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6화
116화
원래 역사에서 홍희제 다음 황제이자, 지금은 태자 신분인 선덕제는 홍희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남경에서 북경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도중에 숙부, 즉 홍희제의 형제인 주고후가 선덕제를 암살하려 했다.
결국 미수에 그쳤지만, 그다음 해에 주고후는 끝내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고 말았다.
'가능성은 지극히 낮지만, 만일 암살시도와 반란 둘 중 하나라도 원래 역사와 크게 달라져버린다면 명나라와 조선, 어쩌면 전 세계 역사 자체가 내가 예측할 수 없게 흘러가 버릴 수 있다.'
원래 역사처럼 선덕제가 무사히 즉위하더라도 여전히 변수가 있었다. 선덕제는 할아버지인 영락제를 닮아 사냥을 좋아한 탓에 원래 역사에서 조선에 해동청을 줄기차게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취향마저 닮았는지 처녀 진헌도 요구했다.
만일 홍희제가 죽기 전에 처녀 진헌이 말과 면포로 대체되지 않는다면, 아니면 설령 대체되더라도 조선에 통보되기 전에 홍희제가 죽고 새로 즉위한 선덕제가 번복해 버린다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수용할지 거부할지는 결과가 나와 봐야 아는 것이오. 그리고 설령 만에 하나 수용되지 않더라도 미리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두면 되고 말이오. 마침 내가 명나라가 수용했을 경우 큰 도움이 되고, 거부하더라도 도움이 될 대비책을 생각해 둔 것이 있소."
양녕의 말에 허조의 눈이 커졌다.
"오늘 사신들이 돌아간 참인데 이미 그 다음 계책을 준비해 두셨단 말입니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오. 바로 면포 생산을 대량으로 늘리자는 것이오."
양녕의 말에 황희가 끄덕이며 말했다.
"명나라가 조건을 수용한다면 면포를 더 만들어야 백성들도 부족하지 않겠지요. 만일 거부하더라도 면포는 여진족을 통제하거나 오우치 가문과 무역하는 것 등 여러모로 쓸모가 많습니다. 말은 이미 목장에서 키워 내는 계획이 진행 중이니, 면포 생산을 늘리자는 말씀은 지극이 타당한 것입니다."
이도는 벌써 신경이 쓰이는 듯 입을 열었다.
"명나라가 면포를 얼마나 요구할지는 모르나 결코 그 양이 적지는 않을 것이니, 아직 파종 안 한 농지를 목화밭으로 전환하고 면포 짜는 이들을 늘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쉽지 않겠군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기존 농지는 그대로 두고 밭을 새로 만들면 되지요."
"밭을 새로 만든다니요? 새로 개간을 하기에는 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지 않겠습니까?"
양녕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농지를 목화밭으로 바꾸어 버리면 그만큼 백성들 먹을 미곡 생산이 줄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목화는 본래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고, 소금기가 어느 정도 있는 땅에서도 견디고 자랄 수 있습니다."
바로 양녕의 의도를 파악한 이도가 감탄하듯 말했다.
"칠주도를 쓰실 생각이시군요."
"예. 칠주도에 간척해서 만들어진 땅들은 평지이긴 하나 아직 소금기가 많아서 미곡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칠주도는 따뜻한 곳이고, 목화는 소금기를 잘 견디니 그 간척지에 목화농사를 지으면 되지요. 목화농사를 계속 지으면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소금기도 빗물에 다 쓸려 내려갈 것이니, 그때는 거기를 다른 밭으로 바꾸어 미곡 농사를 지어도 됩니다."
"다른 밭으로 바꾸더라도 어차피 간척지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목화농사 지을 곳은 많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칠주도면 일본에 가까운 곳이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목화 종자가 일본에 넘어가 버리면 여러모로 큰일이 나는 것 아닙니까?"
