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7화
117화
1425년 3월 초순 모일.
한성부. 선공시.
양녕이 이도에게 선공시 전체를 쓰겠다는 승인을 받은 다음날 오후. 아예 선공시로 소속이 옮겨져 자기 짐을 모두 챙겨 온 장영실에게 양녕이 말했다.
"장 부정 왔는가. 주상께서 맡기신 일이 있었는데 아직 할 게 남아서 여기로 옮긴 다음에도 그 일 마무리를 해야 한다고 들었네. 내가 괜히 자네를 고생시키는 건 아닌가 걱정이군."
장영실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미 중요한 과정은 다 끝난 것이고, 남은 과정은 겉을 꾸미고 마감한 다음 옮겨서 설치하는 것뿐이라 크게 시간이나 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주상 전하께서도 여기로 옮겨간 다음 마무리를 하라고 하신 것이겠지요. 무엇보다도 대군께서 이번에도 저를 쓰겠다 하신 덕분에 제가 상의원 별좌에서 선공시 부정으로 진급까지 했으니 기쁘게 달려와 도와야지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일인가? 설치한다고 하니 뭔가 물건을 만드는 것 같긴 한데."
"예. 일전에 주상전하께서 제게 시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만들라 명하셨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해본 것은 많으나 실제로 만드는 데에 한계가 있어서 우선은 최대한 정밀한 해시계를 만들고 있었지요."
원래 역사에서 장영실이 이룬 업적을 아는 양녕은, 그 말을 하면서 장영실이 보인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채고 말했다.
"해시계는 밤이나 흐린 날만 아니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지. 해라는 것이 언제나 변함없는 법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니 만들어 두고 오래 쓰면서 다른 시계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해시계만한 것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해시계라는 게 맞물려서 움직이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물건인지라, 아마 만들면서 자네 성에 차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녹로를 개량할 때 내가 자네와 같이 밤을 샌 적이 있지 않았는가. 그때 녹로 구동부를 설계하면서 피곤해하면서도 눈이 빛났던 것이 인상적이었네. 그걸로 미루어 짐작한 게야."
"맞습니다.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돌아가는 기계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지요."
그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오른 양녕이 말했다.
"나한테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로 된 시계를 만드는 구상이 하나 있네. 해시계처럼 날씨에 좌우되지도 않고, 들여다보면서 눈금을 읽고 풀이할 필요도 없이 자기가 알아서 지금이 몇 시인지 보여 주는 시계지."
그 말에 장영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입니까?"
"그렇네. 그런데 지금은 급히 먼저 만들어야 할 기계가 있으니 이걸 먼저 만들고, 일이 다 끝나면 나하고 같이 그 시계를 만들면 어떻겠는가?"
확실하게 동기부여가 된 장영실이 의욕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만드신다는 기계가 대체 뭐하는 물건이길래 대사공까지 와 계십니까?"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공조판서 이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종이를 펼치며 말했다.
"이걸세. 대군과 내가 오전에 만든 간략한 설계도일세."
설계도를 읽어 내려가며 장영실이 말했다.
"이름은 조면기인가 보군요. 면포하고 관련이 있나봅니다."
"그렇네. 목화솜 뭉치에서 씨앗은 남겨 두고 솜만 빼내는 기계일세."
그 말을 듣고 말없이 설계도를 한참 들여다보던 장영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목화 씨앗보다 작은 간격으로 빗살을 만들고, 빗살 사이를 통과하는 작은 발톱이 달린 통을 돌리는 것이로군요. 빗살 이쪽에 목화솜 뭉치들을 놓고 통을 돌리면 발톱이 목화솜 실을 걸어 잡아당겨 빗살 반대쪽으로 가져가고, 빗살에 걸려서 넘어가지 못한 씨앗은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양녕이 말했다.
"정확하네. 그리고 반대쪽으로 넘어간 씨앗 빠진 실들은 돌아가는 솔에 쓸려서 아래로 떨어지지."
"왜 대사공께서도 와 계신지 알겠습니다. 이 기계는 나무만으로는 절대로 못 만들겠군요."
공조판서는 원래 역사에서도 대체적으로 기술자 출신들이 역임했던 자리라 실무와 밀접했다. 당장 현임자인 이천도 참판이었던 당시에 거중기와 녹로 개발에 참여했으니 개발 현장에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장영실은 공조판서라는 관직으로서가 아니라, 금속 기술자로서의 이천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렇네. 정밀하게 맞물리는 부품들, 씨앗을 걸러낼 빗살, 실을 당길 발톱. 어느 것이건 간에 철물로 만들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지. 그 부품들은 내가 맡아서 하겠네. 저번에 거중기와 녹로 만들던 때처럼 자네와 내가 협력하는 것이지."
자신 있게 나서는 이천에게 장영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 공조의 모든 일을 맡으시는 자리에 오르셨는데, 다른 일이 바쁘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주상전하께서 필요하다면 모든 지원을 여기로 돌리라고 하셨네. 내가 계속 붙어있을 수 없다면 다른 이들을 보내도 되고, 아니면 반대로 다른 업무로 지원을 돌리고 내가 여기 있어도 되지. 애초에 지금은 이거 말고 다른 업무도 딱히 없으니 안심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최선을 다해 이 조면기라는 기계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 * *
1425년 4월 중순 모일.
한성부. 선공시.
목화 파종 시기인 4월이 되기 전에 칠주도 간척지에 목화밭을 만드는 것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한참 바빴던 양녕은, 조면기 시제품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선공시로 왔다.
"엄청 빨리 만들어졌소."
"공조에 소속된 유능한 장인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데다가, 구조적으로는 어려운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한번 써 보시지요."
