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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18화 (11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8화

118화

"조면기는 이미 목화솜 뭉치에서 씨앗 뽑아내는 일 하나만 하는 기계 아닌가? 어떻게 분업을 시킨다는 말인가?"

"예전에 한 사람이 물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던 시절에는 장인 한 사람이 아프면 그대로 한 사람 만큼의 생산이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분업하게 된 뒤로는 장인 한 사람이 빠지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조금만 더 힘쓰면 생산이 줄어들지 않고, 복잡하고 중요한 과정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그 과정만 가르쳐서 금방 투입할 수도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장영실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이천은 감이 잘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그런데 그게 조면기에 적용이 되는가?"

"지금 만든 조면기는 옛날 장인과 같습니다. 통째로 정밀하게 만들어져 있는 탓에 어디 한 곳만 문제가 생겨도 그대로 기계를 고치기 전까지는 아예 쓸 수가 없지요. 그런데 조면기 전체가 아니라 부품 하나하나를 분업 장인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각 부품이 자기 일을 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조면기에서 분리해 낼 수 있고, 같은 기계의 같은 부품이라면 어디서 구하나 차이가 없다면 쉽게 대체해서 고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장영실의 말을 이해한 양녕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고장 나더라도 그 부품만 분리한 다음 새 부품을 구해서 바꿔 끼우면 되겠군. 아니면 아예 고장 날 걸 대비해서 여분을 미리 구해 두어도 될 것이고 말이야. 같은 기계의 같은 부품은 어디를 가나 똑같다는 것은 전국 모든 장인이 똑같은 크기로 만든다는 말이니, 한성부에서 사서 석주부에 가져간 기계가 고장 나더라도, 동래부 장인이 만든 부품으로 교체해서 고칠 수 있다는 것이고."

양녕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규격화라는 개념을 스스로 만들어낸 장영실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굳이 수리할 때가 아니라도 목화솜 상태에 맞춰서 적합한 부품으로 바꿔서 쓸 수도 있겠지요."

드디어 장영실의 시대를 앞서간 발상을 이해한 이천도 끄덕이며 말했다.

"화차에서 수레는 그대로 두고 위에 올라가는 발사대만 교체해서 쓰는 것과 비슷하군. 지난 칠주도 정벌 때 수레와 발사대 결합부 치수를 모든 화차가 똑같게 만들어 전부 호환되게 만든 기억이 나. 만일 자네가 말한 것을 무기에도 적용한다면, 소총이나 대포 같은 무기들도 일선에서 쉽게 수리해서 쓸 수 있을 걸세."

무관 출신다운 응용법을 말하던 이천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약간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무엇이 말이오?"

양녕의 질문에 이천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 지역 장인들이 만든다는 부분이 문제입니다. 다른 부품은 몰라도 적어도 씨앗을 걸러내는 부분에 들어가는 철물들은 정밀하게 딱 맞아야 조면기가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국의 자 눈금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니, 설령 장인들이 똑같은 설계도를 보고 그대로 만든다고 해도 지역마다 크기가 달라 호환되지 않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미 장영실의 말을 듣고 규격화라는 개념을 기억해 낸 양녕에게는 답이 있는 문제였다.

"그건 설계도만 보내지 않고 조정에서 정확한 눈금으로 통일한 자와 부품 견본품도 같이 보내면 되오. 그리고 기술이 많이 들어가 만들기 힘들거나 특히 정밀해야하는 부품들은 한성부에서 만든 다음 전국의 장인들에게 보내거나 팔면 되고 말이오."

양녕의 해답에 이천이 눈을 크게 떴다.

"각 지역 장인들이 조면기를 만들어서 팔려면 제 기능을 해야 하고, 제 기능을 하려면 한성부에서 가져온 중요부품이 딱 맞게 들어가서 움직여야 하겠군요. 그런데 중요부품이 딱 맞으려면 최소한 결합부만은 견본하고 일치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정에서 정한 자를 써서 만들 수밖에 없겠습니다."

