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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13화 (11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3화

113화

1425년 3월 초순 모일.

한성부. 응방.

윤봉은 임시로 응방에 모아 놓은 해동청들을 둘러보며 어떤 놈으로 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 해동청을 달라 요청했을 때 그건 조금 힘들다며 자꾸 빼던 조선 조정이, 자신이 양녕과 단둘이서 연회를 한 며칠 뒤 부랴부랴 찾아오더니 해동청을 많이 구했으니 직접 마음에 드는 걸 골라 가시라 전한 것이다.

'역시 양녕대군에게 뭔가 있긴 한가 보군. 조선 조정이 이리 급하게 내 기분을 맞춰주려 할 정도라니 말이야.'

미리 준비해 놓고 계획했던 것임은 꿈에도 모른 채 즐거운 표정으로 해동청마다 작은 날고기조각을 먹여 가며 식성 좋은 놈으로 고르던 윤봉에게, 옆에 같이 따라와 있던 예조판서 황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대군하고 연회는 즐겁게 하셨습니까?"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십니까?"

"악사도 부르지 않으시고 누각에 사람도 많이 들이지 않으셨다 들어서 말입니다. 혹시라도 미흡한 것이 있었을까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그 말에 윤봉이 씨익 웃었다.

'내가 대군하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아무래도 대군이 견제당하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야.'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무 문제없었고 오히려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고관인 황희의 질문에 거의 대놓고 대답을 해주지 않은 것이 즐거워진 윤봉은 더욱 신난 얼굴로 해동청을 다시 고르기 시작했다.

---

잠시 후.

한성부 도로.

해동청을 몇 마리나 고른 다음 말을 타고 숙소로 돌아가던 윤봉이 갑자기 고삐를 잡고 있던 군교에게 말했다.

"말을 잠시 멈춰 보게."

영문도 모른 채 군교와 말은 물론이고, 황희까지 포함한 모든 일행이 다 멈춰 섰다. 무슨 일인지 설명도 하지 않고 말에서 내린 윤봉이 걸어간 곳은 인근 민가 앞, 정확히는 대문 앞에서 누런 개하고 놀고 있던 사내의 앞이었다.

"제법 쓸 만한 개인 것 같은데, 어디서 샀느냐?"

갑자기 높은 사람이 다가와서 말하자 당황해서 개를 붙잡고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자세를 낮춘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똥개입니다. 산 것은 아니고 어디서 얻어 와서 키우는 것입죠.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그 개, 나 주게."

그 한마디에 사내는 물론이고, 상황을 살펴보러 왔던 황희와 군교들도 굳어 버렸다. 윤봉은 그 상황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당당히 말했다.

"왜 그러는가? 그리 좋은 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똥개라고 할 만한 개는 아니야. 조금만 잘 키우면 사냥개로 아주 쓸 만할 것 같아서 그렇네."

"그래도 가족처럼 키운 놈인데, 어찌 그냥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내가 겁먹었는지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도 할 말은 하자,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윤봉이 성큼성큼 다가가 사내가 개 허리를 잡은 손을 치워 버리며 말했다.

"거 말이 많구만. 일단 손 놓아보라니까."

그러자 윤봉의 손에 조금 전 응방에서 해동청들에게 먹이던 날고기 냄새가 남아 있었는지, 개가 윤봉의 손 냄새를 킁킁거리고 맡더니 고기를 달라는 듯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윤봉이 웃으며 말했다.

"거 봐, 이놈도 내가 좋다고 하지 않나. 사냥개인지 똥개인지 구분 못하는 주인보다야 내가 키우는 게 이놈한테도 좋다니까."

그 말에 사내가 무릎으로 기어와 개 허리를 다시 붙잡으며 말했다.

"아이고, 그래도 안 됩니다."

"거 정말 귀찮게 구는구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윤봉의 목소리가 더 커지려던 찰나,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란입니까?"

뒤를 돌아본 윤봉은 말에서 내리는 양녕을 보고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아, 대군. 이런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수행원들 데리고 잠시 지나가다가 소란스러운 것 같아서 와 봤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글쎄, 개 한 마리만 줄 수 있냐고 부탁했는데 이놈이 거부하지 뭡니까."

그 말을 들은 양녕이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눈만을 내리깔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대군이라는 말에 더 겁먹은 사내가 개 허리를 더 꽉 잡았다. 짧은 정적 뒤에 양녕이 말했다.

"그 손 놓고 개를 드리게."

양녕의 말에 옆에서 황희가 끼어들었다.

"하오나 대군……."

"멀리서 오신 귀한 손님인데, 개 한 마리 못 드리겠습니까?"

말을 끊긴 황희가 입을 다물고, 양녕은 이번에는 사내를 다시 보고 말했다.

"자네에게는 내가 개 값을 알아서 쳐서 줄 테니 손해 볼 걱정은 하지 말게나."

"돈으로 주신다고 어찌 가족처럼 키운 놈을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간절한 표정으로 사내가 말했지만, 양녕이 자기편을 들어주어 더 기가 산 윤봉이 웃으며 대꾸했다.

"얻어 와서 키우면서 똥개 취급하는 것을 가족처럼 키웠다고 하느냐?"

"빨리 손 놓으라니까. 뭣들 하느냐."

양녕의 말에 양녕의 수행원이던 군교들이 머뭇거리면서도 사내에게 다가가 손을 개에서 떼어내고 뒤로 끌고 갔다. 팔을 붙잡힌 사내가 버둥거리며 외쳤다.

"아이고 안 된다, 황구야! 황구야!"

