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2화
112화
말도 없이 한참 동안 입 안에 든 것을 다 녹여먹은 윤봉이 눈을 빛내며 양녕에게 물었다.
"정말 맛있군요. 과자 이름이 무엇입니까?"
"별사탕이라 합니다. 재료 중에 자라가 들어가서 자라 별 자를 써서 별사탕이라 하지요."
실제로도 재료나 제조법을 확실히 숨기기 위해 넣은 향신료과 약재 중에 자라가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라가 들어갔으면 과자라기보다도 보약이로군요. 이런 건 어떻게 만듭니까?"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지요. 이걸 만드는 장인도 기술을 꽁꽁 숨겨놓고 자식에게만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그저 이름이 이러니 자라하고 설탕이 들어간다는 것만 알고 있지요."
태연한 양녕의 말에 다시 별사탕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윤봉이 슬쩍 말을 건넸다.
"조선에 이런 귀한 것도 있었군요. 사신으로 여러번 오긴 했지만 이런 걸 선물로 받기는 고사하고 상에 올라온 적도 없어서 몰랐습니다."
조정에서 자신에게 숨기고 주지 않은 좋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져다준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 그 말투에 양녕이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선에 자라는 나지만 설탕은 귀합니다. 그러니 이번에 공께서도 설탕을 선물로 가져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재료가 없어서 장인이 오랫동안 만들 수는 없던 것을, 최근에 조선 땅에 설탕이 조금 들어와 그것을 장인에게 주어 만들게 한 것인데 그런 귀한 것을 어찌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서 드리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흔한 과자라면 굳이 지금까지 숨겨 두고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윤봉 자신도 먹어 본 적 없는 맛이었고, 자신을 농락하려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일개 과자를 재상도 아니고 대군이 조용히 가져와서 주위 사람까지 물리고 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 과자가 귀한 것이라고 해도, 윤봉의 감은 눈앞의 이 대군이 무언가 더 숨기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리 귀하고 좋은 것을 한 상자나 받았는데,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을 받을 줄 알았으면 주상 전하께 드릴 선물을 좀 더 챙길 것을 그랬습니다."
이 과자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슬쩍 돌려서 확인하려 드는 것임을 눈치챈 양녕이 말했다.
"공적으로 오간 것이 아니라 그저 제가 개인적으로 찾아오면서 드린 선물일 뿐이니 그리 부담 갖지 마십시오. 어찌 선물을 드리면서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누가 보내서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가져온 것임을 드러낸 양녕의 말에 윤봉의 눈매가 변했다.
조정의 뜻으로 남들 눈을 피해 귀한 선물을 보낸 것이라면, 임금의 큰형인 양녕이 오는 것이 격에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적으로 자기 것을 가져온 것이라면 폐세자인 양녕이 귀한 뇌물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윤봉의 눈매가 바뀐 것을 본 양녕의 눈빛도 조금 달라졌다.
"그나저나, 제가 조만간 연회를 열고자 합니다. 다른 이들은 없이 오로지 공만을 위한 연회지요."
"그게 됩니까?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는 모두 예조에서 주관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아마 제가 공을 모시고 연회를 열겠다 하면 예조에서 막겠지요. 아무리 정식 연회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하지만 공께서 말씀하신다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뭐 사신이 직접 요청한다면 다르기야 하겠습니다만……."
말끝을 흐리기는 했지만 딱히 안 하겠다는 투는 아니었다.
"바로 답을 재촉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신 지 얼마 안 되셔서 앞으로도 머무실 기간이 제법 남았으니, 그 동안만 좀 생각해보아 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윤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전할 것은 다 전달했으니 더 오래 있을 이유도 없고, 있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제가 오래 머무르기가 좀 곤란하니, 먼저 일어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이 별사탕이라는 과자 선물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이들이 제가 이걸 받았는지도 모르게 잘 숨겨 두고 아껴서 먹겠습니다."