이도의 걱정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백제 때 목화가 있었지만 품종과 기후가 맞지 않아 농사가 끊겼고, 일본에서도 그리 차이나지 않는 시기에 천축에서 들여온 목화 재배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시간이 흘러 고려 말 문익점이 동북아 기후에 적응한 종자를 들여오고 재배 기술도 만들어 낸 덕분에 면포 생산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생산 능력이 없었고, 그 덕에 조선이 면포를 수출해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동북아 기후에 적응한 목화 종자가 일본에 넘어가 버린다면 수출길이 막혀 버리게 될 우려가 있었다.
"그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선에서 칠주도 방비를 잘하고, 오우치 가문이 한 번 더 막아 줄 테니까요."
그 말에 허조가 의아한 듯 질문했다.
"반대 아닙니까? 조선에서 면포를 사서 일본에 팔던 오우치 가문인데, 만일 자신들이 생산하게 되면 더 큰 이익이 날 것 아닙니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오. 첫째로 종자만 있다고 농사가 지어지는 것은 아니오. 씨를 뿌려 키우는 지식과 요령, 기술이 있어야 목화솜을 수확할 수 있고, 그 뒤로도 씨아니 물레니 하는 온갖 도구들도 갖추어져야 면포 생산까지 할 수 있소. 삼우당(문익점) 선생께서 고생하신 것도 그 때문이지 않소."
"하긴 그런 기술과 도구까지 한 번에 다 빼 가기는 어려운 일이고, 그렇다고 처음부터 만드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둘째로 일본과 칠주도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밀수업자들을 모두 참수해 효수할 정도로 철저하게 국경을 막고 있소. 그런데 오우치 가문은 일본 본토와 땅으로 이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봉신이지만 일본의 태수이기도 한 입장이라 길을 틀어막아버릴 수도 없소. 조선보다도 종자나 기술을 지키기 어려운 조건인데, 어설프게 욕심을 부렸다가 일본 전역으로 목화농사가 퍼져 버리면 아예 면포 장사 자체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오우치 가문도 알 것이오."
양녕은 다들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보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셋째로 그런 모든 어려움과 위험을 감수하고 오우치 가문이 목화농사를 강행한다 하더라도 영지에 농토 자체가 부족하오. 예전에는 칠주도 동북부 평야를 얻기 위해 다른 태수들과 싸워 왔고, 지금은 조선에서 미곡을 사 가는 이유도 그것 때문 아니겠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농토에 목화를 키운다는 것은, 그것도 언제 성공할지 기약도 없는 짓을 한다는 것은 굶어죽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요."
"성공한다 치더라도 농토가 적으니 생산도 얼마 못 하겠습니다."
"물론이오. 결국 오우치 가문으로선 조선에서 사서 팔아야 충분한 이익을 올릴 수 있지. 그런데 만일 목화를 빼돌려 자체적으로 생산하거나, 혹은 그러려고 시도했다는 게 발각되면 분노한 조선이 오우치를 거치지 않고 일본에 바로 면포를 팔아 버릴 수도 있소."
"중계무역이 완전히 망해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보복당할 수도 있겠군요. 조선은 직접 군사를 보내지 않더라도 지난 정동군 정벌 때 오우치 가문이 내통했다는 내용만 일본 측에 흘리면 충분합니다."
"그렇소. 이런 모든 위험을 따져본다면, 오우치 가문이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목화 반출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방심할 수는 없겠소만."
"그렇다면 목화농사는 칠주도에서 하면 문제없을 것이고, 남은 건 인력이 문제군요. 길쌈에 능한 여인들을 최대한 독려하고, 능하지 않은 여인들에게도 잘 가르쳐주게 해야겠습니다."
여전히 걱정이 남은 표정으로 말하는 이도에게 양녕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 무리하지 않아도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입니다."
"기계로 말입니까?"