그 작은 소란에 개는 신경이 쓰여 하는 것 같았지만, 윤봉이 다시 날고기 냄새가 나는 손을 내밀자 코를 박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개가 아주 공을 잘 따르는군요. 어서 가시지요. 오후에 연회에 참석하시려면 개는 숙소에 두고 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또 대군하고 단 둘이서 연회를 즐기는 날인데 늦으면 안 되지요."

"아이고 안 됩니다, 대군마님! 제발! 황구야!"

사내가 버둥거리다 못해 통곡하기 시작했지만 아랑곳하지도 않고 윤봉과 황희, 양녕 일행이 가버린 도로에는 사내와 사내를 붙잡고 있던 군교들만 남아있었다. 길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뒷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자, 짧은 적막 뒤에 군교 하나가 사내의 팔을 놓고 물었다.

"자네 설마 정말로 저 개한테 정 들었던 겐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슬쩍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사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원래 강아지를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게 금방 정이 들지는 않지요."

그 대답에 다른 군교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런데 그렇게 실감나게 억울한 척이 된단 말이야?"

"어디 남사당 노릇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닌데 뭐 대수로운 것도 아닙죠. 이 일만 잘하면 대군 마님께서 두둑이 챙겨주신다 하시기도 했고, 뭣보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도 이걸 잘하면 저 고자 놈이 골탕 먹는 거 아닙니까? 그런 재밌는 일이 있으면 열심히 해야지요."

그 말에 조금 전의 군교가 어처구니 없어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다른 이들도 자네처럼 그럴싸하게 잘 속이면 좋겠구만. 그보다도 우선 자리를 피하세. 지금 자네는 개를 빼앗기고 억울해 해야 하는데 이렇게 태연하게 재밌어하는 표정을 혹시라도 다른 이들이 보고 소문이 나면 큰일이야."

"예. 빨리 갑시다."

이윽고 남사당 사내와 군교들이 사라진 도로에는 정말로 적막만이 찾아왔다.

* * *

한참 뒤.

한성부 인근 누각.

이번에도 저번처럼 누각 위층에 양녕과 단둘이 자리를 잡고 앉은 윤봉이 말했다.

"괜히 필요도 없는 입씨름만 할 뻔했는데, 마침 대군이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기분을 잡치셔야 되겠습니까. 그깟 개 한 마리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괜히 이런 일에 얽혀서 대군께 피해가 가는 건 아니겠지요?"

그 말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곤경에 처할 입지였으면, 이렇게 공을 만나러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 말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잔을 비운 다음 윤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번에 이어서 바로 여쭙겠습니다. 제가 대군을 도울 만한 것이 정확히 어떤 것들입니까?"

지난번 누각에서 만났을 때는 결탁하게 된 기념으로 술만 마시고,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잡았던 것이라 지금 처음으로 자세히 묻는 것이었다.

"지금 조선이 명나라에 바치는 것들로 어려움을 겪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좀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입니까?"

"처녀 진헌과 금은 조공입니다."

처녀 진헌을 말한다면 화자, 즉 환관이 될 고자 진헌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 환관이 될 이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윤봉의 파벌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이들이다. 애초에 팔자를 펴고자 제 손으로 환관이 되려는 이들도 적지 않은 시대니, 굳이 윤봉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화자 진헌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처녀 진헌이라……. 그것은 황제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 제 힘이 닿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처녀 진헌은 따로 법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황제분들께서 삼한 여인을 좋아하셔서 그랬던 것이지 않습니까?"

한족이 몽골인을 몰아내고 칸이 된 것이나 다름없던 명나라는, 이전 원나라의 칸이 고려 여인들을 선호해 공녀로 끌고 가던 것처럼 조선에 처녀 진헌을 요구했다. 칸이라면 당연히 하는 일이라는 인식도 있었을 것이고, 원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고려양의 영향이 남아 삼한 여인들을 아름답다 여기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의 황제폐하께서는 아직 처녀 진헌 말씀을 꺼내신 적도 없지요."

원나라와 싸우고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나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정복군주인 영락제와 달리, 새로 황제가 된 홍희제는 몽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전형적인 한족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삼한 여인들에 대한 관심도 그리 크지 않았다.

"제가 감히 황제폐하께서 하시려는 일에 간섭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선에는 처녀 진헌을 폐지했으면 하는 간곡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다면야 제가 말씀드리기도 좋지요. 무엇입니까?"

"조선은 지난 고려 말에 왜구에 극심히 시달린 여파가 아직도 남아서 백성이 적습니다. 그래서 인구를 빨리 늘려서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여인들이 그대로고 사내들이 줄어든다고 해서 태어나는 아이가 크게 줄지는 않겠지만, 사내는 그대로고 여인들이 줄어든다면 태어나는 아이가 많이 줄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것은 여인들이니 아무래도 그렇지요."

"또 있습니다. 조선 땅 안도 아니고 이역만리 타향으로 가는 것인지라, 제 발로 가려고 하는 처녀들이 없습니다."

"그럴 만하지요. 가서 아무리 호사를 누리고 내명부의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한들 거기가 고향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리 총애를 받고 많은 사람을 부린다 한들 가족들 얼굴은 다시 못 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억지로 뽑아서 생이별시켜 보내다시피 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큽니다. 차라리 다른 귀한 것을 보낼 것이니 가져오라 하면 백성들도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만들고 구해와 바치겠지만, 자식을 보내는 것이지 않습니까."

환관으로 가서도 조선에 사신을 따라 올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를 만나러 꼭 서흥에 들렀고, 이번에 오면서도 부모의 무덤에 성묘를 갔을 정도였던 윤봉은 남의 일 같지 않았는지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일단 해보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냥 처녀 진헌을 면제해 달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지요."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그냥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면 저도 폐하께 말씀드리기가 더 좋지요."

"면포하고 말을 대신 바치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윤봉의 눈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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