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9화
119화
1425년 7월 초순 모일.
한성부. 선공시
선공시 장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방 중앙에는 기존에 쓰이던 베틀이 놓여 있었다.
"우선 원본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아야 개선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가져다놓았네. 혹시 자네, 배틀 사용법은 아는가?"
양녕의 질문에 장영실이 대답했다.
"사실 베틀은 볼 일도 자주 없는지라,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모릅니다."
"역시 그렇지. 길쌈이란 본디 사내들 옷에 쓰이는 다회(장식용 띠)를 만드는 것을 제외하면 여인들의 일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네. 아마 여기 모여 있는 장인들도 베틀에 들어가는 부품은 잘 만들 수 있어도, 직접 짜 본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고. 그래서 내가 우리 집에서 일하는 여자 종들 가운데서 길쌈에 재주 있는 이들을 데려와 두었네."
"다행입니다."
"자, 그럼 총책임자가 베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아는 게 우선일 걸세. 어서 앉아 보게. 자네들이 장 부정이 앉는 걸 좀 도와주게."
양녕이 장영실을 떠밀 듯 베틀에 앉히며 그렇게 말했다. 곧이어 수염이 허연 장년의 관리에게 베를 짜게 시켜 본다는 게 재밌는지, 사철이를 비롯한 여자 종들이 웃으며 다 같이 달려들어 장영실의 발이며 허리에 베틀 부속품들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장영실이 어어 하는 소리만 내는 동안 준비가 끝나고, 종들이 뒤로 물러나자 양녕이 장영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기본적인 말은 알아야겠지. 베틀에 세로로 걸려 있는 실이 날실이고, 북을 통해서 가로로 지나가며 베를 이루게 되는 실이 씨실이네. 포목을 만들려 틀에 걸어놓은, 즉 날아놓은 실이니 날실이고, 거기에 씨를 뿌리듯 좌우로 오가는 실이니 씨실이라 기억하면 될 걸세."
베틀에는 앉아 본 적도 없는 양녕이 술술 설명하는 것을 신기한 듯 보는 종들과 기술자의 시선을 받으며 양녕이 설명을 이어 갔다.
"자네 배 앞쪽, 대나무살로 촘촘하게 만들어진 틈으로 실이 하나씩 지나가는 이 섬세한 물건을 바디라고 하네. 씨실을 날실 사이로 집어넣은 다음, 이걸로 이미 짜여있는 베 쪽으로 눌러서 이전 씨실들과 밀착하게 만드는 도구지. 그리고 자네 오른발에 씌워진 신을 보게."
그 말에 장영실이 날실 틈으로 비치는 자신의 오른발을 보았다. 발에 신겨진 짚신에는 끈이 쭉 이어져서 베틀 뒤쪽까지 연결되어있었다.
"끌신이라고 하네. 여기 달린 끈이 베틀 뒤를 통해 베틀 위쪽 나무 부품에 이어지고, 그게 저 앞쪽 날실들과 연결되어 있는 부품에 이어지지. 저 부품은 잉아라고 해서, 날실을 일정한 간격으로 올리고 내리는 부품이네."
"부품이라기에는 실로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맞네. 실과 막대만을 써서 이루어져 있는 부품이지. 지금 베틀에서는 짝수번 날실들이 잉아에 연결되어 있는데……. 이건 직접 움직이는 걸 봐야 바로 알 수 있겠군. 한번 오른발을 당겨 보게."
장영실이 조심스럽게 오른발을 당기자 끈이 당겨지고, 잉아가 위로 올라가면서 짝수번 날실들을 홀수번 날실들 위로 들어올렸다.
"이제 옆에서 보면 홀수번 날실들 위로 짝수번 날실들이 뜨면서 삼각형 공간이 생겼지? 이제 북을 그 사이로 넣어서 반대로 빼보게."
씨실 실타래가 들어있는 북을 한쪽으로 넣고 반대 손으로 잡아서 빼자, 날실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천천히 씨실이 풀려 나왔다.
"이제 씨실 위치를 대강 잡아 준 다음 바디로 눌러 주게."
처음 해보는 일인지라 온 정신을 집중해 작업하는 장영실에게 이어서 지시했다.
"이제 오른발을 앞으로 다시 뻗게."
이번에는 잉아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짝수번 날실들이 홀수번 날실들 아래로 내려갔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감을 잡은 장영실이 북을 그 공간으로 넣어 맨 처음 들고 있던 오른손으로 보내고 바디로 눌러서 고정했다.
