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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23화 (12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23화

123화

"이렇게 품질이 들쭉날쭉한 실로 면포를 짜신단 말씀입니까?"

"그렇네. 아무리 목화 농사가 잘 되어 목화솜이 풍부하고, 족답직기를 많이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중간에서 실을 만드는 데 시간과 품이 오래 들어버린다면 결국 생산되는 면포의 양은 얼마 늘지 않을 걸세. 사람 손으로 실을 뽑아야 하는 상등품 면포만 만들려고 했다가는 아마 명나라와 일본, 여진족에게 팔고 나면 백성들 쓸 면포는 없을지도 몰라."

설득을 위해 약간 과장해서 말한 양녕이 설명을 이어 갔다.

"방적기로 뽑은 실로 짠 중하등품 면포는 백성들에게 적당한 값에 팔고, 물레로 뽑은 실로 짠 상등품 면포를 교역에 써야 할 것이야."

잠시 동안의 침묵 뒤, 장영실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방적기로도 좋은 실을 많이 뽑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백성들에게도 상등품 면포를 싸게 공급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어쩔 수 없겠습니다."

"백성들도 기왕이면 상등품 면포를 원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당장 의복이 급하고 겨울이 온다면 중하등품이라고 마다하지는 않을 걸세. 오히려 상등품보다 싸게 구할 수 있으니 백성들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네. 무엇보다도 언제 자기 딸이 명나라에 진헌으로 보내질지 모르는 것보다는, 거친 하등품 면포로 옷을 지어 입는 것이 훨씬 낫다 여기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침울해진 양녕에게 장영실이 말했다.

"서글픈 일입니다. 하지만 대군께서는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어찌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겠습니까. 중하등품이나마 면포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백성들이 겨울나기가 이전보다도 훨씬 나아진 것이고, 앞으로도 나아질 여지가 더 많지 않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좋은 것은 남에게 팔고 나쁜 것을 백성들 주어야만 하는 상황이 서글프다고는 하나, 그런 상황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게 내 일이겠지."

장영실의 말을 듣고 표정이 한결 나아진 양녕은, 잠시 방적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얼추 급한 일은 다 끝났으니, 나는 이제 슬슬 한성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

갑작스러운 양녕의 말에 장영실이 놀라서 물었다.

"벌써 가신단 말씀입니까?"

"내가 조정에서 맡아서 해야 하는 일들의 목표는 면포 생산이 아니라, 명나라와 여진족, 일본에 관한 일일세. 그런 일들을 여기서 계속 처리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맞습니다. 면포는 그들과 교역하거나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한동안 솜만 들여다보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군요."

"그러니 나는 먼저 올라가 보지만, 자네와 다른 장인들은 한동안 남아서 조금만 더 힘써 주게. 방직 시설이 완성되어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른 적임자들에게 하던 일을 넘겨주고 자네들도 한성부로 올라올 수 있을 것이야. 다른 장인들은 몰라도, 주상께서 장 부정을 멀리 두고 다른 일을 시키실 리가 없으니 안심하게."

그 말에 장영실이 복잡한 표정으로 웃는 것을 본 양녕이 이번에는 사철이를 보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 해두고 갈 것이 있네. 사철이 자네를 면천시키려고 해."

그 말에 당사자인 사철이는 물론이고 장영실까지 깜짝 놀라 웃음을 멈추고 당황해서 양녕을 바라보았다. 사철이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종은 천민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권세가에 속한 사람이다.

어차피 평범한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농사짓는 일이나 남 도와주고 삯 받는 일이 거의 전부인 시대였다. 자기 땅이 없거나 먹고살 기술이 없다면 차라리 권세가나 관아의 종으로 들어가는 것이 입에 풀칠할 걱정은 없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내쳐질 것도 아니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걱정도 없었다.

"하하하, 자네가 이리 일을 잘 하는데 무슨 잘못이 있다고 내가 사철이 자네를 쫓아내겠는가."

종이 구박받는 낮은 신분이라고 하지만 다른 양인들이라고 서럽지 않게 사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볼 수 없다고 하지만 다른 양인들도 공부는커녕 평생 제 이름도 못 읽고 살다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런 시대에 종을 면천한다는 것은 멀쩡히 잘 다니던 평생직장에서 해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사철이가 겁먹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왜 면천을……."

"여기는 나라의 중요한 시설이면서, 일하는 이들 대부분이 여인들이네. 그런데 나랏일을 하는 이들은 전부 사내들이니, 그들이 와서 상주하면서 관리하면 잘 되지도 않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그런데 마침 자네가 요 몇 달 간 방직 시설 관리를 처음으로 해보면서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게 잘 이끌어왔으니, 자네를 여기 관리자로 삼고자 하네. 그런데 그러려면 대군의 종이라는 신분으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양녕의 설명을 듣고서도 여전히 당황스러움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눈만 굴리는 사철이를 대신해서 옆에서 장영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면천 받아본 당사자이기에 오히려 더 사철이의 면천을 걱정스럽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관리자가 사내인 것이 문제라면, 제철 시설을 왕자인 경녕군께서 관리하셨던 것처럼 공주나 옹주께 맡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한다면 관리자가 여인이기도 하고, 여인 혼자서 여기 와서 관리할 수 없다는 문제도 부마와 같이 이 근처로 거처를 옮겨 살면서 관리하게 한다면 해결 되겠지. 딱히 적임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누이가 열 사람을 넘고 다들 나라와 아바마마, 주상께 도움이 되고자 하니 와서 하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는 않을 걸세."