그 말에 양녕이 옆에 있던 목화솜 뭉치를 한 움큼 집어 조면기 위로 집어넣었다. 이어서 옆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끼릭거리는 소리가 나며 발톱 달린 통이 움직였다. 그렇게 잠시 돌리자 실이 거의 다 사라진 씨앗들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반대쪽으로는 씨앗 없는 목화 실이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한 양녕이 흡족한 표정으로 끄덕이며 말했다.
"완벽하게 잘 움직이는구려. 만드는 데에 문제는 없었소?"
"목화 씨앗 크기가 다 같은 게 아니라서, 처음에는 작은 씨앗들이 빗살을 넘어가기도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실만 통과하면 충분한 것 아니냐는 장 부정의 말을 듣고 빗살 간격을 확 좁히고, 대신 실을 걸어 당기는 발톱 모양을 개선해서 실이 끊기는 것을 막았더니 해결되었습니다. 그 외에는 큰 문제없었습니다."
"아주 좋소. 그런데 장 부정은 어째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데."
양녕의 말대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장영실이 말했다.
"다 만들어 놓고 보니 지금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지금은 시제품은 잘 만들어져서 문제없이 움직이고, 성능도 제대로 나옵니다. 하지만 양산품을 오래 쓰면서도 계속 괜찮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이천은 장영실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심각하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오래 쓰면 문제가 생기는 거야 안 그런 물건이 어디 있겠나. 금속부품이나 빗살, 발톱이 무뎌지거나 변형되면 제 기능을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야 하겠지만 그건 그 부품을 고치거나 새로 바꾸면 되는 것 아닌가?"
이천과는 달리 장영실의 말에 진지한 표정이 된 양녕이 말했다.
"나도 방금 장 부정의 말을 듣고 생각한 건데, 그게 그리 간단한 얘기가 아닐 것 같소."
"간단하지 않다 하시면……."
"이 조면기는 본토는 물론이고 칠주도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쓰일 물건이오. 백성들이 만들고 고쳐가면서 쓸 수 있어야 하지. 그런데 지금 시제품은 선공시에서 공조 지원을 받아가며 정밀하게 만든 것이지 않소. 어지간한 민간 장인들은 설계도와 견본을 받더라도 똑같이 따라 만들기 어려울 수 있소. 그러면 생산은 고사하고 수리조차 어려울 지도 모르오."
"그래도 익숙해지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홀태나 호롱기, 나선양수기 같은 것들도 처음에는 관청에서 나눠 주고 고쳐 가면서 쓰게 시켰지만, 어느 정도 퍼진 다음에는 민간에서 알아서들 만들고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
"그것들과는 상황이 다르오. 나선양수기는 딱 맞물리지 않아도 물을 퍼 올리는 데에 큰 문제만 없으면 쓸 수 있소. 문제가 생기더라도 재료가 나무니 수리하거나 교체하는 데에 크게 어렵지도 않지. 홀태는 애초에 고장 날 만한 물건이 아니고, 호롱기는 털어 내는 용도인 것이라 축에 고정되어서 돌아만 가면 그만이오."
양녕의 설명을 듣던 이천도 점점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기계들에 비하면 조면기는 쇠로 된 부품도 여럿 쓰이고, 고장 날 구석도 많고, 딱 맞물려서 돌아가야 제구실을 하지요. 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복잡한 기계이고 크기는 더 큰 녹로도 민간에서 만들어서 쓰이니 괜찮지 않을까요?"
"녹로는 오히려 크기가 크니 괜찮은 것이오. 목재고 철물이고 부품들이 다 큼직하니 사소한 오차정도야 문제되지 않아서, 조금 투박하게 만들어도 되니 백성들도 만들고 고칠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 조면기는 다루는 크기가 목화 씨앗과 솜이라는 지극히 작은 것들이오. 작고 정밀해야 하니 녹로보다도 어렵소."
드디어 문제를 이해한 이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대책을 찾기 시작했다.
"만들기 어려우니 값이 비싸고, 고치기 어려우니 수리비도 비싸겠군요. 그렇다고 직접 만들거나 수리하는 건 더 어려울 테니 이래서야 널리 퍼지지 않겠습니다. 그럼 대신 물레방아처럼 하면 어떻겠습니까? 크기를 키워서 고을마다 두고 공용으로 쓰면서 관리하는 것이지요. 다 같이 돈을 모아서 사고, 고장 나도 다 같이 수리비를 부담하면 되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양녕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러면 관리 부담이나 가격, 수리비 걱정은 덜 수 있겠소. 하지만 제조와 수리가 어렵다는 근본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 않소?"
양녕의 지적에 잠시 생각해 본 이천이 말했다.
"어려운 걸 쉽게 만드는 게 안 된다면, 어려워도 할 수 있게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어려워도 할 수 있게 만들다니 무슨 말이오?"
양녕이 관심을 보이자 이천이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분업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분업하면 한 과정만 집중해서 가르치면 되니 장인을 키워 내기가 쉬워지지 않았습니까. 그것처럼 조면기를 공용으로 쓰는 마을 마다 손재주 좋은 백성들을 몇 추려서 수리법을 나눠서 가르치는 겁니다. 장인으로 먹고살 정도는 되지 않더라도, 조면기에 한해서 각 부품들 수리법을 하나씩 익히는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요. 그러면 제조는 어렵더라도, 수리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앗!"
그때 갑자기 장영실이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양녕과 이천은 대화를 멈추고 그 쪽을 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장영실을 보고 양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네 왜 그러는가. 괜찮은가?"
"바로 그거입니다."
"바로 그거라니?"
"분업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를 장영실의 말에 양녕이 이천을 보았지만, 이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네가 뭔가 떠올린 것 같은데, 알아듣게 설명해 주겠나?"
그 말에 장영실은 제정신을 차렸는지 머쓱해 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면기에게 일을 분업해서 시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