"이제 이해했습니다. 베틀이 이런 식으로 움직여서 베를 짜는 것이었군요."
"이해했다니 다행이네. 이만 일어나 보게."
다시 종들의 도움을 받아 베틀에서 일어난 장영실에게 양녕이 물었다.
"처음으로 베를 짜 본 감상이 어떤가?"
"단순하지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해서 힘듭니다. 씨실을 한 번 왕복한 것 정도로는 베 길이가 늘었는지 줄었는지 감도 오지 않으니 진득하지 않으면 만들 수가 없군요. 맹자의 어머니께서 학문을 중도에 끊는 건 베를 중간에 끊는 것과 같다며 짜던 베를 끊어 버리셨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네. 엄청나게 시간이 드는 일이지. 게다가 속도를 낸다고 급하게 하면 천이 틀어져 버릴 수 있지. 빠르면서도 세밀하게 만들려면 숙달되지 않으면 안 되네."
"이제 이걸 왜 먼저 개량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아무리 목화솜이 넘쳐 나더라도 이 속도로는 베틀을 수백 개는 놓고 만들어야 면포가 충당되겠군요."
장영실의 말에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니 다행이네. 그럼 베틀 구조에 대한 감상은 어떤가?"
"딱 맞게 떨어져서 움직이는 구조가 아니고, 그러다 보니 효율도 떨어집니다. 끌신으로 잡아당겨 잉아를 들어 올리는 것도 제대로 된 지렛대가 아니라 효율이 그리 좋지 않지요. 바디도 어디 고정되어있는 게 아니라 날실들 위에 얹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불안정합니다. 잉아도 실로만 되어있어서 당기는 것은 몰라도 내려놓을 때는 힘을 잘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딱 맞아 떨어지는 걸 좋아하는 자네다운 지적이군. 정확히 보았네. 말 그대로 맹자께서 어리셨던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쓰여 온 물건인데다가, 규방의 물건인지라 세상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해서 이런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구조 그대로야. 그래도 반대로 생각하자면 고칠 여지가 매우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
"손 댈 곳이 하나둘이 아닌데 어디부터 고치실 계획이십니까?"
"일단 딱 맞게 떨어지는 구조를 만들건, 어디 고정되어서 안정감 있게 만들건 간에 틀을 짜두어야 수월할 것 같네."
"조면기도 상자로 되어서 그 안에 부품들이 들어가 있었지요. 그것과 비슷하게 하시려나 봅니다."
"그렇네. 목재 넷으로 바닥을 짜고, 다른 넷으로 기둥을 세우고 다른 넷으로 천장을 만들 생각이네. 꼭 지붕 없는 오두막처럼 말이야."
"그럼 틀은 그렇게 짜고, 베틀 자체 개선은 무엇부터 할까요?"
"하나씩 해서 될 게 아니야. 전부 한 번에 고치겠네. 그러니 소목장에서 바디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내 지시를 잘 따라와 주게."
* * *
며칠 뒤.
선공시.
완성된 개량 베틀을 바라보던 장영실이 말했다.
"드디어 완성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이 직전에 만든 것이 조면기라서 더 그렇겠지. 베틀은 실이 상하면 안 되니 실에 닿는 정밀한 부품에는 철물이 쓰이지 않고, 바디나 잉아처럼 정밀한 부품은 바디장이나 소목장이 이미 익숙한 솜씨로 응용만 해서 만들면 되었네. 철물을 써서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던 조면기보다 쉬울 수밖에. 자, 그럼 어디 잘 되나 한번 해보세."
"또 제가 앉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장영실의 모습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그때는 개발해야 하니 자네를 앉혔던 것이네. 지금은 어디가 달라졌고 어떻게 편해졌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니, 이미 기존 베틀로 베를 많이 짜 본 사람이 앉아야 하지 않겠나. 사철이 자네가 앉게."
"네, 대군 마님."
양녕의 지시대로 베틀에 앉은 사철이가 의아한 듯 말했다.
"베를 허리에 연결하는 부품들이 없는데요?"
"베를 잡아당기는 부품인 부티나, 만들어진 베를 감는 말코 자체를 베틀에 포함시켰네. 끌신도 없앴으니 앉아서 준비하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지."
신기한 표정으로 베틀을 살펴보는 사철이에게 양녕이 말했다.
"아래를 보면 발판이 둘 있을 걸세. 왼쪽 발판을 우선 밟아 보게."
