들이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양녕대군은 회경군의 군권과 분리되어 있소. 그리고 여진족들을 호령했던 태조대왕의 자손이라는 강한 권위가 있고, 이미 먼터무를 기선 제압한 적도 있는 양녕대군을 보내는 것이 동북면 수복에도 좋지 않겠소? 물론 반대하는 다른 이유가 있거나, 좋은 대안이 있다면 얼마든지 의견을 내도 좋소."
여기서 더 반대를 한다면 필연적으로 양녕을 의심하는 방향이 된다. 그렇다고 대안을 더 꺼낸다면 건의자가 양녕대군 대신 정착도감 도제조가 되어서, 최소한 양녕대군이 도제조를 맡았을 때 예측할 수 있는 것만큼의 성과는 내야 할 것이 뻔했다.
'차라리 대군이 이미 회경군에서 작은 자리라도 하나 맡았다면 그것으로 끝낼 수 있겠지만, 이미 그 가능성은 토의 시작 전에 두 분께서 원천봉쇄해 버리셨고 지금 상황에서 군사를 맡기자는 소리를 꺼낼 수도 없다. 게다가 주상전하께서 꼭 양녕대군만큼이나 여진족들에 대해 잘 아시는 것도 그렇고, 두 분께서 미리 다 준비하시고 중신들 머리 위에 앉아계셨구나.'
황희가 졌다는 표정이 되고, 다른 중신들도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결국 오히려 정동군 때보다도 양녕에게 큰 권한을 주는 데 성공한 이도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딱히 없나 보군. 좋소.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하도록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