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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15화 (11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5화

115화

1425년 3월 초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윤봉과 박실을 비롯한 사신단이 다시 명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고 나서, 이도와 이방원, 중신들과 양녕은 창덕궁 조계청에 모였다. 모인 명목은 회의였지만, 실제로는 다들 고생했다며 뒤풀이를 겸해 모인 것에 가까웠다.

"정말 길었습니다. 잘 끝나서 천만 다행입니다."

지친 표정의 예조판서 황희의 말에 양녕이 질문을 던졌다. 윤봉을 완벽히 속이기 위해서 공식적인 연회 참석은 물론이고 어지간해서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던 양녕은, 지금 사신들 배웅에도 참석하지 않아 소식을 잘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사당패가 들키지는 않았소?"

"예. 어차피 그럴싸하게 속이는 재주가 필요했던 것은 개를 빼앗겨 주기 위해 이동 경로에 배치했던 몇몇 뿐이었으니까요. 나머지는 거리를 통제하면서도 한성부 거리가 너무 텅 비어 있으면 수상케 여길까 봐 거리에 풀어 일반 백성 행세를 하게 배치했던 사당패들이니 그리 들킬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이오. 이제 사신단이 평양과 의주를 거쳐 조선을 벗어날 때까지만 각 고을에서 잘 속이면 되겠소."

옆에서 차를 마시며 듣던 이방원이 양녕에게 말했다.

"어려울 것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도성은 이미 벗어났으니 돌아가는 길목에 네가 해동의 오 태백으로 여겨진다는 소문을 듣는 일만 없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혹시라도 가는 길에 또 탐욕이 도져서 백성들에게 물건을 빼앗으려 들 수는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주게 두고 나라에서 나중에 값을 쳐주어야겠지."

조말생도 뒤를 이어서 말했다.

"예. 이번에 대군께서 현명히 계획을 짜신 덕분에 백성들 피해가 적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대군을 다시 만나러 와야 제 욕심을 채울 수 있으니, 괜히 가는 길에 분란을 만들어 다음번 사신으로 못 올 화근을 만들지도 않겠지요."

"이미 만족한 얼굴이었으니 굳이 더 탐욕을 부리지도 않을 겁니다. 특히나 대군께 선물로 받은 별사탕이 든 작은 꾸러미는 정말 애지중지 챙기더군요. 환관이라 구슬 욕심이 심한가 봅니다."

황희의 농담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껄껄거리고 웃는데, 병조판서 조말생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별사탕이라는 것은 설탕으로 만들었다는 것만 알았지 대군 말고는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처음 몇 개 만들어졌던 것도 설탕이 원래 귀한 약인지라 두 분 전하께서만 드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아바마마하고 나만 먹었었지. 맛은 정말 대단했소. 그게 다 설탕으로 만든 것이라 생각하면 호화로워서 먹기 꺼려질 정도였지만, 그것만 아니면 고기반찬으로 한 상 거하게 먹은 다음 입가심으로 매 끼니마다 먹고 싶을 정도였소."

이도의 말에 더 흥미가 동한 조말생이 양녕에게 직접 물었다.

"그 정도입니까? 대군께서 자택에서 문을 다 걸어 잠그고 만드신 것도 그렇고,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나봅니다."

그 질문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통에 양귀비 씨앗처럼 작은 씨앗을 부어 넣고 기울여서 계속 돌리면서 설탕 녹인 물을 주기적으로 뿌려 줍니다. 그렇게 하면 씨앗 겉에 설탕물이 묻고 굳어 가면서 점점 알갱이가 커지지요. 그걸 반복해서 크기를 키우면 별사탕이 만들어집니다. 통을 끊임없이 돌려야 하긴 하지만, 통에 바퀴를 연결해 바퀴를 돌리면 통도 돌아가는 간단한 기계를 만들어서 쓴 덕에 그리 품도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힘 좋은 사내 종 몇 명더러 돌아가면서 돌려 달라 한 것으로 충분했지요."

