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21화
121화
양녕과 장영실이 도착한 방직 시설들은 얼핏 보면 높게 지은 집이 모여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거대한 단일 구조물에서 불과 쇳물을 다뤄야 해서 구조가 달라야했던 제철 시설과 다르게, 실내에서 작업한다는 특성 덕분에 일반적인 건축법을 쓸 수 있던 덕분이었다.
가장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자, 슬슬 수확철이 다가와 생산되기 시작한, 씨앗 빠진 목화솜 뭉치가 가득 쌓여있었다. 창고로 쓰이는 그 건물 안을 둘러보던 장영실이 말했다.
"그런데 어차피 여기로 인력들을 모을 것이라면, 굳이 조면기를 칠주도까지 보낼 것 없이 이곳 목포진에 가득 모아놓고 목화솜 뭉치를 바로 배로 받아와서 작업하면 더 빠른 것 아닙니까?"
"목화솜 뭉치에서 씨앗은 빼고 보내야 이듬해 농사를 짓지 않겠나."
양녕의 정확한 지적에 장영실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허허허. 그렇겠군요. 그건 생각 못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일단 원재료는 큰 문제없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으니, 작업장으로 가 보세."
작업장으로 향한 두 사람은 이번에는 건물에 들어가지 않고, 실 보푸라기가 날리는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열어 놓은 문 바깥에서만 보고 있었다.
여인들만 모여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괜히 높은 사람인 양녕이 들어가면 방해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다행히 밖에서 보아도 여러 개의 족답직기가 늘어서 있고 저마다 여인들이 앉아서 열심히 베를 짜는 모습이 잘 보였다.
"마침 8월이라 때가 참 좋았네."
지금은 8월 초순이었고, 곧 8월 중순의 한가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삼남지방에는 두레길쌈놀이라는 것이 있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지는 일종의 한가위 맞이 길쌈 대결이었다. 양녕은 그것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맞습니다. 어차피 길쌈은 이맘때 되면 원래 하던 일인데, 신기하고 좋은 기계로 짤 수도 있고, 자기가 가져온 실도 구입해 주고, 일한 삯도 미곡이나 포목으로 정확히 챙겨서 주니 이보다 더 신나서 할 일이 없지요. 작업장마다 나누어서 두레길쌈을 시킨 것도 대군의 혜산이십니다."
"사람이 원래 승부가 걸리면 열심히 하게 되지 않는가. 추수철에 다들 자기 집 일을 돌보러 가 주춤해지는 걸 대비하려면 지금 많이 짜두게끔 유도를 해야지. 홀태나 호롱기가 널리 쓰이니 추수철도 금방 지나가고 나면 베를 짤 인력이 크게 늘어날 것이고, 본격적으로 목화솜도 수확철이 될 걸세. 우리는 그사이에 족답직기를 더욱 확충해 놓아야 늘어난 인력과 수확한 목화솜을 놀리지 않고 면포를 생산할 수 있을 걸세."
"예. 그리해야지요. 지금은 일찍 수확된 솜들만 들어와서 양이 얼마 없는 게 어찌 보면 다행입니다. 다들 원재료가 많이 쌓여있다는 부담감 없이 베를 짜면서 족답직기에 숙달될 수 있으니까요. 나중에 족답직기가 늘어나면 지금 이 일을 하던 여인들이 새로 들어올 여인들을 가르치면 되겠지요."
지금도 작업실 안에서는 사내 장인들이 새 족답직기를 조립해서 만들고 있었다. 앉아서 베를 짜는 여인들도 반가 출신이 아닌데다가, 여기도 일하러 온 곳이지 자기 집이 아닌지라 거기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아직은 방직 자체가 여성의 일로 여겨지는 시대다.
"그렇지. 지금도 이 일을 감독하고 가르치고 하는 것을 사철이가 맡아서 하고 있는 것처럼, 이 이후로도 전반적인 시설 운영을 거의 다 여인들에게 맡겨야겠지. 여인들이 많이 있는 곳에 사내들이 섞여 들어갔다가 괜한 오해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자칫하다가는 방직 시설 운영 자체에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까."
"예. 다행히 장인들도 족답직기를 만들고 조립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처음 접하는 목재라 어색해하던 삼나무나 편백도 금세 능숙하게 다듬게 되었지요. 이 속도로 족답직기를 충분히 확충하고 나면, 방직 시설 안에 사내들이 돌아다닐 일도 많이 없어질 것입니다."