"맞소. 이런 게 반복된다면 전국의 장인들을 중심으로 길이와 자의 표준을 보급할 수도 있을 것이오. 좋소. 그럼 나는 이걸 바로 주상께 보고하고, 각 지역 수령들 및 장인들과 연계해서 대대적으로 진행하자 건의하겠소."

"바로 그렇게 하신단 말씀입니까?"

양녕의 추진의지에 규격화라는 구상을 떠올린 당사자인 장영실이 당황해서 물을 정도였지만, 규격화의 잠재력을 아는 양녕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네. 이건 더 큰일들을 이룰 발판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당장 면포 생산이 급하지 않은가. 목화 수확이 끝나는 가을철이 되기 전까지 전국, 적어도 칠주도 목화 재배지마다는 규격화가 적용된 조면기가 전부 보급되어 있어야 하네. 당연히 서둘러야 하지 않겠나."

* * *

1425년 7월 초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예조판서 황희를 조계청으로 불러 정사를 논하던 이도는 급한 논의가 끝나고 잠시 여유가 생기자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이렇게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갈 줄은 몰랐소."

"그러게 말입니다. 녹주백 심구풍이 죽고, 그 아들 심충국이 작위를 승계한 것은 이제 별 주목도 못 받을 정도입니다."

"하필 지금 상황에 오우치 가문이 영지 동쪽 야마나 가문을 선공해서 전쟁이 터질 줄이야. 애초에 오우치 가문이 세를 불리는 것은 우리도 반길 일이고, 우리에게 서신을 보냈다가 공격 계획이나 조선과의 관계가 들키면 안 되니 선공 이후에 소식을 보낸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미리 말해 줬으면 대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오."

"오우치 가문도 자신이 있으니 야마나 가문을 공격했을 것이고, 상국인 조선을 믿으니 선공 이후에 소식을 보낸 것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오우치 가문에서 도움을 요청해도 조선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조선은 지금 동북방 수복, 말 목장 증설, 목화 농사 확대, 농기구 보급 등을 전부 동시에 진행하는 중이라 오우치 가문까지 물자를 지원하기에는 빠듯했다.

"하기야 우리도 물자 쓸 곳이 많다는 말에 알겠다면서 그럼 면포를 더 팔아 줄 수 있냐고 나온 것을 보면 머리가 모자라는 자는 아니오. 면포를 일본에 팔아서 전비를 마련할 생각일 테니. 면포를 운송하는 건 오우치 가문 배가 아니라 다른 지역 태수들이나 쇼군이 보낸 상인들이 오가는 것이니, 야마나 가문도 뱃길을 차마 틀어막지 못할 것이고. 문제는……."

"면포도 빠듯해서 생산을 늘리려고 애쓰는 중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조선에서 안정적인 공급을 받지 못하면 전비 부족으로 오우치 가문이 야마나 가문에게 밀려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오우치 가문이 다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전비 확보를 위해 면포 자체 생산을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면포를 더 많이 팔아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행황제가 좀 더 오래 살았거나, 아니면 칙서를 보내는 것이라도 늦어졌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 같소."

이도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양녕만이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홍희제는 결국 사신단이 돌아가고 나서 얼마 뒤 지병으로 사망하고 선덕제가 즉위했다.

원래 역사처럼 암살 시도가 있었는지는 조선에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숙부 주고후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소식은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황위에 오른 선덕제는 상중임에도 열성적으로 정무를 보았고, 조선에도 바로 칙서를 보냈다. 처녀 진헌을 말과 면포로 대체하고, 동북방 진출도 그대로 진행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처녀 진헌을 면포와 말로 대체하라는 칙서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

선덕제는 여진족을 조선과 나눠서 관리할 필요성은 알지만 그러면서도 조선의 여진족 지배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북원을 상대하는 일이 급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면포를 조선의 예상보다도 많이 요구해 왔다.

"그나마 말은 이미 많이 요구해 둔 것이 있어서 면포 수량만 늘린 것 같긴 하지만, 이대로는 오우치 가문을 지원하고 여진족 지배를 강화하고 명나라 조공까지 보내야 하니 면포를 엄청나게 만들어야 하오."