놀라는 이도에게 양녕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가 다 짤 필요는 없고, 그럴 기술과 여유도 없습니다. 우선은 사람 손이 많이 가는 과정 몇 개만 단순한 기계로 대체하면, 남게 된 인력과 시간을 다른 과정에 써서 면포 생산을 늘릴 수 있지요. 만일 그렇게 기계로 대체하는 과정을 하나둘 늘려간다면 언젠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가 다 짤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몇몇 과정만 대체해도 충분하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칠주도에 원정 떠나시기 전에 책으로 남겨 주시고 가셨던 농기구들이 그랬지요. 홀태나 호롱기는 탈곡에만 쓰이는 농기구지만, 전국적으로 보급된 뒤로 수확철에 여유가 생긴 백성들이 다른 부업을 하면서 농가들마다 생활형편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맞습니다. 처음에는 철이 많이 쓰이는 도구라 잘 퍼질까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대군께서 칠주도를 정복하고 소석탄 제철법을 만드신 뒤로 철 생산량도 늘고 값도 내려서 별 어려움 없이 퍼졌습니다. 정말로 대군께서는 몇 수 앞을 내다보십니다."
이도는 물론이고 황희의 칭찬까지 들은 양녕이 겸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천운으로 일이 잘 풀린 것이지요."
"그런데 만든다면 어떤 기계를 만드실 겁니까?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일손이 많이 드는 과정에 쓰이는 기계를 만들어야 하겠지요. 씨아를 대체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씨아면 목화솜을 눌러서 씨를 빼내는 도구 아닙니까? 그건 이미 구조가 간단하고 만들기도 쉽지 않습니까?"
이도의 질문에 기술자 출신인 공조판서 이천이 나섰다.
"씨아가 구조는 간단하지만 결국 사람이 목화솜 뭉치를 하나씩 물려서 빼내야 합니다. 목화솜 뭉치가 큰 것도 아니라서 수확한 것을 하나하나 작업하려면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고 맨손으로 빼는 것보다는 나으니 씨아가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보다도 더 효율이 좋은 물건을 만드시려는 것이겠군요. 무언가 조정에서 도와드릴 게 있습니까?"
이번에는 또 과연 무엇을 만들까 모두들 기대하는 시선을 받으며 양녕이 말했다.
"선공감을 쓰고 싶습니다."
지원을 해달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청을 하나 쓰겠다는 강한 요청이었지만 이도는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입니다. 백성들을 따뜻하게 입히는 것이자 생이별을 멈추는 일이고, 교역해서 부를 얻는 일이자 여진족을 제어하는 일입니다. 나라의 중대사이니 그 정도는 해드려야지요."
이어서 이도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미 지난번 도성 개축과 도로 부설에서 선공감의 공로가 컸고, 선공감이 만든 녹로와 거중기는 건설만이 아니라 항구에서도 유용이 쓰이고 있소. 이에 선공감을 선공시로 바꾸어 그 격을 올린 다음 이번 일을 맡기고자 하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이도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관청에 공로가 있으면 그 격을 올려 치하하고 권한을 주어 더 큰 일을 맡김이 마땅합니다."
"지극히 이치에 닿는 일이니 바로 시행하심이 합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중신들을 본 이도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내일부터 바로 선공감, 아니 선공시는 양녕대군의 지시를 따라 씨아를 대신할 기계를 만들게 하시오. 또한 대사공께서는 필요하다면 다른 급한 일에 필요한 것을 제외한 모든 지원을 선공시로 돌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공조판서 이천의 대답을 들은 이도는 양녕을 보고 다시 물었다.
"또 다른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상의원 별좌 장영실을 데려와서 쓰고자 합니다."
그 말에 이도가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마침 지금 맡겼던 일도 거의 끝났으니, 선공시로 옮겨 마저 마무리 짓고 바로 형님을 돕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역시 형님께서는 재주 있는 사람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아십니다."
"주상의 사람 보는 안목만 하겠습니까."
양녕과 이도의 그 대화를 듣던 황희와 조말생은 이유 모를 한기가 몸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