별사탕 뿐만 아니라 양녕이 와서 뇌물을 주고 갔다는 사실 자체도 숨겨두겠다는 말이었다. 그 행간을 읽은 양녕이 흐뭇하게 웃으며 윤봉에게 인사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 들리던 발소리가 다 없어지고 나서도, 윤봉은 박실도 부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작게 말했다.
"대체 뭐지. 폐세자가 되어 유배를 갔다는 것은 경사(북경)에 왔던 사신들을 통해서 듣기는 했지만, 어디 몸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행실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하기에는 내가 돌려 말한 것도 전부 다 잡아내고 대답했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으니, 생각해 보고 정말로 연회를 열어 달라 해야겠어. 그나저나 이거 진짜 맛있군."
별사탕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은 윤봉은, 주위에서 누가 볼세라 잽싸게 뚜껑을 잘 닫고 보자기로 감싸기 시작했다.
* * *
1425년 3월 초순 모일.
한성부 인근 누각.
누각 위층의 열린 창문으로는 제법 따뜻해진 봄바람이 들어왔고, 바깥으로는 화사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이 보였다. 악사는 한 사람도 없었지만, 밖에서 새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덕에 조용하지는 않았다. 그런 풍경 속에서 윤봉과 단 둘이서만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인 양녕이 물었다.
"참 경치가 좋습니다. 그나저나 이리 빨리 연회를 열 수 있어서 기쁩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물론입니다. 대군께서 가시고 며칠 뒤에 오신 예조판서께 말씀드렸을 때는 좀 당황하시긴 하시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숙소를 너무 틀어막아서 저하고 같이 온 다른 환관들이 곤란해하던 것을 다른 관리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데, 대군께서 몸소 와서 도와주셨으니 보답으로 같이 한잔하고 싶다는데 어찌 다른 말이 나오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먼저 말한 탓에 대군께서 주변에 눈치가 보이지 않으셨나 걱정입니다."
그 말에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한 양녕이 속으로 의기양양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도 눈치 보며 살던 처지였는데 별다를 것 있겠습니까. 그나마 공께서 직접 불러주신 덕에, 앞으로 한동안은 운신이 자유로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윤봉이 자기 상에 놓인 안주 하나를 집어먹는데, 계단에서 조심스럽게 환관 하나가 올라왔다. 그 환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윤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올 사람이 없는데? 그래도 내가 대군과 단둘만 있을 것이라 했는데도 이리 올라온 것을 보니 뭔가 더 있나보군."
"예. 사내 하나가 큰 짐을 짊어지고 와서는, 대군께서 오라 하셨다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 말에 윤봉이 양녕을 바라보았다.
"궤짝을 짊어지고 온 것이라면 제가 부른 것이 맞습니다. 여기까지 올려 보내 주시지요."
"그렇다고 하신다. 올려 보내라."
윤봉의 말에 환관이 내려가고 잠시 뒤, 정말로 사내 하나가 큰 궤짝을 가지고 올라와 술상 근처에 내려놓고는 다시 내려갔다.
"이것들이 대체 무엇입니까?"
흥미가 동한 윤봉이 술잔을 내려놓고 양녕에게 물었다.
"설명보다도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입니다."
양녕도 술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궤짝을 열고 안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 내려놓았다. 온갖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갑옷 몇 벌과, 마찬가지로 금은과 비단실로 꾸며진 도검들이었다.
"이게 다 뭡니까?"
"왜인들의 갑옷하고 도검입니다."
"아,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왜도로군요. 왜인들 갑옷도 중국이나 삼한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신기하군요."
눈을 빛내며 구경하는 윤봉을 보고 양녕이 속으로 비웃었다.
'역시 남성성을 잃은 것에 대한 반동인지, 권력욕이 갑옷이나 도검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진 것인지, 진짜로 귀한 물건이라 생각해서 흥미를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전부 다인지는 몰라도 엄청 좋아하는군.'