"그럼 그리하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오는 공주나 옹주가 사철이만큼 방직에 대해 잘 알고 방직 시설을 잘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양녕의 말에 장영실이 앗 하는 표정이 되었다. 경녕군 이비가 제철 시설을 맡게 된 것은, 양녕이 제철 기술을 만들 때 마침 칠주도에 있던 종친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제철에 재능이 있었던 것이 더 컸다.

"그리고 만일 방직에 어느 정도 재주가 있는 사람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미 잘 아는 사람이 옆에서 도와야 할 걸세. 그 자리를 사철이에게 맡기려는 게야."

"그런 목적이라면 굳이 면천까지는 안 가도 되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지시해야 하는 자리이니, 오히려 대군께 속한 종이라는 신분이 어지간한 양인보다 권위 면에서 나을 수도 있습니다. 속한 대상이 문제라면 차라리 나라에 속하게 옮기는 것도 방법입니다."

"다른 이들이 지시를 듣게 하는 문제라면 내가 주상께 건의해 보겠네. 아마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사철이에게 주실 것이야."

그 말에 거듭 놀란 장영실이 말했다.

"여인에게 말입니까?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게다가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양녕은 장영실과는 반대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가능하네. 주상은 물론이고 신하들 가운데서도 찬성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걸세. 그들이 성인이라 생각하는 양녕대군의 건의라서가 아니라, 그 내용이 타당하기 때문에 말이지.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도 당연히 있네."

"무엇입니까?"

"나라에서 천민의 숫자를 줄이고 양인의 숫자를 늘리려고 하는 것은 알고 있지?"

갑자기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이야기였지만 장영실은 우선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세금을 내고 군인을 할 양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에 이익이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네. 내가 작으나마 거기에 흐름을 만들고자 하네."

"어떤 흐름입니까?"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재능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재능을 썩히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 재능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세상에 나서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널리 퍼지는 흐름이네."

그 말에 장영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표정을 보고 미소 지으며 양녕이 말을 이어갔다.

"이미 지금 내 눈 앞에도 그런 생각을 증명한 사람이 한 사람 있지. 그러나 한 번 일어난 일은 말 그대로 딱 한 번만 일어난 일일 수 있어. 하지만 두 번 일어난 일이라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일어날 수 있네. 더군다나 두 번째로 증명한 사람이 사노에다가 여인의 몸인 자고, 주도해서 면천시킨 사람이 대군, 그것도 세상에서 모범으로 받들어지는 양녕대군이라면 더더욱 세 번 네 번 일어날 전례가 되지 않겠는가?"

양녕의 말을 이해하고 감격한 장영실과 반대로, 당황스러움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제대로 이해가 안 된 사철이가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살피며 말했다.

"저는 잘은 모르겠지만, 대군께서 큰 뜻이 있으신 것 같으니 따르겠습니다."

"사철이 자네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 어찌 자네를 내 뜻을 위한 도구로만 쓰겠는가. 설령 자네가 방직 시설에서 더 이상 일하지 않게 되고, 혹시라도 갈 곳이 없어진다면 내가 그 때는 다른 길을 찾아주겠네. 또 자네의 유일한 혈육인 남동생 기특이 말인데, 그 아이가 제법 영리한 구석이 있으니 그 아이 또한 면천하고 내가 이것저것 가르쳐보겠네. 기술에 재능을 보인다면 기술자가 될 수 있게, 문무에 재능을 보인다면 과거를 볼 수 있게 지원도 해 줄 것이야."

이번에는 사철이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 주신단 말씀입니까?"

"세상 많은 것은 나서고 싸워서 얻어내야만 손에 들어오네. 하지만 어지간한 백성들에게는 나서서 싸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 많아. 내가 그런 기회를 주고 싶어서 하는 것이네. 타고난 신분이 천하다고 해도,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말이야."

다른 내용은 몰라도, 양녕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임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사철이가 감격에 겨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군 마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 만큼 열심히 방직 시설을 돌봐주게. 그게 갚는 방법이야."

옆에서 장영실도 무언가 벅차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대군께서 실로 삼한 땅의 큰 성인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하고 귀한 것을 따진 지가 오래되었고, 사내와 여인을 따진 것은 더 오래되었습니다. 세간에서는 물론이고 조정 신료 중에서도 반대하는 이는 분명 나올 것이고, 그 과정에서 대군께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사철이도 걱정스럽게 양녕을 보았지만, 양녕은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멀리 내다보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하려는 일인데 그런 어려움은 감수할 수 있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얻게 되는 이득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양녕이 꺼낸 의외의 말에 장영실이 물었다.

"이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좀 마음이 편해집니다만, 저는 짐작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 이득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은 다음에도, 몇 백 년이 지난 다음에도, 오히려 시간이 그만큼 지난 뒤이기에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만인의 칭송을 얻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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