장영실의 말에 끄덕이던 양녕이 말했다.
"족답직기 생산 속도가 늘어났다니 다행이군.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어."
"다음 단계가 또 있습니까?"
장영실이 무엇을 혼동했는지 이해한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을 헷갈리게 했군. 족답직기로 면포를 짠 다음 뭘 더 하는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으로 만들 도구와 기계가 있다는 말이었네."
"아, 그 말씀이셨군요. 목화 수확철이 되기 전에 보급해 놓을 조면기를 만들고, 다음으로는 이미 있는 면사로 면포를 짜내는 게 급해서 중간을 건너뛰고 베틀을 개선하셨지요. 그 건너뛰었던 중간을 만들 단계라는 것이로군요."
"그렇네. 이제 목화 본격적으로 수확철이 되면 조면기로 씨를 뽑아낸 목화솜 뭉치들이 더 많이 생산될 것이니, 그것들로 실을 만들 도구와 기계가 필요하네."
"그럼 물레를 대신할 기계를 만드시려나 봅니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것 말고도 만들 건 많네."
"물레 말고도 말입니까?"
"이전에는 목화로 면포를 만드는 동안 쓰인 기계가 씨아, 물레, 베틀 셋이었지. 씨아를 대체하는 조면기를 만들고, 베틀을 개선했으니 이제 물레 차례가 된 것은 맞네."
"기계가 쓰이지 않는 단계가 있나 보군요."
빠르게 알아차린 장영실의 말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맞추었네. 물레로 실을 만들고 베틀에 걸어 짜는 것은 그 사이에 다른 과정이 없네. 하지만 씨아하고 물레 사이 과정. 즉 씨앗을 뽑아낸 목화솜으로 실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사람이 도구를 가지고 손으로 직접 해야 하는 일들이 여럿 있네. 그것도 개선하려 하네."
"씨앗 뽑은 솜을 바로 물레에 거는 것이 아니었군요. 어떤 과정입니까? 저도 알아야 잘 도울 수 있고, 어쩌면 그 과정을 기계로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본심이 담긴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눈을 빛내는 장영실에게 양녕이 설명했다.
"우선 씨앗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눌리고 엉킨 솜뭉치들을 한데 모아 놓고,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로 쳐서 불순물을 털어 내야 하네. 다음으로는 활처럼 생긴 무명활이라는 도구를 쓰네. 활줄을 솜뭉치에 대고 짧은 막대로 튕겨서 쓰는 도구일세. 뭉쳐진 솜뭉치를 튕겨진 활줄로 쳐서 부드럽게 풀어내고, 너무 짧아서 실을 짜는 데에 도움이 안 되는 목화솜 부스러기들도 털어 내지. 그렇게 대나무 막대와 무명활로 부드럽게 만든 솜뭉치를 큼직하게 떼어 내 넓게 편 다음 길게 말아서 고치를 만드네. 거기까지 되어야 물레를 써서 고치에서 실을 뽑아낼 수 있어."
"생각보다 엄청 복잡하군요. 말로만 들어서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걱정 말게. 나하고 같이 개선할 도구들을 만들다 보면 다 이해될 게야."
그 말에 장영실의 눈이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 * *
1425년 9월 중순 모일.
나주부 무안현. 목포진.
본격적으로 나주부와 칠주도에서 수확된 목화솜이 이곳 목포진으로 모이기 시작하고 며칠이 지났다. 갑자기 바빠진 항구 일을 처리하느라 며칠 만에 방직 시설에 찾아온 양녕과 장영실은 거의 시설 관리자가 되다시피 한 사철이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은 생산이 늘어난 것 치고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구나."
양녕의 말에 사철이가 벽에 걸린 것을 가리켰다. 이도가 고안해낸, 끈을 사용한 일종의 막대그래프인 조좌표였다.
"예, 마님. 저 조좌표라는 것 덕분입니다. 글을 몰라 간단한 숫자도 못 읽는 저나 다른 여인들이라도, 끈 색깔을 알아보고 눈금을 헤아릴 줄만 알면 무엇이 어디서 얼마나 생산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 여유가 생긴 사람이 다른 급한 곳에 가서 도와주기도 아주 좋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리 큰 시설에서 일을 할 수 있으니, 주상께서 정말로 대단하고 뜻깊으신 것을 만드셨어. 그나저나 생산에 별 문제가 없으면 온 김에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둘러볼까 하는데, 자네가 작업 과정을 좀 안내해 줄 수 있겠나?"