"그런데 갑옷이나 칼에 약간씩 상하거나 얼룩진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침탈하러 온 왜구들을 진압하고 빼앗은 것이라 그렇습니다. 얻는 과정이 그래서 그런지 닦는다고 닦았는데도 조금씩 상하거나 얼룩진 곳이 있더군요. 그래서 선물치고는 조금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달라고 할까 생각하던 윤봉은 선물이라는 말과 빼앗은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더 밝아졌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왜구들이 직접 썼던 것이라면 더 확실하게 진짜배기 물건이라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써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선물로 드린 것이니 이미 공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윤봉은 바로 관을 벗어 내려놓고 투구를 써 보기도 하고, 칼 중에서 제일 호화롭게 장식된 것을 한번 칼집에서 뽑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좋아하던 윤봉이 다시 투구와 칼을 내려놓고 관을 쓰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구를 잡고 빼앗은 것이면 설마 대군께서 직접 잡으신 것입니까?"
윤봉의 질문에 양녕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허허허, 어떻게 종친이 군대를 부리고 왜구들을 잡겠습니까."
칠주도에서 정동군을 이끌며 전리품으로 얻어 조정에 바치면서, 조정에서 관리만 하되 소유는 자신의 것으로 해 달라 했던 바로 그 갑옷과 도검들이었지만 윤봉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양녕이 말하는 대로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만……. 그럼 관군이 얻어서 조정에 바친 전리품인 것 아닙니까?"
"제가 그 정도 힘은 쓸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내보인 양녕의 미소에 윤봉의 눈빛이 다시 달라졌다.
"어째 제가 대군께 도움이고 선물이고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 된 도리로 이렇게만 있을 수는 없겠지요. 뭔가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나,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어차피 여기는 듣는 귀도 없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걸려들었다.'
쾌재를 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양녕이 차분하게 다음 계획으로 넘어갔다. 슬쩍 주변을 살피고, 술잔을 조용히 비우고 내려놓은 다음 양녕의 말을 기다리는 윤봉에게 말했다.
"아마도 아시겠지만 저는 폐세자입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리되었고, 또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권한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마치 조선에서 양녕의 입지가 위태로운 것 같은 얘기를 꺼냈으니, 이후로는 절대로 양녕이 해동의 오 태백으로 여겨진다는 비슷한 소리도 윤봉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지극히 중요한 순간의 시작이었기에 올라오는 긴장을 감추며, 여전히 가만히 듣고 있는 윤봉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 목숨이 어디까지 부지될지를 모르겠습니다. 폐세자라는 것이 워낙 위험한 존재 아니겠습니까."
"뭐……. 그렇지요."
"그래서 만일 제가 공께 부탁드릴 것이 있다면, 이 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도와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걸 제가 도울 방법이 있겠습니까?"
"지금 조선이 명나라와의 사이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제가 해결하고자 합니다."
"곤란을 해결하는 것이 대군의 안위와 관련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공을 통해서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면 명나라의 황제폐하께서도 제 이름을 아시겠지요. 그리고 저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주신 공께서는 계속 폐하 곁에 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과연. 황제폐하께서 대군의 존재를 알고 관심을 가지신다면, 조선 안에서 대군을 크게 위해하기 어렵겠지요."
"그리고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고 황제폐하께도 이름을 알려 조선에서의 제 입지가 커진다면, 제가 어찌 절 도와주신 공을 잊겠습니까?"
제법 매력적인 그 결탁 이야기에 윤봉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인 저나, 주상전하의 큰 형이신 대군이나,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번에 조선에 사신으로 온 것이 실로 지복입니다. 아니 그랬다면 다른 사람이 대군 같은 귀하신 분을 만났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저야말로 공을 만난 것이 정말 천운입니다. 하하하하!"
드디어 윤봉을 조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한 양녕이 호쾌하게 따라 웃기 시작했다.