사철이가 왼쪽 발판을 밟자 발판에 연결된 끈이 당겨졌다. 끈은 도르레를 몇 개 거치고 틀 위를 지나서, 나무틀로 보강된 잉아에 연결되어 있었다. 끈이 당겨지고 잉아가 덜컥 소리를 내며 올라가자 양녕이 말했다.
"왼쪽 발판을 밟으면 홀수번 날실은 들리고 짝수번 날실은 제자리에 있네. 이제 왼쪽 발판은 놓고 오른쪽 발판만 밟아 보게."
이번에는 홀수번 날실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짝수번 날실이 들렸다.
"정말 신통합니다. 끌신 신고 당기는 것보다 발판을 밟는 게 더 편하네요."
"그럴 걸세. 끈에다 도르레 몇 개를 연결했을 뿐이라 만들기도 어렵지 않지만 힘은 확실하게 덜 들지."
주변 기술자들은 이해했는지 다 끄덕이고, 이해는 못 했지만 사철이도 끄덕였다. 그때 장영실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굳이 실을 짝수번 홀수번 나눠서 잉아를 두 개나 설치할 필요가 있습니까? 기존 베틀도 잉아 하나만 가지고 실을 올리고 내려서 작동하지 않았습니까. 개선하신 구조를 쓰되 발판하고 잉아를 하나로 줄이면 끈 하나에 도르레를 더 많이 쓸 수 있으니 드는 힘을 더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영실의 질문에 양녕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전 방식대로 만들면 한 번은 고정된 날실 위로 공간이 나고, 한 번은 그 아래로 공간이 나지 않는가. 이렇게 잉아를 두 개로 늘리면 공간이 항상 같은 곳에 생기게 할 수 있네."
"그게 어떤 차이를 만드는 겁니까?"
"이걸 위해서 차이를 만든 것이지."
양녕이 바디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바디는 기존 베틀과 다르게 위쪽 나무틀에 매달려 있었다.
"한번 움직여 보게."
양녕의 말에 사철이가 바디를 앞뒤로 움직이자, 나무틀에 매달린 상태로 그네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네와 다른 점은 끈이 아니라 나무막대를 써서 매달려있어서 정해진 방향과 각도로만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바디를 매달아 놓아서 움직이기 편하고 안정적이게 만들었지. 그리고 중요한 건 이거야. 어디 발판을 번갈아서 밟아 보게."
사철이가 왼쪽 발판을 밟자, 짝수번 날실은 바디 아래쪽 틀에 바짝 붙고 홀수번 날실은 위쪽에 떠서 공간이 생겼다. 반대로 바꿔 밟자 홀수번 날실이 바짝 붙고 짝수번 날실이 떠서 공간이 생겼다.
"이제 이해했나? 바디 높이가 고정된 지금 구조에서 이전처럼 짝수번이나 홀수번 실만 잉아로 오르내리게 하려고 하면, 실을 올렸을 때는 공간이 생기지만 실을 내렸을 때는 모든 날실이 다 바디 아래 틀에 걸려서 공간이 생기지 않네."
"그런데 그게 문제라면 바디 아래쪽 크기를 좀 더 키우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실을 내리더라도 아래쪽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궁금해하는 장영실과 장인들에게 양녕이 바디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때문일세."
"바디 아래쪽에 달린 그 작고 긴 나무판 말입니까? 꼭 툇마루 달아 놓은 것처럼 생기긴 했는데, 뭐에 쓰는 물건입니까?"
양녕은 대답 대신 사철이에게 말했다.
"왼쪽 발판을 밟게."
짝수번 날실이 바디 아래 틀과 거기 붙은 나무판에 밀착해서 달라붙고, 홀수번 날실이 위로 떴다.
"이제 나무판 저쪽에 북을 올려놓고 이쪽으로 톡 밀어보게."
지시대로 사철이가 하자 북이 나무판에 밀착한 실들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 반대쪽 손에 잡혔다.
"북은 그대로 두고 바디를 당겨보게."
나무판은 바디 바깥으로도 이어져 있었고, 가장자리는 난간처럼 올라오게 되어 있어서 바디를 움직여도 나무판에 올라간 북이 떨어지지 않는 구조였다.
그걸 확인하고 사철이가 바디를 당기자 부드럽게 씨실이 눌렸다.
"우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지른 사철이가 화들짝 놀라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반대로 기술자들은 기술자들대로 대체 왜 사철이가 감탄사를 질렀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양녕이 그 광경에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놀랄 만도 하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할 만도 하고. 내 설명해 주겠네. 이 설명을 듣고 나면 다들 사철이만큼이나 깜짝 놀라게 될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