"물론이지요, 대군마님. 순서대로 돌며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철이가 처음으로 안내한 곳은 씨앗을 빼낸 목화솜 뭉치에서 불순물을 털어내고 부드럽게 만드는 작업을 하는 건물이었다.
서거나 의자에 앉아서 작업할 수 있게 탁자 여러 개를 둔 건물 안에서는 여인들이 저마다 탁자에 솜뭉치를 한가득 올려놓고 대나무 막대로 두들기거나, 그렇게 두들긴 솜뭉치를 가져와 무명활로 타고 있었다.
"순조롭게 잘 되고 있군. 다들 벌써 능숙해 보여."
양녕의 말에 사철이가 대답했다.
"대나무 막대는 아예 달라진 것이 없고, 무명활도 쓰는 법이 달라진 것은 아니라 다들 금방 익숙해졌습니다."
대나무 막대와 무명활을 쓰는 두 과정은 본격적으로 솜을 틀기에 앞서서 불순물을 빼내고 뭉친 섬유를 풀어내는 중요한 과정이다. 대신하는 기계를 만들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기계를 만들어서 쓴다고 하더라도 불순물을 제대로 빼내지 못하거나 뭉친 섬유가 남아버릴 가능성이 컸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그 부분을 제거하려 손이 더 가거나, 완성된 면포의 품질이 떨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존 도구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선에서 그쳤다.
"혹시 새 무명활을 쓰면서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던가?"
"오히려 다들 편해서 좋다고 합니다. 이전보다 크기가 커져서 한 번에 솜을 많이 탈 수 있으니 속도가 빨라진 것도 다들 좋아하고요."
무명활 크기를 키워 한 번에 많이 작업할 수 있게 개선했다. 대신 그만큼 무거워져서 들고 쓰기는 어려워졌지만, 그 문제는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탄력 있는 긴 대나무 막대를 작업하는 탁자 다리에 묶어서 세우고, 탁자 위로 높이 올라간 대나무 끝에 끈을 달아 무명활 손잡이와 연결한 것이다. 활을 들고 작업하는 게 아니라 탁자 위에 떠 있는 활 손잡이를 당기듯 눌러서 작업하는 것이니, 무명활의 무게와 대나무의 탄성이 상쇄되어 손에 피로가 덜했다.
"다행이군. 그럼 다음 단계로 가세."
다음 단계 작업을 하는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드물게도 사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걱을 가지고 어쩜 이리도 편하고 신통한 물건을 만드셨냐면서, 여기에 새로 작업하러 오는 여인들마다 대군마님을 칭송합니다."
사철이의 칭찬에 미소 지으며 양녕이 작업 현장을 둘러보았다. 건물 안에 앉아있는 여인들은 저마다 부드럽게 타낸 솜뭉치를 앞에 쌓아 두고, 양손에는 나무 밥주걱 같은 것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냥 일반 밥주걱하고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는데, 첫째는 밥을 퍼 담는 부분이 제법 넓은 직사각형이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그 면에 가늘고 짧은 대나무 못이 일정 간격으로 촘촘하게 박혀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역사의 21세기 사람이었다면 강아지나 고양이 털 빗겨 주는 빗을 키워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먼저 하겠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게 없으니 다들 주걱을 먼저 떠올리는군. 재밌는 일이다.'
양녕의 옆에서 장영실도 말했다.
"대군께서 저 주걱 같은 것에다가 대나무 못을 박고, 모든 대나무 못 끝의 높이가 같아지게끔 잘라내고 갈아서 맞추라는 지시를 처음 하셨을 때에는 대체 뭘 만드시려나 했는데, 막상 쓰이는 걸 보니 정말 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개발에 참여했던 장영실마저 주걱이라고 하는 모습이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만들면서도 이게 정말로 잘 될까 내심 걱정했는데, 자네들이 이리 추어주는 것을 보니 잘 되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리고 주걱이 아니라 빗일세, 무명빗. 아마 작업하는 걸 직접 보면 장 부정 자네도 내가 왜 주걱이 아니라 빗이라 이름했는지 알게 될 걸세."
양녕은 그렇게 말하며 마침 새로 작업하기 시작한 한 여인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