별사탕 제조법을 들은 조말생이 이해했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만드는 데 비법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만드는 법이 너무 쉽군요. 그래서 제조법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자택에서 만드신 것이겠습니다."

"예. 언젠가는 밝혀질지 모를 제조법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정말로 설탕하고 물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밝혀지면 땅도 크고 설탕도 나고 사람도 많은 명나라에서 오히려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어지니까요. 적어도 한동안은 조선의 장인이 꽁꽁 숨긴 비법으로만 만들 수 있다 알려진 특산물이라야 뇌물로 쓸모가 있습니다."

"그래서 약재도 이것저것 쓰셨군요. 온갖 약재의 향이 다 나니 많은 재료가 다 들어가야 완성이 된다 생각하지, 설마 재료는 설탕하고 물뿐인데 그 간단함을 감추려 약재를 넣었다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정말로 약효가 날 만큼 넣지 않고 향만 나면 됩니다. 귀중품인 설탕과 여러 약재가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별사탕을 뇌물로 받아서 먹는 이들은 만족감에 약효가 나는 것처럼 느낄 테니까요. 그저 사치품이기 때문에 사치품인 물건이니, 뇌물로 이만한 것도 없지요."

"윤봉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조선은 녹주부에서 사탕수수 농사를 지은 뒤로 이전에 비하면 설탕 값이 엄청 내렸으니, 정말로 받는 당사자만 귀하다고 생각하고 혼자 좋아하는 물건이지요."

조말생의 말에 다들 윤봉을 비웃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 흐름에 이방원이 말을 꺼냈다.

"뭐 귀한 것이라고 하면 눈이 돌아가는 거야 그 마키에라는 칠기에 보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소."

공식 연회에 참가하지 않아서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양녕이 이방원에게 물었다.

"어떠했기에 그렇습니까?"

"네가 계획한 대로 연회에 쓰이는 금은 그릇들을 전부 마키에 칠기로 바꿨다. 그랬더니 엄청 탐을 내더구나. 심지어 이전에 사신으로 왔을 때 금은 그릇을 보던 것보다도 눈을 빛냈어."

황희도 동의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 칠기들을 자기 달라는 소리를 끝나고 나서도 아니고 연회 도중에 할 정도였으니까요. 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윤봉이 금은 그릇보다 칠기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남의 속까지 들여다보겠소. 그자가 금은보다도 칠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전에 왔을 때는 금은 그릇을 달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일 거라 예측했고, 그게 맞은 것뿐이오."

"무슨 말씀입니까?"

다시 질문하는 황희에게, 양녕의 말을 바로 이해한 이도가 대신 설명했다.

"이런 것이오. 윤봉은 탐욕스러운 것도 있지만 패악질을 부리고 싶어서 패악질을 부리는 것이지 않소. 궁에서 임금이 쓰는 그릇을 빼앗아 간다면 그 더러운 심성에 그보다 더 기쁠 것도 없을 것이오. 그런데 만약 금은 그릇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정말로 받아서 명나라에 돌아갔다 쳐 봅시다."

이미 이해했는지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이방원과 달리, 여전히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신들을 보며 이도가 설명을 이어갔다.

"명나라는 그 큰 나라 안에 돈으로 돌릴 금은이 항상 부족해서 조선에 걸핏하면 조공으로 요구하는 판이오. 그런데 사신으로 갔던 환관이 조선의 임금이 쓰던 금은 그릇을 빼앗듯 가져와서 쓴다면 문제가 될 거리가 한둘이 아니지 않겠소?"

그제야 이해한 듯 황희가 말했다.

"마키에 칠기라면 그런 부담이 적군요. 궁에서 쓰이는 호화로운 기물인 것은 마찬가지이나, 그 근본은 칠기니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금은 그릇과는 다르겠지요. 어째 그놈이 사신으로 와서 걸핏하면 놋쇠 주전자를 달라고 하나 이전부터 궁금했었는데 그것도 이제 알겠습니다."

다른 중신들도 모두 이해한 표정인 것을 보고 다시 양녕이 말했다.