잠시 한숨을 깊게 쉰 이도가 이어서 말했다.

"지금은 형님을 믿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소."

* * *

같은 시각.

선공시.

잔뜩 만들어진 조면기 중요부품들을 옆에 쌓아 놓고 장인들이 검수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장영실이 문득 양녕에게 말했다.

"대군과 시계를 만들 날은 대체 언제 올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급박히 변해 버린 지금 상황들이 다 정리되어야겠지."

"그래도 대군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중요부품만 만들어서 보내고 나머지 부품은 자와 설계도를 보내 알아서 규격에 맞게 만들어서 쓰게 한 덕분에, 조면기를 통째로 만들어서 보급해야 하는 일은 피했습니다."

"자네가 규격화라는 발상을 한 덕분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장인들이 전부 조면기 제작에 투입되느라 다른 일을 진행할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게야."

칭찬을 주고받으면서도 딱히 기쁜 표정이 아니던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이내 장영실이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검수는 별 문제 없이 진행되는 것 같으니 다시 개발하러 가시지요. 부품을 규격대로 만든 기계에 장착하고 돌려서 잘 작동하면 다시 꺼내서 검사 완료라는 표식을 찍는 것이니, 사실 별문제가 있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럽세."

양녕과 장영실이 서둘러 자리를 옮겨간 곳에는 베 짜기에 관한 온갖 도구들이 모여 있었고, 장인들이 저마다 무언가 하나씩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양녕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천천히 진행해 가려던 일인데, 하필 선덕제가 예상보다도 면포를 과하게 요청한 데다가 오우치 가문까지 전쟁을 일으켜버릴 줄이야. 차분하게 계획을 짜서 개발하려던 계획은 물 건너갔군. 그나마 일이 급해진 덕분에 충분한 지원을 받게 된 건 전화위복인가.'

"그나저나 저는 좀 의외였습니다."

장영실의 말에 양녕이 되물었다.

"의외라니?"

"목화솜 뭉치에서 씨를 뽑아내는 씨아를 대체하는 기계를 만드셨으니, 이어서 그 다음 단계인 솜뭉치로 실을 뽑아내는 물레를 대체할 기계를 만드시겠거니 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마지막 단계인 베틀을 개선하신다고 하셔서 저만이 아니라 선공시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이 제법 있었습니다."

그 말에 양녕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진행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 탓에 양녕에게 기대가 쏟아지고, 기대에 부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성과를 빠르게 내야 하는 양녕이 가장 먼저 고른 것은 베틀이었다.

"아직 목화 수확철이 되지도 않았는데, 조면기로 씨를 뽑은 목화솜 뭉치들도 생산되기도 전에 물레를 대신할 것을 만들어서 무엇 하겠나. 오히려 이미 만들어져있던 면사로 면포를 짜낼 베틀을 개선하는 게 급한 일이지."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럼 베틀은 어떻게 개선하실 계획이십니까? 혹시 조면기처럼 손잡이만 돌리면 베가 알아서 짜이는 그런 기계입니까?"

어떤 정밀한 기계일지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그렇게 물어오는 장영실에게 양녕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자네도 참 급하군. 그런 신묘한 기계가 어디 뚝딱하고 만들어지겠나. 말 그대로 개선이야. 지금 베틀에서 엄청 달라지지는 않을 걸세."

그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짓는 장영실에게 양녕이 이어서 말했다.

"대신 지금 필요한 것들을 빨리 다 만들고 나하고 같이 시계를 만드세. 그러면 되겠지?"

"물론입니다!"

다시 기운을 차린 장영실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양녕이 생각했다.

'원래 역사에서 산업혁명을 일으킨 그런 복잡한 기계들을 한 번에 만들 필요도, 그럴 재주도 없다. 하지만 원래 역사에서 단순한 도구들을 쓰던 장인들이 직접 개량하거나 만들어 냈던 것들은 효과도 크고 만들기도 어렵지 않겠지. 간단하지만 성과는 큰 그런 것들을 하나둘 도입해가다 보면 언젠가는 더 놀라운 것을 이뤄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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