"그렇소. 조선 놋그릇이 그 품질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궁중 물건이면서도 금은이 아닌 그릇이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마키에 칠기로 윤봉에게 연회를 열어 준 것은, 일부러 빼앗겨 주어 그 탐욕을 채워 만족하게 하려는 것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소."

"다른 이유도 있단 말입니까?"

다들 처음 듣는 내용인지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양녕이 말했다.

"그렇소. 내가 며칠 전에 윤봉을 만났을 때 조선은 명나라에 금은 조공하는 것도 부담된다는 운을 넌지시 띄워놓았소."

"영사도감의 계획으로 이미 접해서 알고 있습니다. 다음번에 윤봉이 왔을 때는 금은 조공을 폐지해 달라 요청하시려는 것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폐지나 대체는 아니오. 명나라가 자국 안에서 돈으로 굴릴 금은이 부족한 것처럼 조선도 부족한데, 자꾸 금은을 많이 보내다 보니 나라에 돈이 말라붙어 어려움이 많다. 여유가 되는 대로 성심껏 조공으로 보낼 것이니, 직접 요구하지만 말아 달라. 이런 식으로 갈 것이오."

양녕의 말을 듣던 이방원이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조공으로 요구하는 양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 광산에서 캐건 민간에서 사들이건 간에 매번 부담이 크고 피해가 많았다. 그래서 나도 아예 조선에서는 금은이 더 이상 나지 않는다고 명나라에 주장해서 조공을 폐지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명나라 사신들이 오가면서 보고 명나라 조정에 알릴까봐 조선 땅에서 금은을 마음 편히 쓸 수가 없어지는지라 마음을 접었지. 그런데 명나라에 네 말대로 요구하고 그게 받아들여진다면 금은이 어느 정도 쓰이는 걸 사신들이 보더라도 문제가 없겠구나."

"예. 다음번에 그게 받아들여지게 만들기 위해 그릇을 교체한 것입니다. 나라에서 돈으로 쓸 금은이 부족해서 궁에서 쓰던 그릇도 민간에 풀었고, 대신 화려한 칠기로 대체했다는 흐름이지요. 직접 윤봉에게 명나라에 퍼뜨려 달라 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자의 성정상 명나라에 돌아가면 자기가 얻어 온 것을 자랑하며 떠벌릴 테니, 알아서 이런 인식이 퍼질 것입니다."

"윤봉조차도 사실을 모르고 자각 없이 퍼뜨리게 되는 묘수로구나."

그때 가만히 상황을 듣고만 있던 이조판서 허조가 말했다.

"저는 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진지함이 넘치는 허조의 표정에 좌중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고요 속에서 양녕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윤봉이 제아무리 조선 출신이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나 상선감 좌소감일 뿐입니다. 상선감이 황제의 밥상을 관리하는 곳이라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나 최고 아문인 사례감에 미치지 못하고, 그나마도 상선감 안에서도 우두머리인 태감이 아니라 좌소감에 불과합니다. 윤봉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여기서는 알 수 없으나, 기껏 힘써서 요청한 것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닙니까."

윤봉을 배웅하고 돌아와서 쉬던 분위기에 초를 치는 발언이기는 했으나, 지극히 타당한 말이었기에 다들 근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말과 면포, 동북방의 여진족 관리 전부 다 명나라에서 반길 조건들이긴 하지만, 대총재의 말씀도 옳습니다. 명나라가 거부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이번 사신 영접을 주도했던 양녕도 순순히 인정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허조는 원래 역사를 모르니 정말로 그냥 걱정하는 것이겠지만, 실제로도 엄청 중요한 분기점인 것은 맞다.'

지금 명나라 황제인 홍희제는 원래 역사에서도 건강이 좋지 않았고, 현 시점을 기준으로 두달여 뒤에 죽었다. 원래부터 지병이 있던 것이니 영락제의 사망 때처럼 원래 역사와 달라지는 점이 있더라도 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홍희제의 죽음이 만드는 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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